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화 : 인간관계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읽어보면 나는 성좌들 중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한다.
멸망한 나라의 왕족
전쟁에 미쳐버린 폭군
아포칼립스로 인해 PTSD가 생긴 생존자
검의 길을 걷는 무도가 등 다양한 성좌들은 화신들과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
계급 제도가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자신을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단련을 위해 화신과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등 다양한 반응이 있으니까.
나처럼 현대적 마인드에 적당한 태도를 취하는 성좌는 생각보다 거의 없었다.
태도도 중요하지만, 화신을 둘 밖에 데리고 있지 않다는 점도 특이하겠지.
대부분의 성좌들은 포인트가 모이면 일단 계약서를 구매해 싹수 있는 인재를 데려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재능은 넘치는 영혼들이니 포인트로 후원을 별로 안 해도 알아서 전쟁터에서 성장하게 될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내륙 근무직 화신 두 명만 꼴랑 데리고 주기적으로 지상에 강림하는 나는
동물원 희귀 동물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미남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도 관심이지만, 성좌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고 봐야 하나.
나 말고도 꿈과 관련된 성좌가 몇 명 더 있기는 하지만그들은 나와 달리 뼛속부터 몽마인지라
무수히 많은 화신과 계약해 꿈으로 단체 소통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교류도 없다고 한다.
이러니까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인터넷과 입소문을 통해 내 존재가 알려질수록, 내 아바타의 지속 시간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수련하는 것 말고 성좌의 격이 높아지는 것도 능력에 영향을 주는 걸까.
마음 편하게 게임 스탯창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그런 것 없이 감으로 때려 맞춰야 하니 조금 어렵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 정도면 젖먹이 딱지는 뗀 걸까?
“좋은 하루 되십쇼, 성좌님!”
“안녕하십니까!”
꾸벅, 꾸벅 하고 아는 얼굴들이 휙휙 아래로 숙이며 지나친다.
옆 팀 팀장부터 한예지 직속 상관까지 직책 상관 없이 나를 아는 사람들인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오늘은 로비에 소환되어서 사무실로 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움직이는 중이라 그런지 마주치는 사람이 참 많네.
통성명 하지 않은 한예지의 팀과 식사를 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와 점심 시간의 대로변을 걷는다.
식당이 모인 번화가답게 사람이 참 많긴 하네.
한예지네 길드 사무실 말고 다른 회사 사무실도 잔뜩 있는지
젊은 사람들 대신 양복을 입은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국밥을 조지고 있었다.
나이 좀 있어보이는 부장아줌마가 돼지국밥집으로 사람을 이끌고 가자 세련된 정장 남성이 뒤에서 질색하는 게 보인다.
그렇게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국밥이나 백반 비슷한 한상 차림집 거리에서 벗어나 파스타니 수비드니 하는 서대륙 음식점이 더 많은 곳.
음식점이 바뀌니 주변에 양복을 입은 아줌마들 보다 사복을 입은 젊은 층의 손님들이 더 많다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조금 걷고 싶어서 회사 로비에서부터 걸어왔단다.”
“아닙니다, 식사 시간에는 여유가 있는걸요.”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고는 차마 말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넉넉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늦긴 늦었나보다.
아바타를 소환하면서 지갑이니 스마트폰까지 소환 할 수 없어 감으로 잡고 대충 걸었더니 조금 늦었던걸까.
빨리 능력이 늘어야 물건들도 같이 소환할텐데. 위조 지폐가 되어버리니 돈은 소환 못 해도 스마트폰은 조금 그립다.
“그래서, 어느 식당이니?”
물론, 남자가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정도는 여자들이 당연히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암묵적인 관습이 있어 별 상관 없지만.
그 남자가 꿈에서나 나올 법 한 미남이고, 인간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성좌라면 더욱 더.
그래서인지 반갑게 인사를 하는 세 사람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많이 늦지는 않았겠지?
나란히 서 있는 세 여자를 바라본다.
한예지는 키도 큰 편인데 운동도 해서 덩치가 조금 큰 편에 속한다.
명랑한 성격에 응석을 부리는 태도 때문인지 리트래버 같은 대형견이 떠오르는 미녀.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선배와 후배가 못난 것은 아니다.
키도 덩치도 작지만 선배인 정아린도 눈이 삐쭉 올라간 전형적인 고양이상 미녀고,
한예지보다 커다란데다 근육도 잘 빠져 있는 후배 남궁희도 냉철한 인상의 미녀다.
재능이라는 놈에 외모도 포함 되는 건지 세 사람이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에 만족감이 차오른다.
물론, 약간의 다른 점은 있다.
“역시, 하나 더 시킬 걸 그랬나?”
“부족하면 내 걸 조금 먹겠니?”
한예지는 내 앞이라고 긴장하지 않고 자기 먹을 만큼 사이드 메뉴까지 추가해서 주문했고,
한예지보다 덩치가 큰 남궁희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지 닭가슴살에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체구에 비해 식사량이 많은지 정아린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파스타 그릇을 비우고 포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나 때문에 파스타 가게로 왔나?’
