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50화 : 엘프소녀 下 (50/169)



〈 50화 〉50화 : 엘프소녀 下

편지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읽을수록 어째서 이 생면부지의 엘프 소녀가 내게 이토록 친절한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작은 소동물 보듯 귀여워하고 신기해하는 것처럼
이 엘프 소녀도 나를 어린 소년 취급하고 있었나보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외형은 그렇다 쳐도 이미 성좌로서의 삶만 비교해도 거의  년 정도 차이가 난다.
화신도 농부만 수백 명, 전투 인원으로 빠진 화신은 수십  정도 데리고 있는 데다
포인트를 사용하는 규모도 나와 0이 3개 정도 차이나는데.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고 어린 인간 남성에 초짜 성좌라고 조심스럽게 대하는데
거기에 화를 낼 정도로 인성이 망가진  아니니까.

그렇게 엘프에 대한 생각을 하는 동안 축복을 받은 한예지와 정아린, 남궁희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봐도 들뜬 것이 보인다.


‘하긴, 성좌가 두 배인데...’

 소리가 나게 한예지의 등짝을 후려 친 정아린이 크게 웃으며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내든다.
그 과장된 몸짓에 한예지와 남궁희가 적당히 호응하며 밥을 얻어 먹을 생각으로 털레털레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 남궁희가  이 조에 편입되어 3인 1조의 편제를 이루었을 때.
 때는 다들 서로 어색한 사이였다. 정아린에게 한예지는 실력 좋은 후배 겸, 성좌에게 사랑 받는 화신 정도였으니까.


선배로서 잘 대해 주지만 그게 전부였던 관계.
남궁희에게도 두 사람은 그냥 처음 만난 직장 선배들이지 뭐 별다른 감상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관계가 훨씬 깊어진 것이 보인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시들지 않는 거목’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성좌에게 커피를 얻어 마시는 것과, 자신의 성좌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정아린은 한예지 덕분에 제 성좌에게 관심을 받고 축복을 받으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다닌다.
한예지는 엄격하던 선배가 잘 대해주고 후배는 말을  들으니 세상 편안하게 직장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궁희는 제 성좌를 닮아서인지 다른  상관 없고
직장 선배 겸 같은 조원인 두 명이 실력이 괜찮아서 만족해 하는 걸로 보이고.


세계수의 가지 덕분일까, 어째서인지 스크린 너머로도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원활하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얼굴을 마주보다가, 그 다음에는 스크린 너머로 관찰하다가
 다음에는 편지의 글씨체나 세계수 가지 너머로 느껴지는 존재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세상이 빙글 돌았다.



새하얀 천을 몸에 두르고 있는 소년 소녀들.
어떤 옷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법한 옷이었다.
그  천 하나를 허리랑 어깨에 둘둘 두르는 그런 복장.

한 쪽 어깨에서 내려와 허리를 감고 허벅지까지 가린 새하얀 천과 어깨와 허리께를 잡아주는 녹색 브로치.
나뭇가지와 잎사귀 모양새로  다듬어진 공예품은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 이건 시들지 않는 거목의 꿈이구나.

귀가 뾰족하거나,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 귀를  소년 소녀들이 서로 장난을 치며 농사를 짓는데
저 높은 하늘에서 나뭇가지가 내려와 사람을 도와주는 장면을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2번 밭은 누가 가 있어?”


“녹스랑 데이아? 아마 두 명이서 같이 갔던 것 같은데.”

“그래? 두 명 요즘 자주 붙어다니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불사르는 폭군의 기억 속에 빨려 들어간 것과 비슷한 상황.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어루만지며 능력을 쓸 때, 우연히 시들지 않는 거목도 세계수의 가지를 건드린 걸까.
정확히는 몰라도 세계수의 가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  것이 분명하다.

맨 발에 느껴지는 촉촉한 흙의 감촉부터 저 멀리 원근법을 무시하는 거대한 나무 줄기로부터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까지.
전생에서도 성좌가 돼서도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의 향기를 만끽하는 동안 세상이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비디오처럼 흘러간다.

자그마한 소년은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는 청년이 된다.
복슬복슬한 귀가 귀여웠던 강아지 소녀는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 된다.
청년들은 노인이 되고 여인들은 노파가 된다.

허나 세 종족의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도 달랐다.


청년이 노인이 될 때, 여인은 아줌마가 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엘프들은 여전히 자그마한 소년 소녀의 모습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엘프만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가 찾아왔다.

