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 : 봉사
반 쯤 발기한 남성의 물건과, 그 위에 올라타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성.
두 사람 다 간편한 옷차림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느라 흐트러져 뽀얀 속살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성욕 대신 죄책감을 가지는 것에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느 성좌들은 화신을 아랫것이나 소모품, 포인트 벌어오는 편리한 존재 취급을 한다지만 나는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교류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무인도에 표류해서 배구공을 친구 삼는 사람도 있는데 진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품 안에 안겨있는 부드러운 여인의 몸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살을 섞은 여인이 나를 부담스러워해서 멀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조금 더 친밀한 관계를 원했으니까. 성좌니 화신이니 계약이니 해도, 결국 꿈속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만나니까.
나를 사랑해주고 내게 목메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좋지만
그게 심적 부담감으로 넘어가 나를 의무적으로 대하는 꼴은 보기 싫었다.
스스로도 원하는 거 참 많다고 생각하지만 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피부를 맞대고 있으면 음욕과 성욕이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지
의무적으로 내게 봉사한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늘 고민하는 이하린을 보면 나 또한 걱정되기 마련.
나와 섹스하는 걸 황송해하고 부담스러워 하다, 결국 봉사하듯 의무적으로 하게 되면 기분 나쁠 것 같았으니까.
이렇게 보면 한예지는 참 편했는데.
애정 결핍 때문인지, 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여 준다는 확신하고 달라 붙는 한예지에게는 사양 따위는 없었다.
이하린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 좀 친밀감을 느꼈으면 하는데.
이하린은 성좌를 숭배하는 부류였다.
기절하고 거품 무는 걸 보면 조금 반응이 과하지만, 성좌를 숭배하는 것 자체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성좌를 인류와 가까운 친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지만
반대로 인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으니까.
지금, 거사를 치르고 내 품에 안겨있는 이하린이 딱 그랬다.
섹스할 때에는 쾌감에 젖어 별생각이 없지만
몇 번의 절정 끝에 다다른 현자 타임 때에는 온갖 고민이 몰려오는 게 딱 달라붙은 피부로 느껴진다.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여운을 즐기는 것도 잠시
내 팔을 베고 있는 게 불편을 주는 건 아닐까, 젖은 피부가 불쾌한 건 아닐까,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내가 불쾌해 하지도 않았지만 온갖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몸의 미녀를 옆에 끼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낮은 확률로 존재한다면 추녀 취향이라던가, 게이라던가 고자거나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겠지.
땀에 젖은 매끈한 알궁둥이를 찹찹 소리가 나게 토닥이며 나른한 후희를 즐기고 있으니
조금씩 세상이 부서진다. 일단, 오늘의 꿈은 여기서 끝이네.
“무리해서 마법 연구하지 말고, 돈 때문에 너무 많이 마법을 사용하다 지치는 일 없도록 하렴.”
마지막까지 쾌락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하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여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일단 자주 만나서 익숙해지면 죄책감을 마모시켜버릴 수 있지 않을까?
※
사람이 행복해서 괴로울 수 있을까.
모순적인 문구지만 가능할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에 넘치는 행복 때문에 내가 이런 걸 누려도 될까, 그런 고민 탓에 머리가 조금 아팠으니까.
남들이 듣는다면 배가 부른 년이라고 비웃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성좌, 무기력한 악몽.
두 번째 화신으로 나를 선택해주신 자비로운 성좌님.
본신의 힘이 강력한 것도, 포인트가 잔뜩 있어 막대한 지원을 해 주는 것도, 전 대륙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고작 화신 두 명 데리고 있는 미약한 성좌.
그런데도 성좌의 정보를 정리하는 커뮤니티에서는 꽤 화제가 되고 있었다.
나의 경험담, 그리고 가끔 올라오는 첫 번째 화신 주변에서의 목격담 때문에.
[성좌님한테 커피 받은 썰 푼다] +12
[성좌님들 이름 너무 난해하지 않냐] +7
[아 ㅋㅋ 직장에 성좌님 매주 강림하심] +89
180은 훌쩍 넘는 커다란 키, 바람결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새카만 흑발.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이목구비에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요망하게 휘는 작은 얼굴.
그에 대비해서 넓은 어깨와 떡 벌어진 가슴팍은 서대륙의 남자들 못지않은 몸매 아닌가.
보정 들어간 CF 스타들의 화보 같은 남자가 눈앞에서 걸어 다니는데 눈길을 주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 여성의 섹스 판타지를 한가득 담은 것처럼 자비롭고 자상한, 부성애 넘치는 외모의 남자라면 더더욱.
“여기가 그 성좌 게시판이니?”
“네? 아, 네에-”
마법 연습 이후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귓가에 듣기 좋은 저음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교관님은 어느새 사라지고 성좌님이 강림해 있었다.
5분, 10분 조금씩 늘어나는 성좌님의 아바타 운용 시간 덕분인지 인터넷에 점점 목격담이 늘어나는 상황.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화면을 올려다보시기에 화면을 잡은 손과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편히 볼 수 있도록 멈추었다.
