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 : 성장 3
눈부신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성장한다.
마치 한계라는 단어를 모른다는 것처럼 성장에도 가속도가 붙어서.
재능 없는 사람들이 바라본다면 좌절하고 질투하여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
모두가 재능이 있다 해도, 그 재능의 격차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재능이 있다는 것과 근성과 인성의 문제는 다른 것이니 타락한 화신과 성좌가 적게나마 존재하는 것이겠지.
‘세상 참...’
이 평평한 인공 대륙의 창조주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온갖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영혼을 모아왔는지 호기심이 생길 정도.
주식처럼 매도 매매를 하는 걸까, 콜렉터처럼 경매를 하는 걸까,
그 것도 아니면 도둑처럼 눈부신 영혼을 하나둘 훔쳐 오는 걸까.
한예지에게 말해둔 다음, 그녀가 출근하고 남동생은 등교한 사이 한예지의 집에 강림한다.
목표는 당연히 컴퓨터. 슬슬 익숙해지는 웹사이트의 UI를 능숙하게 클릭해 인터넷 웹 서핑을 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군사작전, 동대륙의 치안 이대로 괜찮은가?]
이전 한예지가 공기총으로 멋지게 저격을 성공한 뉴스 기사.
그곳에는 나도 한예지도 모르던 사정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반사회적 성향을 띈 이유는 우습게도 ‘원하던 성좌에게 선택받지 못한 화신들’의 모임이었기 때문.
특정 성좌의 화신들을 노려 범죄를 저지르려는 놈들이나, 화신에 대한 집단 범죄 모의만으로
도심 한복판에서 대테러팀의 군사작전을 진행하는 이쪽 세상 정부나 둘 다 놀랍기 마련이다.
그렇게 뉴스 기사를 대충 넘기고 그대로 원하는 영화 몇 개를 세팅한다.
재능, 재주와 능력.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능이라는 단어는 어느 한 분야에 한정된 단어가 아니다.
저격에 재능이 있고, 마법에 재능이 있고, 검술과 무술과 박투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영상 편집의 재능이 있고, 요리에 재능이 있고, 음악과 예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존나 재밌어...’
그리고 그게, 내가 이쪽 세상의 문화생활에 빠져드는 이유였다.
성좌들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은근히 퍼져 있었다.
예술이나 문화를 담당하는 성좌들이 창작을 위해 정보를 모아 자신의 화신들에게 뿌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쪽 세상에도 서브 컬쳐 여남역전 장르나 TS로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장르가 존재하는 걸 보고 얼마나 웃었던가.
그런 마이너한 장르도 필력 좋은 작가나 그림 잘 그리는 만화가가 그려내는데 메이저한 장르는 말해봐야 입 아프다.
오래되어서 할인 이벤트조차 끝나고 TV에서 무료 다시 보기 지원이 되는 철 지난 싸구려 영화도
이전 세계에 들고 가면 관람객 평점 8점은 가볍게 넘길 수작들로 가득 차 있는 상황.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어 전장으로 향하는 갈색 머리 글래머 여자와
눈물 섞인 시선으로 배웅하는 금발 보디빌더의 모습은 조금 어색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재미있었다.
볼 게 없어서 고민인 게 아니라, 볼 게 너무 많아서 순서대로 보려 해도 시간이 부족할 수준이 될 정도.
이하린의 꿈속에서 식사하고, 한예지의 현실에서 여가 생활을 즐긴다.
놀고먹으며 문화생활만 즐겨도 꿈 드나들기와 악몽 다루기를 하루 24시간 수련하게 되는 일거양득의 상황.
포인트도 여유가 좀 생겨 아이스 커피 같은 주전부리를 챙겨주는 둥 조금이나마 풍족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걱정되는 문제가 있다면 딱 하나.
“이것도 아닌가 보네... 이제부터는 조금 많이 마이너한 분야가 될 거에요. 그 때문에 초반에 힘들지만, 나중 가면 누구에게나 대접받는 전문가가 될 수 있죠.”
“후, 잘 부탁드립니다.”
벌써 한 달째 재능을 찾지 못한 이하린의 상황이다.
신경이 쓰여서 영화를 보다 이하린을 잠깐 보고, 다시 영화를 보는 둥 자꾸 화면을 움직이게 된다.
인생의 재능을 찾는 데 고작 한 달? 이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하린에게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기초 마법에 관한 키트 하나를 다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
특성 극단은 그 정도 시간 안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줄 수 있다.
그렇게 하루 평균 5개 정도의 과목을, 주말에도 쉬지 않고 1달 30일 내내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한 것이다.
보편적인 원소 마법부터 기업에서 눈에 불을 켜고 영입하는 마도 공학까지 약 150가지의 마법을 전부.
이제 남은 것은 부두술이나 제사 같은 마이너하고 애매모호한 마법들.
마이너한 재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지쳐가는 이하린의 멘탈이 문제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 해도 30일 내내 연속되는 실패는 참기 힘들겠지.
