〈 51화 〉51화 : 밀수
가지 너머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거칠거칠하지만 기분 좋은 나무 껍질의 감각 너머로 정령체가 자유롭게 비행하는 것을 느낀다.
가르침을 내려 줄 사람 하나 없이 포인트와 노력으로 습득한 정령술의 최상급 기교인 분신.
그 어렵디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고 처음으로 하는 일이
어린 소년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지만,어쩌겠는가.
백 여년만에 생긴 대화 상대에게 놀러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아무리 엘프가 수백 년을 느릿하게 살아간다 해도
인간의 틈바구니에 있으면 조금은 격렬하게 움직일 때도 있는 법.
다른 성좌들과는 달리 친근하게 답장해 준 모습에 가슴이 조금은 두근거렸다.
‘어떻게 생겼을까? 벌서 내려가다니 조금 부럽네.’
분신과 똑같이 생겼을까? 아니면 조금 다를까.
성좌의 권역에서 마주보면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을까.
세계수의 가지를 곁에 두고 잘 자는 것 같으니까 정령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힌다.
이처럼 가슴이 강하게 뛰는 것이 몇 십년 만인지.
마음 같아서는 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선배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20년 정도 지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다.
몽마는 인간과 같은 시간축을 살아가는 존재니 엘프식의 시간 관념을 들이대면 지칠 것이다.
‘몽마의 마력은 처음인데...’
드워프가 손재주가 뛰어나고, 수인이 들판을 잘 달리는 것처럼
몽마들은 저렇게 분신을 통한 간접적 체험에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벌써 수 십년간 성좌의 권역에 묶여 있는 자신과 다르게
고작 1년 만에 화신들의 곁으로 강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인족이 물 속에서 숨을 쉬는 것 같은 종족적 특징.
그런 환상을 이용한 분신이 조금은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니까.
엘프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다른 종족이 부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도착 했나?’
눈을 꾹 감고 침대에 누우니 녹색의 방이 사라지고 신기하게 생긴 방이 눈에 들어온다.
벽면에서 불룩 튀어나온 세계수 가지와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들
그리고 이 쪽을 덩그러니 바라보는 한 남성.
정신을 집중해 정령을 다룬다.
아직 연결이 불안불안한게, 조금 충격을 받으면 연결이 끊길 것 같다.
성좌의 권역에 분신에게 해를 끼칠 존재가 뭐 있겠냐만은.
“안- 녀엉-!”
이상함을 느낀 것은 정령의 입을 연 직후였다.
훅 뒤바뀐 시야에 적응하기도 전에 온 몸의 피부를 간질이는 마력의 향이 끼쳐온다.
마치 어렸을 적, 꽃을 모아두는 항아리에 빠졌을 때와 같이.
입으로는 준비해뒀던 인사말을 꺼내지만 감각은 이미 취해버린 듯 어질어질하다.
“얼, 굴을 마주 보-”
숨이 턱, 하고 막힌다.
고작해야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호흡이 끊기며 말문이 막힌다.
보글보글하고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져서 최대한 힘을 쥐어짜 목에 힘을 주었다.
“아, 안녕!”
그리고 끝.
퐁 소리와 함께 다시 익숙한 방 천장이 보인다.
“저, 저게 뭐야아...”
눈을 뜨지도 못한 상태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린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이 느껴진다.
화면 너머의 분신체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
바로 마력의 향기.
“이래서 어른들이 조심하라고 한 건가? 간다고 말하고 바로 가지 말 걸 그랬어...”
엘프의 마력은 숲 속 깊은 곳의 향이 난다.
드워프들은 불꽃에 두드려지는 쇳가루의 냄새가 나고,
수인과 인간들은 출신지에 따라 자신들의 뛰놀던 곳의 마력을 옅게 담아둔다.
그래서 몽마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달콤한, 비릿한, 노골적이면서도 야릇한,
음탕하면서도 고요한, 따스하게 포옹해 줄 것 같으면서도 격렬히 휘몰아칠 것 같은.
그런 정신 없는 마력의 폭류.
향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폭력적인 감각이 뇌를 뒤집어 놓았다.
그래, 그 어린 몽마에게는 너무나 야한 냄새가 났다.
방구석에 틀어 박혀 숫처녀로 지낸지 백 년이 넘어간 엘프에게 너무 자극적인 냄새가.
※
쪽지가 멈췄다.
‘뭐지, 괜히 걱정되게.’
정확히는 뭔 자그마한 정령이 톡 튀어나와서 안녕 안녕하고 보글보글 끓어서 사라지고 나서는 연락이 없다.
성좌가 잘못될 일은 없을테고 실제로 한예린 곁에 정아린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봐선 별 일 아니겠지.
얼굴을 마주보다 수줍음을 타고 사라진 엘프 소녀도 신경쓰이지만 다른 일이 생겨서 집중이 분산된다.
“선배, 이번에는 무슨 일이래요?”
“몰라, 좀 큰 게 터졌나본데...”
