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2화 : 길들이기
심심하던 일상에 신선한 즐거움이 추가되었다.
“꿈에서 깨지 말고 버텨보렴.”
“네, 네에...”
예쁘게 잘 정리된 서류철 안에는 온갖 성좌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성좌가 화신에게 말 해 주었던 이야기들. 판타지 세상의설화, 무림 세계의 비무행, 미래 세계의 사건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지루한 서류라기보다는 판타지 설정 집을 읽는 것 같아 재미가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원룸에 20시간 내내 누워 있는 것보다 판타지 설정 집읽는 게 훨씬 재미있지.
성좌에 대한 정보는 국가적으로 관리되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설정 오타쿠들이 정리해 놨을지도 모르고.
내가 대륙 너머까지 유명한 성좌들의 정보를 읽는 동안 이하린은 자신의 꿈속에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엎드린 게 아니라 구석에 앉아서 나를 곁눈질로 슬금슬금 바라보며.
내가 무슨 질병 덩어리도 아니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호흡이 가팔라지고 심장박동이 불안정해져서 꿈이 마모되기 시작하니까.
하루에 10cm 정도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마음의 거리도 아니고 물리적 거리를 이딴 식으로 좁히다니.
그래도 크나큰 발전이 있긴 했다.
이제는 접근만 하지 않으면 자각몽이 깨지지 않으니까.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이 되지만
10분 만에 꿈에서 깨어나서 하루에 열 번 넘게 자각몽의 권능을 사용하던 때를 사용하면 뭐...
내가 내린 명령에 따라 시간당 1cm씩 엉덩이를 꼬물거리며 접근하는 이하린을 내버려 두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성좌들은 세계 최후의 생존자들인 만큼 다양해서 보는 맛이 있으니까.
나처럼 무기력하게 휘말려서 목숨만 붙어 있던 사람이 있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사람이 있으며,
반대로 세계 멸망의 원인에게 복수를 한 사람도 있었다.
성좌라고 다같은 성좌가 아니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지네.
예를 들어, 마왕이 침략한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이 있었다.
다만 용사가 마왕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뿐.
인류의 마지막 보루에서 보호받던 왕자 ‘시들지 않는 꽃’은 나처럼 이 세상에 와서 얻은 권능밖에 없다.
반대로, 사악한 요괴들이 인간을 멸망시키려 하는 무림 세계에서 검 한 자루로 사악한 것들을 전부 도륙 냈지만
대지가 썩어들어가고 공기가 오염되어결국 최후의 인류가 되어버린 검객도 있었다.
성좌, ‘굴레를 베어내는 검’ 이라 이름 붙은 그 검객은 자신의 화신들에게 권능을 하사하는게 아니라 검술 지도를 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판타지 세상의 왕자나 기사, 무협 세상의 검객, 미래 과학적인 제국의 황제, 인류 최후의 함대를 이끌던 함장.
온갖 세계관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보니 다른 화신들의 권능과 특성도 뒤죽박죽.
“헤으응...”
그런 내용을 읽고 있으니 목이 졸리는 것 마냥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 차리고, 숨을 천천히 내쉬렴. 힘들면 잠깐 뒤로 물러서도 좋단다.”
“아뇨, 버텨볼게요!”
열의를 가지고 버티겠노라 의지를 보여주는 건 좋지만 고작 뒤에 앉은 걸 버티겠다는 게 너무 처절한데.
등과 등을 마주한, 하지만 피부는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
눈앞에 내가 없어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만으로도 부담감을 가지는 걸까.
우주 문명에 도달한 인류의 황제가 침략해오는 외계 종의 행성을 전부 파괴하고 나서
새 행성을 찾아 떠돌다 우주에서 죽었다는 내용까지 읽고 나서 나는 슬그머니 뒤로 돌았다.
성좌, 불사르는 폭군이 자신의 화신들을 슈퍼 솔져로 만든다는 내용이 궁금해서.
“히엑-”
“아니,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이하린이 심호흡을 하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어서 문제였다.
내 어깨가 그녀의 가슴을 툭 건드리고 밀쳐낸다.
그러자 양팔을 교차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린 그녀가 옆으로 픽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자각몽이 무너지고 그녀의 기억이 잔뜩 놓여 있는 무의식의 세상이 시야를 뒤덮는다.
오늘의 신기록, 어깨로 가슴 터치.
처참하기 그지없는 기록이었다.
※
마음을 냉정하게 해 주는 권능을 구매할까? 그런 고민까지 하며 이하린을 관찰했다.
한예지가 제압팀 1년 차 막내로 들어가 순찰 노하우를 배우며
햇병아리 생도에서 어엿한 화신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동안 이하린은 드디어 나와 악수에 성공했으니까.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1일이 되는 것을 기다리는 몇 주 동안 이루어낸 성과였다.
떨어진 상태로 마주 보고 앉기.
그다음에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슬금슬금 다가와 등을 맞대고
또 그다음에는 나란히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말하는 것만 놓고 보면 풋내기 커플의 달짝지근한 연애 스토리처럼 느껴지네.
‘히에엑-’
‘정신 똑바로 차리렴.’
‘네, 네에엑-’
‘아직 손도 안 잡았단다?’
