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48화 : 엘프소녀 上 (48/169)



〈 48화 〉48화 : 엘프소녀 上

성좌

그러니까 별 성(星)에 자리 좌(座) 쓰는  존재들은 말 그대로 별자리에 자리 잡은 존재들로 통한다.
원래 세상의 소설 설정에서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쪽 세상에서 우리가 화면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 하나 없어 밖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원룸이지만
일단 이쪽 세상에서 성좌는 저 하늘 위에 있는 존재다.
원래 세상에서 별자리에 설화가 있는 것처럼 이쪽 세상에서도 별은 성좌가 세상을 지켜보는 증거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대륙이 평평한 것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쉽게 만든 게 아닐까.

아무튼 성좌는 그런 존재다. 인간의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존재.
나처럼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을 자신의 아랫것으로 본다.
그게 귀족이 평민을 대하는 태도일 수도 있고 자신과 다른 종족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고.


오만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고 자란 경험과 살아온 세상과 심지어 종족까지 다르니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솔개가 비둘기를 잡아먹는 것을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고
코끼리가 풀을 먹는 것을 나태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성좌의 시선은 평범한 인간들의 시선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걸 제사로 바치길 원하시는 거 맞죠?”

“예, 그렇습니다. 저희 성좌님이 원하시니까요.”

이하린이 사용하는 강의실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제사 마법을 구경하고 있으니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와 제사를 부탁했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 댄디한 중년 남성이 내민 것은 손바닥만  자그마한 화분들.
값비싸고 귀한 물건도 아니고 희귀하고 중요한 물건도 아니었다.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상추와 고추를 비롯한 식용 채소들.


전업주부가 심심풀이로 집에서 키울 법한 채소들을 들고  것이다.
제사를 위한 재료와 알선비,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받는 비용 등을 생각해보면
배보다 배꼽이 큰 수준이 아니라 몸보다 배꼽이  수준.


“일단, 알겠습니다...”


마법학 교수의 연줄로 이것저것 챙기면서 제사를 올리는 이하린도 꺼림칙한 얼굴로 제사를 준비한다.
동네 마트에서 오만  이하로 구매할 수 있는 꼬마 채소들을
수백만 원씩 받으며 성좌에게 보내는 상황이니 조금 애매하게 느껴지나 보다.


하지만 화신과 성좌가 자기들이 좋다고 돈을 들이미는데 어쩌겠는가.
마법진과 제단 위에 정갈하게 올라간 미니 상추 화분들 앞에서 이하린이 정중하게 주문을 읊는다.
밀폐된 내부 공간에서 바람이 몰아치고 마법진에서 빛이 나더니 성공적으로 사라지는 화분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찡- 하는 이명과 활기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정말 고, 마워!


노래하듯이 특이하게 귓가에 울리는 청량한 목소리.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자 바닥에 납작 엎드린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보이지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늙은 마법학 교관도 의뢰인인 중년 남성도 이하린도 정중하게 제단을 향해 절을 올리는 상황.


‘이게 뭔 상황이래?’

이쪽 세상의 상식이라는 것처럼 절을 올리고 일어나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보니
이해할 수 없어서 조금 무서워졌다. 무슨 상황인지 이하린에게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 선, 물을 줄, 게~


그와 동시에 바닥의 카펫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조금은 징그러워 보이는 모습에 나도 마법학 교수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이하린과 의뢰인은 뭐라도 아는지 후다닥 카펫을 잡아 치운다.


드러나는 것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나무 바닥.
분명 돌로 마감된 강의실 바닥이건만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린다.
울룩불룩 돌바닥이 흔들리고, 쩍 갈라지더니 등장하는 것은 사람 손바닥만  연둣빛 새싹.


[성좌, 시들지 않는 거목이 은총을 내립니다]

돌바닥에 뿌리내린 새싹이 쭉쭉 자라나 넝쿨을 만들고, 멍하니 있는 세 사람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 팔찌로 변한다.
고작해야 감각 일부만 공유하는 아바타 하나 덜렁 내려보내는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간섭 능력.

- 우리 애, 들 잘 부, 탁해?

그나저나 시들지 않는 거목이라, 어디서 들었던  같은데.







아바타의 운용 시간이 다 된 나는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다시 원룸에서 깨어났다.
궁금한 게 많지만 그건 밤에 들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악, 씨발 뭐야!”

근육질의 몸을 믿고 허리에 힘을 줘 벌떡 일어났더니 시야가 번쩍! 하고 빛나고 이마가 얼얼하게 고통스럽다.
아무것도 없다고 볼 수 있는 황량한 원룸 내부에서 일어난 생소한 상황.
너무 당황스러워 낙법까지 펼치며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 뭔데, 이건.”

눈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나무의 가지.

침대의 옆 벽에서 자연스럽게 뻗어 나온 커다란 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머리로 들이박아서 그런지 잎사귀도 몇 개 떨어진 상황.


