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 성장 1
음산한 밤, 세 명의 사람이 발자국 소리마저 죽인 상태로 살그머니 골목길을 걷는다.
비가 온 직후라 그런지 울퉁불퉁한 골목길에는 많은 물웅덩이와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들이 있었지만
움직이는 세 사람은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골목을 누볐다.
조금 더 화면을 축소해 골목 전체를 내려다본다.
고작 세 사람이 아니라 수 십 명은 되는 사람들이 골목 그림자를 누비며 둥그렇게 한 빌라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숨소리조차 숨긴 사람들의 포위망이 조금씩 완성되는 도중 갑작스레 폭음과 고함이 들려온다.
“뭐야, 포위당했어!”
“진입, 진입해라!”
허름한 달동네에서 벌어진 때아닌 추격전.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는 여성들과 추격하는 사람들.
분위기도 좋은데 각종 초능력이 섬세하게 어우러지니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신발을 벗고 짐승의 발굽으로 벽을 박차고 도망치는 것을 공중에서 낚아채고
구석진 골목 그림자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식물 줄기가 다리를 옭아맨다.
“씨발,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분명 연막은 제대로 뿌려놨는데.”
“불평은 그만하고, 일단 튀자고. 근처에 있는 애들 전부 출동했는데.”
난리 통의 한가운데에서 멀끔한 양복을 입은 두 남녀가 여유롭게 대화를 한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까마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두 남녀와
그들을 지키겠다는 것처럼 몸으로 막아서는 다양한 사람들.
드디어 기다리던 장면이 나올 것 같았다.
여유롭게 날아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과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사람들.
하지만 제압반은 그다지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길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열심히 제압하고 있지 비행을 시작한 두 남녀에게 달려드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라도 했는지,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려는 그 순간-
“이건 또 뭐, 야으앙, 으...”
“이런, 씨, 바아알-”
소리도 없이 빠르게 날아드는 무언가가 두 사람을 저격한다.
달빛을 왜곡시키는 빛나는 방어막도,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손톱과 날개도 소용없었다.
샛노랗게 강화된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투사체.
한예지가 발사한 수면총이었다.
‘이야, 저게 닿네?’
포위망밖의 빌딩 옥상.
거리로 치면 적어도 1km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뚫고 도착하는 마취 다트라니.
화약도 아니고 압축된 공기 펌프로 발사되는 느릿한 마취총 주제에 총알보다 빠르게 날아다닌다.
화려함은 제쳐두고 극한의 실용성을 향해 진화하는 한예지의 특성 때문이었다.
[재능 개화 : 환幻] 은 두 번의 타격이 들어가는 특성.
방어막을 뚫고 남성을 잠재운 것도손톱으로 쳐 내고 잠들어버린 여성도 다 저 특성 때문이다.
그 뒤로 진화한 특성은 [재능 진화 : 쾌快]
이름 그대로 투사체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가속하는 특성이었다.
게임 속 원딜이 패시브로 공격속도가 늘어난다고 데미지가 늘어나지는 않는 것 처럼 물리력은 늘어나지 않지만.
압축 공기로 발사하는 마취총은 화약 무기보다 당연히 사거리가 짧다.
잘 해봐야 사거리 100m도 되지 않는 것이 평범한 마취총의 다트 아니겠는가.
특성 덕분에 더 멀리, 더 빠르게 총알처럼 날아가는 다트는 어지간한 화신도 막아내지 못한다.
“이야, 이제 한 사람 몫 하는데?”
“그래도 일 인분은 예전부터 했습니다. 주모자 두 명 잡았는데 고작 한 사람 몫으로 치시면 제가 슬프죠.”
“그런데 선배님들, 원래 저격수도 3인 1조로 돌아다닙니까?”
“편재상 얘가 저격수가 아니라서 그래.”
하지만 재능 개화부터 내가 준 권능까지 전부 사격에 몰아버린 한예지는 자신의 천직이 저격수라는 것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콘크리트 정글에서 빌딩풍을 타고 영화 속 과장된 장면처럼 휘어서 날아드는 총알보다 빠른 다트.
속도가 증가할 뿐이지 파괴력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공격 속도와 데미지를 분리한 게임처럼.
그 때문에 마취 다트에 맞았다고 살점이 찢기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없으니
소심한 한예지도 마음 놓고 다트를 빵빵 쏴 댄다.
맞아도 다치지 않고 잠든다는 걸 아니까 사람이 든 방패에 총 쏜게 무섭다고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한예지의 팀은 나름대로 꿀보직에 위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포위망을 유지하랴, 몸싸움하면서 과잉진압을 하지 않기 위해 끙끙대는 동안
저격하는 한예지의 곁에만 있으면 되니까.
그 때문에 한예지의 입지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껴주는 선임과 말 잘 듣는 후임.
거기에 선후배 두 사람 모두 유능한 편이니 아주 편안한 직장 생활 아닌가.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그녀의 사격 솜씨를 칭찬합니다!]
“에이, 성좌님이 주신 권능 덕분이죠.”
겸손하게 말하는 한예지였지만 나는 그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준 권능은 대부분 1만 포인트 이하의 기초 권능들.