‘알겠습니이이익-’
그걸 위해서 박살 나버린 자각몽이 몇 번인지는 헤아리지 않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그래도 악수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물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없이 갑작스럽게 접촉하면 기절하긴 하지만.
자각몽에서 빠져 나와 화면을 바라본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리는 아카데미 아침의 풍경 속에 한예지 대신 이하린이 있었다.
기초 체력 테스트와 화신 특별법은 시험 칠 필요도 없어 보일 정도로 줄줄 외워버린 이하린이.
문제가 있다면 그다음이다.
한예지는 특성이 열리며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는데 그것은 ‘몽마의 첫 번째 정’을 소화하고 얻은 특성.
그렇다면 이하린도 특성을 얻으려면 몽마의 정을 얻어야 하고, 당연히 나와 섹스를 해야 하는데-
‘손만 잡아도 5분 안에 기절하는 애랑 무슨 수로?’
손만 잡으면 5분, 눈을 마주친 상태로 마주 잡으면 3분 안에 기절한다.
컵라면보다 빠르게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리는 애를 어떻게 벗기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기절한 상태에서 범해버리고 싶지만 기절하면 꿈에서 깨어나니 문제였다.
“음, 훌륭하군요. 역시 군사 대학 출신이라 그런가? 기본이 잘 잡혀 있어.”
“감사합니다!”
복잡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이하린은 순조롭게 아카데미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카데미가 참 쉽게 느껴지지 않을까.
극소수의 천재를 제외하면 라이벌들은 아직 어정쩡한 민간인들이고 교육 수준도 심화 과정이 아닌 기초 과정이니까.
체력 단련 때에는 언제나 상위권, 화신 특별법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수업 때 졸거나 흐트러지는 모습 하나 없다.
정말이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모범생의 모습.
기절만 안 하면 참 좋을 텐데 진짜.
아쉬움은 미련으로 남아 가슴 속에 질척하게 남는다.
정신과 관련된 권능 중에 이성을 유지해주고 냉철한 마음가짐을 마련해주는 녀석이 있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 어쩔 수 없다. 어지간히 비싼 녀석이 아니면 다른 감정까지 건드리게 되니까.
삼류 무공에는 부작용이 있고, 중국산 제품에는 하자가 있는 것처럼 가격이 싼 권능은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다.
당장 달콤한 자각몽만 보더라도 3천 포인트짜리 싸구려라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강제로 깨어나지 않던가.
그래도 꿈 관련된 거니 부작용이 덜 한 거지, 다른 녀석들은 의외로 부작용이 심했다.
육체가 강해지는 대신 근육이 기괴하게 부풀거나, 오래 집중하면 통증이 찾아오는 식으로.
그렇다고 부작용이 없는 권능을 고작 자각몽에서 안 깨어나기 위해 구매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진다.
아니, 부작용이 없는 수준으로 구매하려면 몸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었다.
뭔가 특별 조처를 해야 하는데, 그 조치가 뭔지 모르겠어.
그래도 한 달 만에 피부 접촉까지는 왔다.
반년 안에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카데미에서 교관들에게인정을 받는 이하린과
순찰을 돌며 선임에게 갈굼을 빙자한 교육을 듣는 한예지를 번갈아 구경했다.
한예지는 알아서 쑥쑥 성장하던데.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다고 징징대는 것만 들어주면 되니 얼마나 편해.
심지어 자각몽이 늘어났는지 내가 들어가지 않아도 알아서 푹 쉬다 꿈에서 깨어난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엉겨 붙다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고 멋대로 욕망을 분출하고 후련하게 사라지니까.
포인트 벌이도 늘어나고 있고, 제압반으로서 활동하는 것에도 노하우가 붙고 있었다.
‘성좌님, 두 번째 화신은 어떤 사람이에요?’
‘음, 수줍음이 많은 아이란다.’
‘그렇군요...’
갑자기 별 것 없었던 대화가 떠오르네.
차마 두 번째 화신은 피부 접촉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중증의 광신도에,
계약하기도 전에 너와 내 존재를 줄줄 외우고 있던 성좌 오타쿠란다~ 라고 말할 순 없었지.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정말로 무서웠다.
이하린과 계약을 시도했을 때 그녀는 도서관에서 기절했었다.
그리고 깨어나서 계약하자마자 양호실에 한 번 들리고, 높으신 분들과 면담을 하고
자기방에 와서 짐 정리를 하다 식당으로 끌려간 상태.
컴퓨터는커녕 스마트폰을 볼 시간조차 없이 빡빡하게 움직였는데
식당에서 성좌에 대해 대화를 할 때 나와 한예지를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계약하고 나서 찾아본 게 아니라 계약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
한예지 대신 이하린을 집중해서 관찰하니 절로 한숨이 다시 나온다.
이러다 바닥 꺼지겠네.
다른 생각을 하다 자각몽에 늦게 들어갔더니 멋대로 나를 상상하고 기절해버린 탓에 바로 튕겨 나왔으니까.
한예지는 망상 속에서 나를 가지고 잘만 자기 위로를 하던데, 얘는 왜 나를 생각하고 기절하는 걸까.
본격적인 진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은 반년.
반년 안에 그녀를 길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