짙은 고동색의 가지와 보석 같은 잎사귀를 보고 있으니 분재같이 식물 키우는데 수백 수천만 원씩 쓰는 부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축복인 걸까,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뭇가지를 품평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니 원룸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유료 스킨이라도 씌운 것처럼.

비유가 참 저렴하지만 내 머리로는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비유는 할 수 없었다.


먼저 바닥, 낡은 마루 장판이 고풍스러운 나무 바닥으로 변해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가공 나무 장판이 아니라 밟으니 시원한 감각이 올라오는 녀석으로.
작은 식탁도 고풍스러운 원목 식탁이 되어 있었고
TV와 컴퓨터 모니터 밑에 있던 책상도 까만 나무 책상으로 변해 있었다.

까만 나무는 흑단 나무밖에 모르는데.

그리고 원룸의 크기와 냉장고의 크기도 명백히 커져 있었다.
허리춤에나 올 법한 소형 냉장고가 지금은 원룸 천장에 닿을 정도니까.
냉장고가 이렇게 커졌는데 벽에는 여분의 공간이 남아 있는 걸 봐서는 원룸도 어느 정도 확장된 것 같고.


침대도 벽지도 천장도 조명도 전부 싱그러운 녹색과 여름을 떠오르게 하는 디자인으로 전부 변한 상황에서
나는 급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포칼립스의 습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지 식량 걱정이 되었으니까.


캔으로 된 탄산과 냉동 음식들이 들어있는 칸 위에, 새로 생긴 칸.
 안에는 다양한 과일들과 샐러드, 야채 주스 따위가 있었다.
정말 컨셉 하나는 확실하네.

탄산이 아닌 음료수는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딸기 생과일주스 하나를 꺼내 마신다.

‘이러면 오히려 좋은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샐러드만 먹는 고풍스러운 취미는 없지만
냉동식품 중 돈까스 같은 느끼한 녀석을 먹을 때 같이 먹을 신선한 채소가 생겼다는 것은 기쁘다.
냉동 도시락에 들어있는 야채는 품질이 영 좋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딸기 주스를 마시고 있자, 얼얼한 이마 위에 무언가 톡 떨어진다.


[안녕하세요, 꿈속의 거주자씨?]


동글동글한 필체로 쓰여 있는 편지.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침대 위에 있던 나뭇가지가 자연스럽게 이동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원룸 안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급하게 1pt를 주고 산 수첩과 볼펜으로 쪽지를 끼워 넣어 보았다.


[안녕하세요, 시들지 않는 거목님인가요?]


일단은 정중하게.

원룸 크기 업그레이드에, 식자재 증가, 흑단 나무 가구들도 꽤 비싼 녀석들인데 포인트로 얼마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받은 만큼 정중하게 적은 쪽지를 들고 나뭇가지에 들이대고 있으니 모습이 퍽 우스꽝스럽다.

물론, 나뭇가지가 움직여 풍성한 나뭇잎 사이로 쪽지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지만.

이렇게 쪽지를 쓰고 있으니 전산망이 다 끊겨 금 간 쉘터 벽 틈바구니에 메모지를 끼워 넣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째 잊을 만하면 자꾸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데.

밤이 될 때까지 나는 화면을 보는 것도 잊고 쪽지로 대화를 나눴다.
예전 세상과 비슷한 저 평평한 대륙보다 판타지 세상의 거주자인  엘프 소녀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으니까.

시들지 않는 거목은 꽤 오래된 성좌였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와 수인이 인류 연합의 이름으로 살아가던 판타지 세상의 거주자.
판타지다운 마왕이 침공하고 용사가 무찔렀지만 마왕이 남긴 극독으로 세상이 오염되어서
세계수 속에 숨어 있던 어린아이들을 빼고 전부 죽었다는 이야기.


인간과 수인의 아이들도 몇 있었지만
종족적인 수명의 차이로 엘프 소녀가 자연스럽게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 이쪽 세상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꽤 수다스러운 성격에, 손편지로 누군가와 교류하는  익숙한지 다양한 수다가 적혀서  쪽으로 넘어온다.


[나는 산림 감시인이나 농사꾼, 수의사 같은 사람들과 계약해 가호를 내려]
[포인트로 구매한 음식은 자연스러운 맛이 없어]
[인조 마나의 향기가 너무 역해서 포인트 음식은 먹기 힘들어]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 상대를 해 주는 거는 네가 처음이야]
[다른 성좌들은 자기 방에 세계수의 가지가 뻗어오는  싫어해]

성좌와 성좌가 화신 없이 직접 교류할 방법은 지상에 강림해서 만나는 것뿐.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직접 만나보는 게 불가능한가 보다.
그 때문에 세계수의 가지라는 녀석을 뻗어 교류를 시도하나 본데.


하기야, 나처럼 성좌가 된 지 얼마 안 된 소시민이야 원룸 1회 업그레이드에 고마워하는 거지
불사르는 폭군처럼 귀족으로 살아온 녀석들이 자기 저택에 남의 간섭을 받고 싶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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