가게는 전형적인 서양식 레스토랑. 이쪽 세상식으로 표현하자면 서대륙풍 음식점이다.
파스타나 샐러드처럼 익숙한 녀석도 있었고, 빵에 면에 치즈를 뒤섞은 처음 보는 음식도 있는 가게.
그런 가게에서 미녀 셋이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고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여긴 남녀 역전이잖아.
남자 회사원 셋이 점심 시간에 여자 손님을 위해 국밥 대신 크림 파스타를 조지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야 고기 국밥이나 한상 차림, 백반집에서 해장국을 먹어도 상관 없는데.
“언제 출동할 줄 모르는데 속은 든든하게 채워야지.”
170cm의 활발한 체육계 여성과, 175cm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헬스녀 사이에 껴 있는 왜소한 체구 때문일까.
아니면 성좌 겸 몽마로서 자애로운 인격자라는 롤플레잉에 취했던 걸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그릇에 내가 맛보던 파스타를 나눠 담아주었다.
뭐, 애초에 아바타니까.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더라도 배가 부르거나 고프지는 않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니까 고통을 느끼는 기능 같은 건 다 꺼두고, 편리하게 보내는 것이 내 아바타니까.
본체는 지금 침대에 편히 누워서 졸고 있는 상황이니 식사가 아니라 맛보기.
맛보기라면 파스타 반 그릇만 먹어도 충분하다.
“아, 저기...”
“네, 감사합니다.”
그 직후, 식탁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어진다.
애매한 얼굴로 파스타를 바라보는 한예지와
새빨개진 얼굴로 샐러드의 남은 야채 쪼가리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는 남궁희.
그리고 사회인 선배 답게 분위기를 읽고 넙죽 파스타를 받아가는 정아린.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파스타 반 그릇을 후다닥 먹어치우는 선배의 모습 때문인지,
술렁이던 두 사람도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얼굴 구경만 해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그래도 뭐, 응어리는 남았겠지.
덩치와 겉모습과는 다르게 순진한 건지
간접 키스 정도로 얼굴의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 후배,남궁희는 내버려 두더라도...
한예지는 명백히 원하는 게 생긴 얼굴이었다.
※
역시나, 생각 없이 행했던 것이 한예지는 부러웠던 걸까.
“많이 먹으렴.”
“...네, 성좌님.”
평소에는 자기 집 거실이나 안방 정도를 배경으로 삼는 한예지의 꿈이 오늘 점심의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이 정도로 부러웠나 싶어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니 창피한 걸 아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무의식도 아니고 자각몽인데다, 꿈을 다루는 연습을 한 지 1년을 훌쩍 넘어갔는데
레스토랑이 꿈 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니.
먹여 준 것도 아니고 먹던 걸 덜어 줬는데 그 것만으로도 이렇게 부러워 하는 건가?
현실과 달리 칸막이로 가려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을 먹는다.
파스타와 샐러드, 스프와 스테이크 같이 내가 아는 음식들도, 내가 모르는 음식들도 한가득 차려진 식탁에서 원하는 것만 골라가면서.
물론 그냥 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통호밀빵 비슷하게 생긴 빵 덩어리를 얇게 썰어, 스튜인지 스프인지 모를 것을 듬뿍 찍어 내밀었다.
“자, 입 벌리렴. 아~”
입 앞에 다가온 빵조각을 보고 빨간 얼굴이 검을 정도로 달아오른다.
평소에 껴안기고 쓰다듬어지며 응석을 부리는 것은 자기가 들러 붙는 거지만
이렇게 내가 해 주는 것에는 내성이 없는 걸까.
아니면 뭐, 마음을 들킨 것처럼 창피할 수 있고.
서대륙풍 식당이라 그런지, 길쭉길쭉한 빵들이 많아 먹여주기는 좋았다.
고기 구운거나 튀김 요리 같은 것 대신 이렇게 손으로 먹여줄 수 있으니 놀리기도 좋고 먹여주기도 좋지 않은가.
얼굴이 빨갛다 못해 까매진 한예지가 어차피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음식을 날름날름 받아 먹는다.
길쭉한 빵으로 시작해서 네모 납작한 비스킷 같은 걸 지나가 샐러드에 들어 있는 방울토마토 까지.
방울토마토 치고는 조금 각이 져 있고 색도 노란색이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여기, 휴지...”
손가락으로 과일을 먹여주며 입술을 툭툭 건드린다.
자연스럽게 손 끝에 음식 소스가 묻고, 안절부절 못하던 한예지가 내게 티슈를 내민다.
물론,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새하얀 크림 소스.
“음, 생각보다 고소하구나.”
손가락을 혀로 날름 핥자 우유의 고소한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우유가 아니라 두유인가?
뭔가 곁들어진 크림 소스를 음미하며 무슨 재료일지 상상하고 있으니 슬그머니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어느새, 꿈 속 테이블 위를 텅 비워버린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