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화 : 특강
화신을 위한 아카데미는 생각보다 폭 넓은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빠른 졸업 후 취업을 위해 조급하게 학점만 딴 한예지와 그녀의 성좌인 내가 모르던 것.
그런 것들을 이번 이하린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학점은 주지 않지만, 화신을 위해 온갖 것을 교육하는 특수 강의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화신과 성좌 오타쿠인 이하린은 눈에 불을 켜고 특강을 고르고 내게 허락을 받으러 왔다.
취미 생활까지 금지할 정도로 야박하진 않은 데다, 나 또한 호기심이 생겨 곧바로 허락을 해 주었고.
안 그랬다가는 또 바닥에 머리를 박을 것 같아서.
제목과 강의 계획서만 봐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긴 했다.
학점이 없는 교양 과목이라 해서 성좌와 화신에 대한 역사 같은 고리타분한 세계사 따위나 있을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합리적인 소비 생활’이었다.
화신은 성좌의 선택을 받기 때문에 어느 계층에서나 등장한다.
빈민가의 고아 소녀가 재능을 인정받아 수백억 단위의 연봉을 받게 된 것이 가장 유명한 일화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한예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세상이 바뀌며 돈의 단위도 바뀌었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화신은 고소득 직종이다.
첫 월급을 받은 한예지가 통장을 보면서 운 걸 보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지.
자기 옷 사는데 5만 원 이상 써본 적 없는 한예지에게 매달 수백 단위의 돈이 통장에 꽂히는 것이다.
그걸 어디에 쓸까? 고기도 먹어 본 년이 잘 먹고, 돈도 써 본 사람이 쓰는 거지.
심지어 내륙이 아니라 대륙 외곽으로 향해 거대 괴수를 사냥하는 화신들은
정말 주급 단위로 평범한 회사원 연봉에 해당하는 돈이 들어올 수 있었다.
처음 큰돈이 들어오면 집 바꾸고 빚 갚고 차 사고.
그런데 그다음에는? 다음 주에 똑같은 돈이 또 들어오는데? 그리고 또 그 다음 주에는?
그렇게 갑자기 부자가 된 화신들과 경제 순환을 위한 소비 방법 강의부터 품위 유지를 위한 패션과 화장, 미용법 강의.
성좌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강의나 대륙별 성좌들의 세력 분포도와 문화 차이를 알려주는 글로벌 화신학 같은 것들.
이하린은 오타쿠답게 눈에 불을 켜고 성좌와 화신에 관련된 특강을 모조리 신청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정보력으로 아카데미의 온갖 특강을 쓸어모으던 이하린은
내게도 이득이 될 법한 커다란 정보를 가져왔다.
아마 내가 허락하지 않았을 때 협상 요소로 쓰려는 건 아니고
일종의 공물 비슷한 개념으로 바치기 위해 가져온 정보.
‘북 대륙 성좌 불사르는 폭군님의 권능 및 화신 합동 대규모 토벌 시연회’라는 거창한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
딱 봐도 군 관련 공문서 냄새가 폴폴 나는 서류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날짜와 시간, 집합 장소만 달랑 있는 신청서.
아직 해가 쨍하게 떠 있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하린을 꿈속으로 불러들였다.
“타이밍이 좋아요, 성좌님! 첫 번째 화신분도 같이 신청을 하면 될 것 같아요.”
“그게 뭔지 설명부터 해 주면 고맙겠구나.”
꿈속에 들어오자 뜨거웠던 지난 밤이 떠올랐는지 잠깐 멍하니 서서 얼굴을 붉히던 그녀였지만
곧바로 내게 서류를 팔락거리며 후다닥 달려온다.
그 모습이 커다란 개 같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니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러니까, 북 대륙에서 가장 화신을 많이 거느리신 ‘불사르는 폭군’님이, 대륙 외곽 지역을 정화할 때 참관하는 행사에요.”
“왜 그런 일을 벌이는지 아니?”
“포인트 때문이라고 배웠어요. 불사르는 폭군님의 권능은 강력한 만큼 소모 값이 커서, 그걸 충당하기 위해 다른 화신들을 불러모은다고 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불사르는 폭군이 참 똑똑하게 머리를 잘 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는 화신의 활약에 비례한 포인트를 받는다.
그리고 그 활약을 측정하는 것에는 대륙에 퍼지는 이름값 또한 포함되어 있겠지.
북 대륙이 아닌 동대륙 구석의 화신 두 명짜리의 연약한 성좌에게도 그 소식이 닿을 정도라면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권능이 거대하고 강력한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은 괴물을 죽여야 해서 매년 하는 행사는 아니에요. 지난 참관은 3년 전이라고 들었으니 슬슬 때가 된 거죠. 가끔 적자가 날 때도 있다 하는데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품위 유지비라고 계속 진행하신다고 하네요.”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이하린을 꿈에서 내보내고 한예지를 불러들였다.
마침 순찰이 끝나고 사무실에서 쉬는 모습을 보이길래 시간 끌 필요는 없었으니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잠시 낮잠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선배님, 저 잠시 휴게실 좀 들어가겠습니다!”
“엉, 아... 호출이냐? 알겠다. 그래도 다음 순번 전에는 나와주라.”
화면 속에서 한예지가 후다닥 휴게실로 튀어 들어가 소파에 드러눕는 모습을 선배와 후배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두 사람 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성좌와 계약했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적인 교신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세세 콜콜한 이야기까지 전부 투덜거리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남아 있지를 않겠지.
