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5화 : 사무실 (45/169)



〈 45화 〉45화 : 사무실

화면 너머로 보는 동대륙을 표현하자면, 오리엔탈 대륙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동아시아 전반을 적당히 섞고 거기에 오리엔탈 판타지 뽕에 취한 서양의 시선을 MSG로 쳐둔 세상처럼 생겼으니까.

화면 너머로는  느껴지지 않는 남녀 역전 세상은 제쳐두고
빌딩과 콘크리트의 도시 속에서도 그러한 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호롱불 모양 간판을  전통 음식점은 한옥식 기와에 일본식 저택의 복도가 뒤섞인 모양이고
박물관 같은 곳에서 개최하는 문화적 축제에는 중국식 사자탈과 쥐불놀이가 어우러져 춤을 추는 방식으로.
딱 서양 사람이 국가 구분 없이 동양 문화를 묘사한 것처럼 전부 뒤섞여 있는 것이다.

화면 너머로 본 세상은 그랬다.

하지만 직접 내려가 보면 오리엔탈 대륙보다는 남녀 역전 세상이 더 깊게 와닿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바뀐, 모계 중심 사회일 뿐 의상과 화장이 바뀐 것은 아닌 세상.

남자가 치마를 입지 않았고 여자가 턱수염이 나는 건 아니라서 화면 너머로 보면 그저 평범한 지구와 별다를  없었다.


하지만 직접 아바타를 사용해 내려가면 이야기가 조금 바뀐다.


몽마가 된 탓일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여성들의 진득한 시선이다.
이전 세상의, 저 남자가 내게 위협적일까 아닐까를 논하는 아포칼립스 생존자들의 시선이 아니다.
고간부와 가슴팍으로 몰리는 성적인 시선들.


마치 어두컴컴한 터널 너머에 크리쳐가 있냐 없느냐를 느끼는 것처럼
길거리 여성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몽마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쪽 세상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냥 보나보다~ 하고 넘길 수 있었으니까.

인상이 음흉한 직장인 아줌마부터, 단발 더벅머리에 꾸밀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수수한 여학생까지
일단  좋은 남자에게 눈이  수밖에 없나 보다.
이전 세상의 남자들이 길가에 짧은 옷차림의 미녀가 지나가면 슬쩍 흘겨보듯이.


길거리를 적당히 돌아다니다 한예지의 길드 건물로 향한다.
아바타 운용 시간이 늘어나며 나는 이쪽 세상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 듯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사무실에 뿅 하고 등장하는 것보다는, 커피를 들고 1층에서부터 방문객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기 위해서.


아포칼립스에서 고생한  영혼까지 박혀 있는지
카드 방문증을 찍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자체가 즐겁기 그지없었다.
멸망하지 않은 멀쩡한 문명 속에서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혜택을 이용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커피는 포인트로 구매했지만.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1포인트짜리 커피를 맛본 게 문제였다.
포인트로 만들어진 커피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시장에서 파는 커피보다 맛이 있었다.
고작 아메리카노 주제에 중독성까지 있을 정도로.

제사 때문에 어느 순간 미술계 큰 손이 되어가고 있는 이하린 덕분에
하루  잔 커피를 마시는, 한  30pt짜리 고정 비용 따위는 부담도 되지 않았다.

이제 들어오는 포인트는 천 단위를 가볍게 넘어 만 단위에서 놀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1포인트를 1원이라 쳐도  달 용돈이 50만 원인데 30원짜리 불량 식품을 사 먹는 게 부담스러울 리 없다.

‘성좌의 인지도가 포인트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될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성좌가 얻는 포인트는 화신의 활약과 성좌의 인지도에 비례하기 때문에
커피를  들고 가는 것이 오히려 포인트를 불리는 길이기도 했다.
사무실에 가서 커피를 나눠주고 30분 정도 수다만 떨어도 몇 배는 되는 포인트가 들어오니까.


100포인트 남짓의 커피를 나눠주고 500포인트 정도의 인지도가 생기는 거라
유의미한 수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간식값은  것이다.

나 혼자 먹는 간식값 말고, 한예지의 사무실과 이하린의 담당 교관들에게 커피를 사  정도.

물론 중요한 것은 포인트가 아니다.


엘리베이터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진청색 청바지에 네이비색 반소매 셔츠. 단출하고 편안한 차림이었다.
물론  기준이고, 여기서 단추  개를 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전에 본 인터넷 글에 쓰여 있었으니까.

[성좌님한테 커피 받은 썰 푼다] +12
[성좌님들 이름 너무 난해하지 않냐] +7
[아 ㅋㅋ 직장에 성좌님 매주 강림하심] +89

성좌와 화신 갤러리, 통칭 성화갤.


성좌와 화신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익명의 사이트라 사람이 참 많다.
성좌 팬카페, 화신 팬카페 다 있지만 일단 성좌와 화신 이야기를 익명으로 떠벌릴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니까.
익명의 사이트라 그런지 다른 사이트보다 수위 높은 이야기도 많은 편이고.

전생에도 이런 사이트가 있던  떠올려보면, 사람 사는 곳이 참 똑같다고 봐야겠지.


