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37화 : 폭군 上 (37/169)



〈 37화 〉37화 : 폭군 上

불사르는 폭군의 이벤트가 기대되긴 하지만 그건 아직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정보를 얻었는지 공문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신청서를 들고 온 이하린 덕분이다.


‘성좌 오타쿠 커뮤니티 같은  있나?’

만들어진 세상이라지만 내 세상과 비슷한 구석이 너무 많은  보면
인터넷 사이트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취향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물론 이하린 정도의 광신도는 없겠지.


‘이런 정신 상태가 득실득실하면 그게 악몽이지...’

악몽의 편린을 위해 이하린의 악몽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든 걱정이다.
공포 게임의 요소와 자신의 트라우마가 뒤섞인 게임 스테이지를 만들어내던 한예지와 달리
이하린의 악몽은 평범한 세상으로 보인다.

어디로 걸어간다 해서 막다른 길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저택 밖의 세상이 그림판처럼 멈춘 배경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오히려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활기찬 것이 악몽보다는 길몽에 가까워 보이는 꿈.


“아 어제 출근했는데 팀장이...”
“서류는 어떻게 된 거야? 똑바로 처리 안 해?”
“야 야자 짼 거 담탱이한테 들킨 것 같은데?”
“어차피 들킨 거 게임이나 하러 가자. 매는 내일 맞지 뭐.”

창밖의 세상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돌아다닌다.
순간적으로 내가 꿈이 아니라 현실에 나간 거로 착각할 수준의 생생한 배경.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얼굴 이목구비까지 뚜렷하게 구현된 상태로 제각각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여성들이 황급히 뛰어다니고, 건널목에서 그들에게 화를 내며 빵빵거리는 자동차들이 있었다.
대낮에 교복을 입고 땡땡이를 치는 남녀 혼성의 학생들과 청춘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이 있는 세상.


‘이게 왜 악몽이지?’


사람들은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시선이 모이기는 했다.

잘 생긴 남자에게 보내는 본능적이고 열정적인 시선을.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쫓아오는 미치광이 광신도 NPC도 없고, 3m를 넘어가는 식인 살덩이 괴물도 없었다.
주머니 속에 자연스레 들어있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카페에서 소다 밀크  잔을 구매했다.
혀끝을 파고드는 달콤한 소다의 맛, 휘핑크림의 느끼하면서 부드러운 맛.
향부터 맛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거대한 꿈속을 돌아다니다 나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한예지의 무의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하고 정교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위화감.


“그럼 그렇지, 존나 일관성 있네.”

압도적으로 평화로운 일상은 마치 아포칼립스 이전의 내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이냐면, 성좌와 화신이 없었다.


“미치겠다 정말... 이러면 편린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

스마트폰의 인터넷 연예계 기사에는 성좌와 화신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당연히 검색해 봐도 소설과 게임 따위의 이야기만 나올 뿐.
길거리의 광고판에도 뉴스에도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도 성좌와 화신의 언급이 없는 세상.


성좌와 화신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그것이 이하린의 악몽이었다.


어디에서 악몽의 편린을 찾아야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한예지의 악몽은 게임 스테이지를 구현해 둔 모양새라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보상으로 악몽의 편린을 얻는 방식.
그렇다면 완전히 구현된  세계의 어디를 어떻게 해야 악몽의 편린을 찾을 수 있겠는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군것질을 하다, 나는 얌전히 포기하고 악몽 밖으로 나왔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어딘가에 있을 악몽의 편린을 찾아보기에는 꿈속 세상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이 거대한 꿈이 이하린의 재능이라 봐야 하냐?’

한예지도 이하린도, 쉽사리 악몽의 편린을 얻게  주지는 않네.
한예지의 악몽은 진행 자체가 막혀 있는 상황이고, 이하린의 악몽은 너무 거대해서 편린을 찾을  없는 상황.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없이 불사르는 폭군의 이벤트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심심하니까.


그래서 두 화신을 모니터링 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매일매일 이하린의 악몽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몽마는 꿈의 악마.


물고기가 헤엄을 치며 성장하고 지렁이가 땅굴을 파는 것이 식사와 성장의 방식인 것처럼,
몽마는 꿈속에 있을 때 성장하니까. 이 꿈속에서 마음대로 놀고먹기만 해도 몽마로서의 자질이 상승하는 것이다.