이하린이 나간 꿈속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한예지가 걸어들어온다.
꿈에 들어오면 처음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는 것은 둘 다 똑같네.
멍한 얼굴 앞에 이하린이 꿈속에서 만들고 간 서류를 흔들어본다.
“아, 성좌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 서류를 봐 주겠니?”
그제야 내 얼굴이 아닌, 자신의 앞을 가리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는 한예지의 모습에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이하린도 그렇지만, 한예지 얘도 어지간히 맹목적이긴 해.
하긴 이쪽 세상 사람 중 성좌에 맹목적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긴 하지만.
“북 대륙, 불사르는 폭군... 와,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있었지!”
“알고 있는 거니?”
“네. TV에서 특집으로 엄청나게 방송하거든요. 중학교 때 학교에서 이거 모르면 병, 음, 간첩 취급받았어요. 선생님들도 시간 남으면 틀어주고 안 보면 반쯤 농담으로 인류 배신자라고 놀렸는데.”
그렇게 말하던 한예지가 미간을 살살 찌푸리더니 커다란 TV를 소환한다.
크고 두꺼운 데다 천장 모서리에 대충 설치된 꼴을 보니 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TV일까.
참, 자각몽 다루는 실력도 좋지.
자각몽을 성좌가 하사한 권능이라 생각하고 남용하지 않으려는 이하린과 달리
한예지는 내가 준 권능이니 마구잡이로 써서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취업하고 스트레스가 좀 있었는지 자각몽 속에서
게임도 하고, 만화도 읽거나 휴양지를 만들어서게으름을 피우는 데 쓰긴 했지만.
그 때문인지 그녀가 내 앞에 보여주는 영상은 화질도 선명하고 끊김도 없었다.
낡은 TV와 어울리지 않는 최고 품질의 동영상이 눈을 어지럽힌다.
‘아니 씨발, 격차가 너무한 거 아닌가.’
SF 미래 세계관 출신의 황제, 불사르는 폭군.
북 대륙을 주 활동지로 삼은 이 성좌는 인류 연합을 침공한 외계 세력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남자였다.
조는커녕 경 단위는 넘어가는 외계 생명체를 박멸했지만,
그 후폭풍으로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 끝자락으로 피난해야 했던 위대한 영웅.
전쟁에서 죽어버린 여황 대신 인류를 이끌며 정착할 수 있는 행성을 찾아 우주를 떠돌다
동면 장치 안에서 최후의 인류가 되어버린 사내.
그리고, 최초의 성좌.
성좌는 영혼이라 수명이 없는 건지 아니면 미래 과학의 힘으로 버티는 건지
벌써 수 백 년은 대륙을 수호한 성좌의 군대가 도열한다.
지상이 아니라 저 높은 허공에서.
‘저게 과연 얼마쯤 할까?’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계 슈트로 온몸을 감싼 사람들이 비행정에 설치된 기관포를 잡고 마구잡이로 쏴댄다.
반대로 각 잡힌 자세로 기묘한 레이저 포를 발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저게...”
“네, 저기서 발칸포를 잡는 사람들이 참관한 사람들이에요. 같은 길을 걷는 성좌들을 위해 지원을 해 준다는 명목이죠.”
황제는 황제였다.
아니, 저러면 폭군이 아니라 명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찬 괴물들.
거대해진 짐승과 식물과 곤층도 있었고, 기괴하게 꾸물거리는 촉수나 이형의 괴물들도 있었다.
희고 검은 온갖 색상의 살덩어리들이 마치 곤충 군락처럼 지상에서 꾸물거리다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총탄의 세례에 산산조각이 난다.
간혹 날개 달린 것들이 위로 치솟아 올라오지만
그런 녀석들은 좀 더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은 폭군의 화신들에게 제압당해 근처에도 오지 못한다.
면적으로 치면 도시 수십 개 분량은 될법한 광활한 평야와 그 평야를 가득 채우고 엉켜있는 괴물들이
불꽃 아래에서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진다.
확실히, 저런 걸 방송해 주는데 모르면 인류의 배신자나 간첩 정도는 되겠네.
화면 속 장면은, 속된 말로 뽕 맛이 가득 차오르는 광경만 가득 담겨 있었다.
멋들어진 기계 슈트와 단기 비행을 위한 제트백을 장착한 병사들.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히는 무시무시한 폭격과 빔 병기.
비행을 시작하는 괴물 무리와 맞대응하는 엘리트 화신들까지.
더군다나 초청받아서 기관포를 쏘게 되면 대체 얼마나 포인트를 벌 수 있을지 계산이 되지 않는다.
내륙에서 가끔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자그마한 괴수나
맛이 가서 날뛰는 화신을 제압해서 받는 포인트가 1만 포인트 언저리란다.
그보다 몇십 배는 거대한 괴수를 수백 수 천마리 단위로 사살하게 되면?
말 그대로 기반이 없는 성좌를 위한 자비를 베푸는 행위인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천 단위의 괴물을 사살해도 적자를 운운하는 저 비행선 소환 기술이겠지.
대체 몇 포인트를 소모하길래 도시 단위의 괴물을 쓸어버리며 대륙마다 방송해도 적자가 나게 되는 걸까?
꿈에서 뭉그적대다 출동 시간이 되어 강제로 잠에서 깨게 된 한예지를 배웅하고
나는 슬그머니 컴퓨터에서 권능을 검색해 보았다.
권능 구매 비용에 0이 10개는 붙어 있고
소환 비용과 유지 비용이 따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정말, 다른 세상에 사는 성좌들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