이제는 익숙한 세 명이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정아린의 말 대로 큰 게 터졌는지 다른 사람들이 엄청 많다.
커피를 나눠주면서 보던 인구 밀도의 두 세배.
지금 순찰 도는 사람 말고 전부 끌어모으기라도 했나?
“자자, 전부 주목.”
그 뒤에 이어지는 장면은 마치 철 지난 경찰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옷 대충 차려 입은 매섭게 생긴 중년의 아줌마와 능글맞게 생긴 아줌마 둘이 들어와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으니까.
조금 심각한 사안인지, 꽤 높으신 분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중하게 분신을 거둬주십사-
하고 고개를 꾸벅 꾸벅 숙이길래 커피도 나눠주지 못하고 원룸으로 돌아온 상태.
여기서 보나 저기서 보나 차이가 있을까 싶어 궁금해 하는 와중 다른 화신들도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도시에 밀수꾼들이 들어 왔다구요?”
“근데 고작 밀수꾼 때문에 우리가 모여야 해?”
“그런 것 치고 너무 삼엄한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질문이 던져진다.
확실히, 범죄 제압에 특화된 화신 백 수십 명을 모아놓고 호들갑 떨 내용은 아니긴 하다.
테러 작당을 하던 반사회집단도 수 십명이서 제압했는데 고작 밀수꾼 때문에 전원 집합이라니.
하지만 그 시끄러운 분위기도 단 한 문장을 듣고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그 쪽에도 성좌가 직접 엮인 것 같다.”
“예?”
걱정해서 손해봤다는 것 마냥 느슨하게 풀어지던 사람들의 자세가 정자세로 원위치된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부터 음료를 마시다 사례가 들러 휴지를 찾는 사람까지 다양한 반응들.
하긴, 성좌가 하나 껴 있으면 이야기가 바뀐다.
성좌를 반 쯤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이 쪽 세계 사람들의 정신머리는 둘째 치고
범죄 조직을 성좌가 서포팅하면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지겠는가.
왜냐하면 여기 사무실, 그 검은 안개가 없거든.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볼 수 있으면 다른 성좌도 볼 수 있다.
애초에 성좌 대비책이 펼쳐져 있었으면 내가 무슨 수로 한예지를 구경하며 찾아갔겠는가.
그리고 쪽지를 보면 나 때문에 시들지 않는 거목도 몇 번 구경하는 것 같았고.
백 수십명의 화신들중 누군가는 성좌에게 기대 받는 루키일테니 내가 모르는 성좌도 여길 몇 번 보고 갔겠지.
그럼 그 밀수 쪽 성좌도 이런 회의까지 전부 본다는 거 아닌가?
“따라서, 이번 작전이 끝날 때 까지는 대 성좌용 프로텍트를 발동하겠다. 중요한 것은 밀수 품목인데-”
그렇게 내가 성대하게 헛다리를 짚는 동안 직급이 높아 보이는 두 사람이 말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표혔했냐면, 갑자기 소리가 안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아 이, 뭔데 진짜.”
고장난 TV를 보는 것처럼 갑자기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이 입을 뻥긋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스크린이 갈라지는 것처럼 눈 부분과 입 부분, 그리고 그 아래가 조금씩 기괴하게 프레임이 깨진다.
마치 그래픽 카드 사양이 부족한 게임의 찰흙 캐릭터처럼 뭉개지는 사람들.
“프로텍트를 바로 킨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마우스를 도르륵 굴려 도시를 내려다 보았지만 모든 도시가 그렇게 보인다.
자동차처럼 보이는 폴리곤 덩어리는 허공을 날고
사람 모양이던 졸라맨은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며 풍선 인형처럼 기괴하게 휘청거리며며 움직인다.
‘존나 철저하네 진짜...’
솔직히 밀수품이 뭔지, 왜 그렇게 심각한지, 어떤 성좌가 이 후방부의 평화로운 도시에 얽혔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절묘한 순간에 끊어버렸다.
밤이 된다면 한예지의 자각몽 속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너무 멀다.
그녀가 12시에 잠에 든다 해도 거의 8시간은 기다려야 하니까.
슥슥 화면을 돌려보니 그 프로텍터라는 것은 정말 도시를 완벽하게 감싼 것 같았다.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고속도로부터는 멀쩡하게 보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슥슥 마우스를 움직이다 화면을 보았다.
“여기도?”
한예지가 지내는 옆 도시도, 그 옆 도시도.
“미쳤네, 진짜...”
총 다섯 개의 도시가 전부 프로텍터에 휘감겨 있었다.
동대륙의 수도는 아니라지만, 적당히 잘 발전된 중소규모의 도시였다.
화면을 축소해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둘러보려면 한참이 걸리고 분신을 내려보내면 전부 둘러볼 수도 없는 도시.
그런 도시가 다섯 개 얽힌 밀수꾼이라니.
이 정도면 밀수꾼이 아니라 국제 단위의 마피아 조직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