‘이걸 꼼수라고 봐야 하나?’
잠 잘 시간을 줄이면 건강을 해친다, 거기에 잠을 자야 나와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잠은 꼬박꼬박 자라.
그 말을 들은 이하린은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은 반드시 잠을 잔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11시에 침대에 누워 7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수면을 취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라면 문제가 없을 텐데...
‘요즘 밥을 잘 안 먹네...’
수면 시간을 줄일 수 없으니 그녀는 식사 시간을 줄이는 것을 택했다.
체력이 줄어들었는데 운동 시간마저 줄일 수는 없는지 아침 운동은 꼬박꼬박 다니지만
식사가 점점 부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백반 정식 같아 보이는 한 상 차림에서 반찬의 개수가 줄어들거나 간편한 국밥으로 식사를 때우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샌드위치나 주먹밥,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며 마법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실한 식사는 아니었다.
잠도 하루에 8시간 꼬박꼬박 자고, 운동도 아침마다 1시간 이상 달리는 데다
식사도 영양 성분 비율은 제대로 맞춰서 먹고 있으니까.
정신적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이는 걸 제외하고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몸이 멀쩡하다고는 해도 정신이 몰려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이니까.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제사,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행위, 또는 그런 의식.
내가 살던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제사는 같은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이쪽 세상의 제사는 종교적 의미로 매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법적 의미로 올리는 제사였다.
“이렇게 보니 생각하던 것보다 엄청 넓네.”
“그, 그러신가요? 마실 것이라도 챙겨 오겠습니다.”
늙은 마법학 교수가 그 인자한 얼굴에 당황을 한가득 안고 후다닥 달려나간다.
눈 앞에 성좌가 떡 하니 등장했으니 당황스러울 만하지.
“머리 아픈 곳은 없고, 몸은 좀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점심으로 준비한 에그마요 샌드위치와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나를 소환한 이하린이 당황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본다.
이쪽 세상의 제사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적당히 뒤섞인 원시적 형태의 마법 행사.
성좌에게 공물을 바쳐 연결되는 일종의 간이 계약 의식이다.
공물을 바치면 포인트가 되어 성좌가 받는다.
그 대가로 성좌는 화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얼핏 들으면 좋아 보이지만, 사실 큰 쓸모는 없었다.
나라를 말아먹는 폭군이 국가 대들보를 제사에 꼬라박는 수준이 아니라면 큰 포인트를 바치지 못하니까.
거기에 성좌와 화신이 서로 계약했다면 제사 없이도 의사소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극단적인 이하린의 재능은 많은 것을 뛰어넘었다.
“가볍게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예, 원래 간의 제사 의식으로 시작해서 제를 올리는 일은-”
마법에는 당연히 단계가 있는 것처럼, 제사에도 격이 있다.
가장 낮은 것은 단순한 감사 의식.
바라는 것 하나 없이 공물을 바치는 행위다.
바쳐진 공물은 값어치에 따라 포인트로 환전되어 성좌에게 정산된다.
그 다음이 기우제와 같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의식.
많은 포인트를 바치고 격식을 차린 제사를 하며 규모를 키우고 성좌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행위다.
성좌의 성격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고 한다.
마지막이 강림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
“그러면, 아프거나 기운이 쭉 빠지거나 하는 건 정말 없고?”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좌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 성좌가 직접 지상에 강림하는 것을 요청하는 행위다.
이 경우에는 이하린의 극단적인 재능과 염원, 미약한 내 본체의 능력이 맞물려서 일어난 기적 같기는 한데.
내가 능력을 써서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솜뭉치 가득한 봉제 인형이라는 기분이고,
이하린의 제사로 인해 내려오는 것은 플라스틱 바비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두루뭉술한 감각의 차이를 느끼며 이하린을 토닥였다.
인간이 아닌 몽마와 성좌의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내가 너무 멍청해서 그만.
“그래도, 이제 알았으니 몸부터 챙기렴. 요즘 식사가 부실하던데 점심 꼭 먹고.”
심지어 그녀가 점심으로 먹으려던 에그마요 샌드위치는 제사의 공물이 되어서 사라진 상태.
분신이 해제되려는 것처럼 뒷머리가 간질간질한 감촉이 느껴져
나는 이하린을 식당으로 보냈다.
생각해보면 커피라도 타오겠다며 교수가 뛰어갔는데 미안한 짓을 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뜨니 다시 원룸에 돌아와 있었다.
화면 속에서 이하린은 흥분한 상태로 정식 상차림을 급히 먹다 목이 메 물을 들이켜는 중이고
한예지의 남동생은 일찍 하교해서 내가 틀어둔 영화를 같이 보고 있었다.
내가 잠시 졸면서 꿈을 꿨나,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니 원룸의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
따끈따끈한 에그마요 샌드위치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메리카노가 보인다.
성좌를 강림시키는 화신이라...
그런데 나 같은 허접스레기를 강림시켜서 어디에 쓸 수 있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