나빠진 시력을 보정 해 주고, 손 떨림을 막아주거나 호흡을 가다듬게 해 주는 수준의 가벼운 것들이다.
1km 밖에서 비행을 시작한 초능력자를 가스총으로 명중시킨 것은 순전히 그녀의 사격 솜씨라는 뜻이었다.
화신 아카데미에서 마법학을 막 배우기 시작한 이하린과 달리
자신의 재능을 완벽히 알아낸 한예지의 성장 속도는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었다.
대륙의 재능충들을 보면 내 입장에서만 어마어마하지만 뭐, 내 화신이니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원하는 권능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새 권능이요? 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와, 성좌님이 권능 주신다는데 빼는 년이 있네.”
“그래도 고민 많이 해서 제대로 고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툭툭 한마디씩 거드는 선임과 후임들 사이에서 한예지가 멋쩍게 웃는다.
그녀가 행복하게 웃을수록 악몽의 편린을 구할 수 없게 되겠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물건 때문에 화신을 학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잘 된 거야.
※
정부 산하 기관이자 반쯤 공무원인 내륙 대테러 진압팀이지만
세상이 다르고 성좌가 엮여 있으니 조금 특이하게 굴러가는 모습을 보인다.
구역이 나뉘고, 거기에 3인 1팀을 짜면서 일정한 연봉이 아닌 운동선수처럼 계약금을 받는 형식으로.
“이야, 또 올랐네? 이러면 너도 월 천 클럽에 진입하는 거 아니냐?”
“에이 선배님. 아직 그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예지 덕분에 계약금이 덩달아 오르는두 사람의 눈에서 애정이 뚝뚝 흐르는 것이 당연하다.
같은 여자끼리 왜 이러냐며 몸서리를 치며 도망쳐도 장난을 치듯 들러붙어
헤드락을 걸거나 옆구리에 달라붙는 화기애애한 모습.
주변에는 성좌의 사랑을 받는 화신으로 알려져 질투 어린 시선도 많이 받긴 한다.
당장 한예지의 선배와 후배만 보더라도 활약을 하면 일부 포인트로 권능을 하사받는 식이지
한예지처럼 일단 권능부터 받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모두의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어이고, 성좌님.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복덩이 덕분에 작전 실패하는 일도 거의 없으니까 잘 된 거죠.”
그렇다고 해서 감히 한예지를 건드릴 수 있는 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큰 작전이 있을 때마다
내가 사무실에 광역 메시지를 갈겨버리니까.
거기에 반년, 매 달도 아니고 주 단위로 성좌가 직접 관리하는 화신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용감한 녀석은 없었다.
거기에 같은 구역의 작전 성공률 덕분에 팀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이익 정도는 얻고 있었으니 여론도 한예지의 편이고.
만약 여기에서 눈치 없는 년이 하나 튀어나와서 한예지를 갈구려 들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그 새끼를 조져버릴 것이다.
건드리지 않으면 계약금 10% 정도를 인상해주는 사무실 후배를 고작 질투 때문에 건드릴 멍청이는 없긴 하지만.
물론, 계약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면 너머의 사무실을 바라본다.
공포감은 거의 없고 평온함과 기쁨, 나른함만이 존재하는 사무실.
사람들도 충분히 모여 있었고 나의 화신도 있으니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성좌, 무기력한 악몽의 아바타가 등장합니다]
한예지가 성장하는 동안 나도 놀고먹은 것은 아니니까.
개당 2pt짜리 아이스커피를 사무실 머릿수만큼 소환하며 화면 속 사무실에 강림했다.
“오셨습니까!”
“과하게 인사하지 말래두?”
“저희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무거우실 텐데, 제가 들겠습니다.”
사실 강림이니 강신이니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악몽에 등장하는 트라우마를 소환하는 것처럼, 내 분신을 소환하는 것이니까.
육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초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정말 성인 남성 평균 능력치를 가진 분신을 보내 대화를 나누는 정도.
하지만 분신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와, 성좌님이셔...”
“너무 넋 놓고 보면 실례다, 눈깔 관리해라 신입.”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원룸에 처박혀 살다 보면 가끔 잊어버리는데
내 육체는 이하린과 한예지가 꿈으로 빚어낸 가장 이상적인 남성의 외모였다.
취향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긴 하지만 미남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외모.
몇 번 겪었다고 익숙한 척하는 고참들과 나를 처음 보고 감탄하는 신입들.
군대에 가까운 조직인 데다 특이하게 여성 비율이 아주 높은 사무실.
그런 곳에 꿈에서나 나올 법한 섹시 미남이 졸지 말라고 커피까지 챙겨주며 등장하는데 어느 여자가 퉁명스럽게 대할까.
그렇다고 해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겨우 5분 남짓한 시간, 커피를 나눠주며 사진 찍으러 온 정치인처럼
웃으며 우리 예지 잘 부탁한다고 인사 몇 번 하고 한예지의 머리 몇 번 쓰다듬고 나면 정신력이 고갈되니까.
집중을 풀고 정신을 차리면 모니터 앞에 축 늘어진 상태로 의자에 기대다시피 앉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언젠가 몽마로서의 능력이 더 성장하면 꿈이 아니라 현실에 놀러 가서 저쪽 세상의 문화를 즐길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