비유 대상이 물고기나 지렁이라는 것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내 능력이  그 수준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북 대륙에서 유명한 불사르는 폭군에서 조금 눈을 돌려볼까. 불사르는 폭군과 비슷한 수준의 성좌들.
대륙마다 가장 유명한 성좌들은 수십억 단위의 권능을 1년에 한두 번씩 갈겨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누구는 십만 포인트짜리도 큰마음 먹고 구매해야 하는데, 저기는 억 단위의 권능을 팍팍 써대니 원.


뉴비 게이머가 고인물을 보고 느낄 법한 감정이라 생각하며 나는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이하린의 악몽은 화신과 성좌가 없는 대신 괴물도 외계의 침략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이걸 왜 악몽이라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놀고먹기 좋은 세상이긴 하다.

남의 악몽을 휴양지 삼아 돌아다니다니 진짜 몽마 다 되었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샌드위치 전문점에 들어가 연유가 들어있는 달짝지근한 샌드위치를 먹는다.
악몽의 편린을 못 찾는 이유가 꿈에 간섭을  해서가 아니라 너무 넓어서니까 돈 정도는 만들어   있었다.


물론 돌아다니며 악몽의 편린에 대해 예측을 해본 것이 있기는 하다.

이하린은 자신의 삶이 성좌 덕분에 무사하다고 생각하고, 성좌가 없었다면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아마 그녀의 악몽은 단순히 성좌가 없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좌가 없어서 이하린이 죽어버린 세상이겠지.

그러면 문제가 더욱 커진다.


꿈속 세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도시 하나보다는 거대하다.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구현하지는 않았더라도
동대륙의 일부 정도는 구현된 것 같은데... 거기서 어떻게 이하린의 부모를 찾냐고.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경기도에서 이 씨 부부 찾기?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걸어 다니면서 몇 개의 도시를 뒤져야 한다.
보상은 아직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악몽의 편린 뿐. 그렇게 찾아도 그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그럴 바에는 한예지의 꿈속에 들어가서 낡은 쇠파이프를 맨손으로 부수는 연습을 하지.


뭐, 편린이 급한 게 아니니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그렇게 나는 이하린의 악몽 속을 돌아다니며 몽마로서의 성장을,
한예지는 후임을 가르치며 선임에게 혼나는 직업 군인에 가까운 직장인의 생활을,
이하린은 화신 아카데미에서 행복한 덕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불사르는 폭군의 참관일이  때까지.





규모가 규모다 보니 이하린과 한예지가 만나는 일은 없었다.

한예지는 제압팀 추천으로 들어갔고 이하린은 아카데미 성적 우수생도 추천으로 들어갔으니까.
화면 속에 나온 비행선이 수 십 척이고 초청받은 화신들이 백 단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딱히  사람을 인사시킬 이유도 없고
서로 다른 화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지나가며 묻는 정도기 때문에 따로 만남을 주선하지는 않은 상태.
그 때문에 같은 동대륙이지만 다른 공항에서 북대륙행 비행선에 탑승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물품 받지 못하신 화신분 계십니까?”

“생도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라.”

“앞으로 너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정신 차렷!”

군인들이 지원을 나온 한예지의 비행선과 교관의 인솔로 움직이는 이하린의 비행선.
개틀링 기관총처럼 생긴 무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비행선이 도시 위를 평화롭게 지나가는 모습은 조금 이질적이긴 했다.


그렇게 동대륙을 비롯해 다른 대륙까지 향했던 비행선들이 서서히 북쪽에 집결한다.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가 대부분 금발과 갈색이고, 건물의 생김새가 조금씩 다른 모양새.
아래에는 우글우글 몰려 카메라를 들이대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위에는 완전히 무장한 수 십 척의 비행선이 있는 모습


그 어떠한 연설과 미사여구도 없이 비행선은 약속 시각이 되자마자 출항했다.


초짜 화신을 위한 지원 정책에 가까운 성격 때문일까?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화신들은 그냥 동네 예비군처럼 보였다.
예쁘고 젊은 사람들이 꽤 섞여 있다는  제외하면 말이지.


‘멋지긴 하네.’


물론 웅성대는 초보 화신들이 멋지다는 것은 아니었다.

불사르는 폭군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검고 붉은 색으로 꾸며진 비행선들과
초보 화신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정렬해 있는 기계 병사들.


도열해 있는 수 십 명의 기계 병사  한 명만 덤벼들어도 이하린과 한예지 둘 다 가볍게 제압당하겠지.


[화신들이여, 보아라-]


그때, 스피커를 뚫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아래, 인류를 위협하는 더럽고 추악한 괴물들의 모습을 보아라.]


불사르는 폭군이 포인트를 사용해 모여 있는 모두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무언가가 연결되었다는 기분과 함께
내 정신이 어디론가 강제로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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