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화 : 엘프소녀 中
불사르는 폭군은 미래 SF 세계관에서 온 유전자 조작 인간이었지만, 일단 ‘인간’ 이었다.
평범한 사람보다 튼튼하고, 병에 걸리지 않고, 체력도 정력도 우월하며 노화도 느리고 수명도 다르지만
개념적인 부분에서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중세 사람도 2000년대 사람도 아포칼립스 직전에 살던 사람도 엄청 다르지만 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쪽지로 대화를 나누는 엘프 소녀는, 말 그대로 ‘엘프’ 였다.
대화 하나하나에 종이 다르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며 판타지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소녀.
아바타가 쿨타임인 대낮에는 원룸에서 대륙을 관음하는 것보다 쪽지로 대화를 나누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 흥미로웠다.
오락거리가 없어서 활자에 집착하게 된 아포칼립스 생활 때문일까?
[그래서 기본 배급되는 음식보다 직접 키운 야채가 더 맛있다고?]
[응, 사실 공양물로 음식을 받은 건 처음인데 너무 맛있어]
부풀어 오른 통조림을 먹고 탈수로 죽나, 아니면 그대로 굶어 죽냐의 상황을 자주 겪은 내게는
유통기한이 잔뜩 남은 냉동식품 정도면 천국의 음식이었는데.
엘프인 그녀에게는 아닌가 보다.
그녀에게는 공짜 냉동식품도, 한 끼에 1,000pt가 넘어가는 고급 식사도 전부 마나로 만들어진 인조 식품의 맛이 난다고 했다.
일단 마나를 맛으로 느낀다는 말에 한번 놀라고,
한 끼에 100pt에서 1,000pt씩 박으며 실험했다는 말에 두 번 놀랐다.
동대륙 농사꾼들을 밀어주는 중견급 성좌가 그녀니까 풍족한 것은 당연하겠다 싶기도 하고.
이쪽 세상에서는 식량 과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 세상에서야 식량 공급의 불균형으로 한 쪽에서는 가격 유지를 위해 식량을 불태우고
다른 쪽에서는 굶어 죽었다지만 이 세상은 게임처럼 포인트 거래가 있었으니까.
성좌가 농사꾼 화신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식량이 남아돈다?
그러면 제사로 바쳐서 포인트로 바꾼 뒤, 대륙을 지키는 전쟁터에 후원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율은 좀 나쁘더라도 생산량이 한정된 금속이나 기름 등으로 바꿀 수 있으니 자원은 많을수록 좋았다.
[식사가 너무 맛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요즘은 정말 행복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서 행복함이 듬뿍 느껴진다.
비유가 아니라, 몽마의 권능이 점차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수의 가지라는 녀석은 주변의 생명체에게 이로운 효과를 준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성장 속도가 두 배, 세 배 가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바타 운용에 따른 피로감이나
악몽 탐색에서 느끼는 옅은 두통은 확실히 사라진 상황.
문제라면-
[세계수의 끝자락이 악몽의 편린을 소화 중입니다]
세계수라는 녀석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뻗어 내가 챙겨둔 악몽의 편린을 꿀꺽 삼켰다는 정도?
고작 하나 가지고 있고 사용하는 방법도 몰라 원룸 업그레이드하는 데 썼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먹인 것도 아니고, 나 자는 동안 나뭇가지가 원룸을 뒤적거리다 꿀꺽 삼켰는데 어찌 안 궁금할까.
[세계수가 악몽의 편린이란 걸 삼켰다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세계수 관리자들은 어른들인데, 다들 전쟁에서 죽었으니까]
[나도 포인트로 관리법을 배우고 있긴 한데, 가지치기나 잎사귀 돌보는 정도밖에 몰라-]
물론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짜 몽마가 된 내가 포인트로 나와 내 화신들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것처럼,
전쟁에 나섰다 돌아오지 않는 어른들에게 방치된 어린 엘프 소녀도 포인트로 세계수 관리에 대해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중이니까.
물론 나와는 포인트의 자릿수가 두 개 정도는 다르겠지만.
[슬슬 출동하는 것 같은데 구경하자]
마지막으로 툭 던져진 쪽지를 보고 나는 한층 커다랗게 바뀐 스크린 앞으로 갔다.
싸구려 게이밍 의자 대신 흑단 나무로 만들어진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아 스크린으로 한예지를 살펴본다.
시들지 않는 거목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는데, 한예지의 선배와 계약한 성좌였다.
화면 속에서는 나의 화신 한예지와 시들지 않는 거목의 화신 정아린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듬직한 후배 남궁희도 같이.
[그럼 네 화신은 무슨 은총을 받았어?]
[자연과의 소통이랑 감각 강화? 드루이드 기초 교본을 줬던 것 같은데]
어쩐지 가로등이 고장 난 야밤에도 숨어 있는 범인들을 잘도 찾아내고 추적한다 싶었더니,
도시의 가로수나 참새들이 알려준다는 말에 납득 할 수 있었다.
추적과 색적을 담당하는 정아린, 저격으로 원거리 제압을 하는 한예지, 근거리 격투와 난투에 익숙한 남궁희까지.
팀워크도 잘 맞는 한 팀이 불량배 조직을 소탕하는 모습을 보니 잘 짜인 액션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성좌, 시들지 않는 거목이 화신의 활약에 흡족해합니다]
[성좌, 시들지 않는 거목이 무기력한 악몽에게 화신을 자랑합니다]
쪽지가 오가다 말고 한예지 팀에 메시지가 가길래 나도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급히 채팅을 쳤다.