 명의 엘프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죽었다.
촉촉한 흙을 비집고 나오는 녹색 새싹이 가득하던 공터는 어느새 묘비로 가득 차 있었다.
본능에 따라 사랑을 나눴음에도 마왕의 저주 때문인지 아이를 가진 사람은 없었기에
이 곳에는  명의 엘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밖에 있다 뒤늦게 들어온 엘프 소녀 하나가 가장 먼저 죽었다.
세계수의 가호로 순수하게 유지된 두 명과 달리 마왕의 독기가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느릿하게 몸을 좀먹었기 때문이다.
고통과 장애가 닥쳐온 것은 아니지만 수 백년은  수 있었던 소녀가 고작 백 오십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 남은 엘프 소년이 죽었다.
엘프와 같은 장생종은 삶이 짧은 종족과 어울리는 법을 따로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교육 시키고 삶의 순환을 알려 줄 어른들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명을 제외하고 모든 친구가 죽었다는 것에 절망한 소년은 목을 매었다.

마지막 엘프 소녀,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겨두고.


‘여기도 어지간히  같은 세상이네...’

혼자 남은 엘프 소녀는 자그마한 밭과을 가꾸고 세계수를 돌보았다.
새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혀  익는 것이 수 백번 반복되는 동안.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보내던 어느 날, 해가 떴음에도 소녀는 밭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 금이 간다.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더 깊은 곳으로 휩쓸리는 것이다.
수영장에서 인공 파도에 휩쓸려 내가 원하던 곳과 다른 곳으로 몸이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
등허리를 휘감은 무형의 흐름이 나를 어디론가 이끈다.

복도와 박물관 모양이던 두 화신과는 다른, 커다란 나무의 모습을  내면 세계로.

열매 하나에 기억 하나.
강렬한 기억은 커다랗고 색이 진하며 흐릿한 기억은 시들시들하다.
행복했던 기억에서는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며 슬픈 기억에서는 썩어가는 퇴비의 냄새가 난다.
그런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가장 커다란 열매 두 개.

하나는 엘프 소년이 웃는 모습이고, 하나는 목 매어 죽은 엘프 소년의 모습이다.


‘하긴,  긴 시간 동안 좋아할 수도 있지.’


서로 사랑하고 맺어지고 빠르게 사그라든 인간과 수인족과는 달리, 엘프들의 사랑은 느렸다.
미처 그녀가 고백하기도 전에 목을 매어 죽어버릴 정도로 느렸다.

시들지 않는 거목이 사랑했던 엘프 소년.
저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지만 호기심을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화신의 기억과는 비교도 할  없는 무거운 내용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세계수 가지가 뻗어 나와 있는 원룸의 벽.
시간이 다 된 건지 너무 깊이 들어 갔는지 자연스레 튕겨져 나온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나 새로운 관리법을 배운 것 같아]
[네가 하는 것처럼 세계수를 통해 정령을 보내는 건데]
[드디어 포인트를 다 모았어!]

침대 머리맡에는 쪽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뭇가지가 정돈이라도 해 뒀는지 왼쪽부터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는데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렇게 쪽지를 천천히 읽고 있으니 머리 위에 톡 하고 종이 쪽지 하나가 더 떨어진다.

[지금 갈게]

“뭔 공포 영화도 아니고...”

 생각 없이 쓴 내용이겠지만, 순간적으로 ‘이거 악몽에 써먹을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멋대로 남의 기억을 헤집었는데 그 대상이 지금 간다고 말하고 툭 튀어나온다니.
심장에 안 좋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세계수의 가지가 파르르 흔들렸다.


“안- 녀엉-!”

나뭇가지 사이에서 등장한 것은 팔뚝만한 정령.
안개처럼 흐트러진 하반신과, 물방울로 만들어진 얼굴을 보면 정령이 맞겠지.
엘프 하면 정령 아니겠는가.


“얼, 굴을 마주 보-”

엘프 특유의 말투인지, 독특하게 끊어 말하던 그녀가 말을  멈춘다.
그러더니 물방울로 이루어진 작은 몸뚱이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다 물안개가 되어서는,


“아, 안녕!”

퐁, 소리와 함께 다시 사라졌다.


얼굴만 보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반응이라는  알  있을 정도.
그제서야 나는 그 커다란 기억 속, 엘프 소년의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놓고 내 얼굴이네...’

소년과 청년의 차이가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목 매어 죽은  엘프 소년이 나이를 먹고 운동을 하면 나처럼 자랐을 것이다.
아포칼립스에서 험상궂게 자란 얼굴이 아니라 여인들의 꿈을 모아 만든 아름다운 얼굴로.


역시 미의 종족이라 해야 할까?
그냥 동네 소년이 여자들의 무의식이 뽑아낸 완벽 미남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불합리함을 느낀다.
하기야 기억 속 시들지 않는 거목도 다른 엘프도 아름다움은 걸어 움직이는 그래픽처럼 생기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휴유증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사라진 정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쪽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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