그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이 시간 순서별로 쫘라락 강조되어 있는데
나란히 있는  개의 글이 전부 내 이야기였다.

물론 내가 찾아본 건 아니고 이하린이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사이트를 체크할  내가 옆에서 봤다.


성좌의 이름이 난해하지 않냐는 글은  성좌명 때문이다.
무기력한 악몽이라길래 축 늘어져서 방구석에 처박힌 히키코모리 같은 음침한 남자를 떠올렸는데
왜 근육 빵빵한 건강 미남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의문.


커피 받은 썰은  아바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누가 찍었다.
갑자기 뿅! 하고 등장하는  아니라, 무슨 안개 같은 게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사람 모습으로 변하던데.
몸이 다 만들어지고 나서야 눈을 뜨는 나로서는  아바타가 만들어지는 광경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성좌와 화신의 권능에 익숙한 이쪽 세상 사람들은 별 반응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댓글이 가장 많은 게 [아 ㅋㅋ 직장에 성좌님 매주 강림하심]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작정하고 싸움을 붙였으니까.


‘느이 성좌님 얼굴은 봤니?’


기나긴 장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딱 저 한 문장이 된다.
한예지의 사무실 동료 중에는 숙련된 인터넷 어그로꾼이라도 있는지 사람을 도발하는 재능을 가진 것 같았다.
화신  자신의 성좌를 흠모하는, 남녀 관계로서 흠모하는 성좌 오타쿠들을 싸그리 긁어버렸으니까.
화신이 아니더라도 성좌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같이 긁혔고.

우리 성좌는 멋지게 차려입고 매주 커피도 사 주면서 대화도 나눠주시는데, 너네는?

인터넷 어그로 중 가장 화끈하게 사람을 긁어버리는 것은 비교 아닐까.
지금 이 글에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댓글을 보고 느꼈다.
수백 개가 넘는 댓글이 올라왔다가, 선을 넘어서 삭제되고 다시 작성되고-
그렇게 작성되고 삭제되고를 반복하면서 남은 것만 해도 수십 개다.


성좌라는  얼마나 영향력 있길래 자신이 계약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사무실에 성좌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자랑거리가 되는지.
악의 어린 댓글 중에는 모니터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선명한 질투가 담긴 게 있어서 놀라울 지경이다.


슬그머니 댓글을 확인하고 있으니,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어, 성좌님, 오셨습니까! 커피 주시죠.”


얼굴을 슬슬 외울법한 여자 하나가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온다.
그와 동시에 활기차다 못해 우렁찬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다다 모인다.
 있는 사무실 멤버들과 극소수의 손님들의 시선까지.


반소매 셔츠를 입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이 좀 더 집요해진 기분이 든다.
남자와 여자가 뒤바뀌었다 해서 남성성, 여성성이 바뀐  아니니까.
결국,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위는 비슷하다는 걸까.

두꺼운 손, 손등에 돋은 핏줄, 근육이 잘 붙은 팔뚝, 풀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의 가슴과 쇄골, 두꺼운 목 같은 부위들.
그런 곳에서 매력을 느끼고 나서 보이는 반응이 다른 거지 반응을 보이는 부위가 이상하게 바뀐 건 아니다.

‘남자 가슴이나 팔뚝에 보비고 싶어 하는  보면 바뀐 건가...?’

물론 얼굴을 마주한 상태 말고, 인터넷의 익명을 믿고 날뛰는 이상성욕 변태들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인터넷의 이상성욕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전 세상에서도 조랑말에 흥분하거나 포켓몬에 흥분하는 놈들이 한두 명이었는가.
심지어 약에 취하면 인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여성형 크리처에게 발정이 나는 놈들도 있었는데.

“성좌님, 오셨어요!”


“그래, 오늘은 무슨  있었니?”

한예지가 사무실 저편에서 마중 나오고 그녀의 선배와 후배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준다.
남성  성좌에 대한 배려가 사무실 전체에 가득하다.


물론 거리만 슬그머니 벌릴 뿐, 커피를 홀짝이며  쪽을 흘깃거리는 것은 모른 척하고 있을 뿐.
늙고 추레한 노파에게 성희롱당하는 것도 아니고, 젊은 여자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화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방향성은 조금 다르지만 탐색하는 시선은 아포칼립스에서 무리를 지을 시절에도 많이 받았다.


이 남자에게 내가 몸을 허락하면 나를 지켜줄까- 같은 시선.
방향은 달라도 결국 재보는 시선인  같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인터뷰가 몇 개 들어왔어요. 다른 건... 큰 사건은 없네요. 가끔 술에 취한 화신들을 제압하는 정도?”

“그러니? 그래도 늘 조심하렴. 언제 이상한 사람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에  또한 마주 웃어 보인다.
어색하게 책상 위에 올라간 손 위에  손을 살짝 겹치며.
손에 붙잡힌 그녀의 손이 살짝 움찔거린다.
꿈속에서 나눠도  사소한 대화를 여기까지 와서 나누는 이유는 간단했다.


꿈속에서는 바쁘니까.
당연히 그렇고 그런 의미로.

사무실에서는 활기차게 웃고 있지만 오늘 밤 꿈에 들어온다면 또 칭얼거리며 달라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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