내가 뻣뻣하게 굳은 것을 느끼셨는지 귓가에 흐음~ 하고 긴 한숨이 흘러들어온다.
따스한 숨결이 귀를 간지럽혔지만 나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성좌님과의 약속을 또 어겼으니까.
“정말,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니?”
“그으, 성좌님?”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인생 살면서 남자랑 한 스킨쉽은 학교 수련회나 군사 훈련받을 때 부축받은 정도밖에 없는데
어떻게 남자의 몸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변명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듣지 않으실 것 같고.
등 뒤에서 큼직한 손이 뻗어 오는 게 느껴진다.
핏줄이 예쁠 정도로 잘 솟아 있는 커다란 손.
두꺼운 손가락 마디마디가 구부러지며 아카데미 교복 치마를 쥔다.
“곧 교관님이 돌아오실-”
“걱정 말렴, 문 앞에 강림해서 30분 정도 뒤에 오라고 부탁했으니까.”
대체 어느새 그런 대화가 오갔단 말인가.
웹 서핑에 집중해서 눈치도 채지 못한 걸까?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훅하고 치마가 내려간다.
멋부림 하나 없는 밋밋한 보급 속옷이 드러나고 그것이 기대감에 살짝이나마 젖어 들어갔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느껴진다.
“또,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겠니.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받아 주겠지.”
치마 단추를 툭 풀어버린 그 두꺼운 손이 슬그머니 허벅지를 쓸며 다가온다.
고장이 난 것처럼 심장이 뛰고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싸움을 벌인다.
아카데미의 한복판에서 배덕적인 쾌락을 느끼고 싶다는 감상과
감히 성좌님을 이용해 비정상적인 성욕을 해결하려 한다는 죄책감.
우습게도 나의 성좌님께서는 내게 그 죄책감을 버리길 원하시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되겠는가.
“자아, 그래도 목소리는 죽이자꾸나. 방에 들어올 사람은 없지만, 복도에 누가 돌아다닐지도 모르니까.”
무기력한 악몽, 나의 성좌님은 참으로 악몽다우셨다.
저항할 수 없도록 등 뒤에 밀착한 커다란 남자의 몸.
허리를 껴안듯 낮게 뻗은 손이 허벅지와 보급 속옷을 살살 문지른다.
성좌의 품에 안겨 대딸을 받는
19금 야설에 적으면 모독적이라고 신고받을 것 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아- 진짜 신성 모독인데...
“으, 성좌님?”
눈을 질끈 감고 저절로 거칠어지는 숨을 가라앉히고 있으니
두꺼운 손가락이 슥슥 속옷 위로 젖어들어가는 나를 자극하다 말고 사라진다.
오늘은 별일 없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자, 잠시만요!”
“목소리를, 줄이라고, 하지 않았니?”
감았던 눈을 뜨니 성좌님께서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계셨다.
“으, 하으읏!”
허벅지로 느껴지는 뜨거운 뺨과 속옷 위로 쏟아지는 그보다 더 뜨거운 숨결.
이것은 쾌락을 안겨주는 악몽이다.
배덕적이고 모욕적인, 성좌에 대한 내 신앙심을 모독하는 악몽.
하지만 감히 반항하거나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의 성좌께서 바라시니까.
“으음, 언제쯤 네가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 공공장소에서 한 발 빼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은데요...”
“싫다면 내게 좀 더 익숙해져 보렴.”
무릎이 바들바들 떨린다.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 담긴 뜨거운 숨결이 속옷 너머로 내 살 틈을 자극하고 있으니까.
속옷이 눈에 띄게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등허리를 타고 짜릿한 쾌락이 머리를 뒤흔드는 것이 느껴진다.
떨리는 무릎을 붙잡힌 상태로 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강제로 쾌락에 빠져 허우적댄다.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흐윽, 아흐윽-”
“그러면, 나머지는 오늘 저녁에 하면 되겠구나.”
푹 젖은 속옷이 돌돌 말려 내려가 허벅지에 걸린다.
후끈하게 데워진 성기가 찬 공기에 노출되어 잠시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내 허벅지 사이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성좌님의 얼굴이 보인다.
열기로 달뜬, 이글거리는 눈과 짙은 눈썹이 나른하게 휘어지며 예술작품 같은 호선을 그린다.
이토록 멋진 남성이 야외에서 입으로 봉사 해 주는 것에 익숙해지라니
남자와 대화도 제대로 나눈 적 없는 나 같은 모태 솔로에게 너무 커다란 시련을 내리시는 게 아닐까.
“오늘은 조금 일찍 자는 게 어떻겠니?”
“아, 알겠습니다.”
허망한 쾌락만 남기고 사라지는 성좌님.
오늘로 벌써 일주일 째 매일 같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팬티를 처리하며 나는 문득 불경한 생각을 했다.
'뒤처리 할 때마다 성녀 타임 장난 아닌데... 이런 자괴감을 느끼면서 정말 익숙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