어느 정도 오타가 나도 대충 번역해서 보내주니 이럴 때는 참 편하단 말이지.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화신들의 활약에 기뻐합니다]
나는 성좌치고는 매우 독특하다.
고작 1년 차 성좌 주제에 마음껏 지상에 아바타를 보내는 것도 그렇고
그 아바타에 딱히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나 짊어져야 할 패널티도 없다.
그렇다고 지상에서 뭔가 일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주전부리나 먹으며 화신들을 격려하고 있으니까.
특이한 놈이 자신의 화신 옆에서 꼬물꼬물 돌아다니니 성좌의 시선이 쏠린 것도 당연.
남궁희의 성좌는 자기 단련에만 관심이 있는 외골수라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정아린의 성좌 시들지 않는 거목은 곧바로 나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하린에게 제사 부탁한 것도 네가 시킨 거야?]
[응, 내 화신들이 그 넓은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데 나는 못 먹는 게 너무 억울했어]
한예지가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치안을 어지럽히는 불량배 무리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동안
아카데미를 아직 졸업하지 않은 이하린은 매일매일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대상은 내가 아니라 시들지 않는 거목.
제사의 연습을 위한 마법 시약이나 비용을 받는 대신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매일 신선한 채소를 제물로 바치는 중이다.
나야 기본 제공 음식도 맛있게 먹으니 그편이 이득 아니겠는가.
실제로 아바타나 꿈속 생명체를 구현하는 게 전부인 나와 달리
이 엘프 소녀는 세계수의 가지를 조작해서 이하린과 한예지에게 축복을 내려줄 수 있었으니까.
사람보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소환하는 것과 잠을 적게 자도 숲에서 하루 푹 쉰 것처럼 컨디션이 좋아지는 버프를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지.
‘생각보다 쓸모가 없네...’
아직 몽마로서 미약해서 그런지 성좌로서의 격이 떨어져서 그런 걸까.
악몽 속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은 생각보다 쓸모가 없었다.
식칼을 든 가면 살인마나 망치를 든 미치광이 광대 따위는 소환해 봐야 최하급 화신이랑 비등비등한 수준.
사람 크기의 거대 바퀴벌레나 끔찍하게 생긴 크리쳐들도 보기에만 역겹지 전투에는 쓸모가 없다.
그리고 뭐... 끈 수영복을 입고 유륜이나 가랑이 언저리까지 노출하고 있는 금발 흑발 레즈비언 포르노 배우들은
다른 의미에서 공포를 선사할 수 있긴 하지만 남들 앞에서 소환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의 위키처럼 인터넷에 내 정보를 정리한 항목들이 있는 와중에
동성애 포르노 배우를 소환한다는 정보를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성좌/논란/동성애비하] 이런 게 생길까봐 머리가 아찔하다.
이딴 항목은 원하지 않아, 정말로.
[성좌, 시들지 않는 거목이 신선한 채소에 포만감을 느낍니다]
[작은 세계수의 가지가 청량한 공기를 내뿜어 자그마한 축복을 내립니다]
야밤의 추격전이 끝나고, 뒷수습을 위해 사무실로 털레털레 돌아가는 세 여자의
머리 위로 녹색의 가루가 꽃가루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그러자 어깨가 쭉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인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있었다.
내 방 가지에서도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몽마의 육체는 이 자그마한 축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악마 속성이라 데미지를 받고 끼에엑- 소리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 확 달아나니까 문제였다.
꿈속 세계 거주민이라는 명칭답게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잠겨 있다 강제로 잠이 깨는 기분.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데 층간소음 때문에 얕은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는 그 축복 안 해줬으면 좋겠어]
[혹시 기분 나빴어? 정말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기분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
동글동글한 글씨 대신 날려쓴 글씨의 쪽지가 우다다 날아온다.
활기차고 명랑한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당황과 미안함, 걱정이 잔뜩 담긴 것이 느껴진다.
양피지인지 파피루스인지 풀 내음 가득한 종이를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진다.
그러니까... 내가 얘를 보는 시선이, 얘가 나를 보는 시선이랑 똑같구나.
세계수 가지 너머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자그마한 엘프 소녀다.
키가 150은 될까 싶은 하얀 피부에 금발인 전형적인 엘프.
채소가 신선해서 기뻐하는 등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고 화신에게 축복을 잘 내려주며 노래하듯 말하는 활기찬 소녀.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엘프.
세계수 속에 남겨진 백 수십의 아이들을 이끌던 무리의 지도자며 나이 백 수십 살을 먹은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외형과 행동을 보고 어린 소녀라고 생각했지만
시들지 않는 거목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로 내가 어린 소년이라는 소리.
하긴, 전생과 성좌의 삶을 합치면 거의 200년을 보낸 엘프의 시선이다.
인간의 전생은 그렇다 치고 성좌가 된 지 1년 정도 지난 풋내기니까.
편지의 말투가 어린애랑 회화하듯 가볍게 쓰여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나.
[진짜 괜찮으니까 그만해]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잠이 달아나서 그런 거야. 아프진 않아]
엘프와 인간의 시선 차이에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세계수의 가지가 내 머리 위에 열 댓개는 되는 쪽지를 툭툭 집어 던지길래 일단 시들지 않는 거목을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