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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31화 : 오타쿠 (31/169)



〈 31화 〉31화 : 오타쿠

꽃에 의미를 부여하여 꽃말을 만들고, 보석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탄생석을 만든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튼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입맞춤에도 마찬가지.
머리카락에 하는 입맞춤은 사모의 의미요, 손등에 하는 입맞춤은 구애의 의미니 온갖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발에 하는 입맞춤은 복종의 의미로 널리 통한다.

발끝에 하는 입맞춤이 숭배, 발 등에 하는 입맞춤이예속이었던가.
꽃말도 탄생석도 마찬가지로 다 귀찮게 지어낸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키스의 의미만큼은 정확하게 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헤으응-”

“아니, 좀!”

다른 세상에서도 이러는 애가 있으니까.

벌써 열 번은 넘긴 입맞춤.


혀와 혀가 오가는 찐득하고 관능적인 키스도 아니고, 얼굴과 얼굴이 마주 보는 다정한 상황도 아니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바닥을 기어와 발끝에 입술을 살며시 가져다 대는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


그것만으로 꿈의 끝자락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지는 모양이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바닥에서 바르작바르작 몸을 떨고 있는 이하린 또한.


계약 메시지 창을 봤다고 심정지가 오고, 권능 메시지 창을 봤다고 기절을 했던 모습을 생각해야 했는데.
단순히 메시지창만 봐도  까뒤집고 기절하는 애가 성좌와 직접 접촉하니 이렇게 되는 거지.

심지어 이게 자각몽이라서 더욱 그렇다.


광신도적인 두뇌로는 감히 성좌에게 자신이 먼저 입맞춤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없어 꿈이 깨는 것이다.
한예지가 섹스 직전에 오르가즘으로 몽정을 하며 깨어난 것과 전혀 다른 모양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흥분으로 잠에서 깨어난 한예지와 달리
이하린은 ‘이보다 더 행복한일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라고 단정해버리기 때문에
자각몽이 목적을 달성했다 판단하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자연스럽게 권능인 자각몽도 끝나는 것이고.
그러니까 계속 이 짓을 해야 한다. 적어도 그녀가익숙해질 때까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무너져가는 자각몽 속에  이상  일은 없기에 나는 주저 없이 꿈 밖으로 나간다.
시야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원룸의 풍경이 보인다.
몽마의 삶에 익숙해진다는 증거. 하지만 이것에 익숙해 지면  하겠는가.


‘...그냥 시간이 해결해  문제인가?’

 광신도적인 행태를 어떻게든 순화시켜야 하는데.


애정 결핍이 있는 고등학생 소녀 가장도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심리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는 의도치 않은 가스라이팅에 세뇌된 광신도의 정신 문제를 해결하라고?
그게 되면 무기력한 악몽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받았겠지.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침대에서 일어난 이하린이 낡은 팔찌를 손에 꼭 쥐고 기도를 한다.
묵주나 십자가처럼 종교적인 건 줄 알았더니 자기를 구해준 화신의 기념품이란다.
이건 조금 질투가 나지만 생명의 은인의 상징인데 뭐라 할 수는 없지.


꿈속에서의 과도한 모습을 제외하면 그녀는 딱 바른 생활 아가씨라고 소개할 수 있는 생활을 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가볍게 씻은 다음 운동장으로 향한다.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달리기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라도 한 건지이쪽 세상 사람들은 전부 조깅에 환장을 하네.


아침 식사를 하고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 높으신 분들에게 상담하러 간다.
화신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아카데미로 전입하는 것 때문이다.


“자네의 노력이 보답받을 거라 생각했네.”

“감사합니다!”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장교가 나와 악수를 하고 사라지자 그 밑의 수행원들이 이것저것 알려준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학비 100% 환불을 비롯한 다양한 혜택들.
화신이 되어서 아카데미로 훌쩍 떠날 이하린에게 온갖 혜택을 안겨주는 걸 보니  대단하다 싶었다.

교관들과의 상담이 끝나고 짐을 싸고 있으니 어느 정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몰려와 그녀를 끌고 간다.
수업이 한창일 시간이라 텅 빈 식당으로.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살더니, 결국 소원 성취하네.”


“나중에 전쟁에서 만나면 모르는 척하지 마라~”

다들 그녀가 최전방으로 갈 거로 생각하고 덕담을 던진다.


“그래서, 어떤 분이랑 계약한 거야?”


 하고 던져지는 가벼운 질문.
화면 너머에서 구경하던 나도 별생각 없었던 질문에 몇몇 학생들이 질색하며 슬그머니 뒤로 빠진다.

“아, 무기력한 악몽님이라고-”

왜 저러는지 궁금해서 속닥거리는 걸 들어보고 싶어서 슬그머니 뒤로 빠진 학생들을 살짝 확대해 본다.
둘러싸고 있는 학생들과 슬그머니 도망치는 학생들이 혼잡하게 뒤섞이지만 눈에 불을 켠 이하린은 눈치채지 못한다.


‘야, 넌 쟤한테 그걸 왜 물어봐?’

‘아니, 그래도 자랑 한 번은 하게 해 줘야지.’


‘한 번이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송별회라고 교관님이 음주 허용해줬는데 자랑하다 통금시간 오겠다.’

‘그 정도야?’


‘그 정도 같은 소리 하네, 니가 책임지고 다 들어줘라. 난 차라리 심부름하러 갈래.’

어쩐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몰렸다 싶었는데 이하린 덕에 떨어질 콩고물을 노린 건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하린이 턱 아플 정도로 떠드는 내용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애들이 몇 있다는 것이다.


“몽마 계열이시고, 첫 번째 화신은 같은 동대륙인  봐서 동쪽에 터 잡으실  같아.”


“몽마? 그러면 괴물 사냥에는 애매하지 않아? 악몽이나 꿈 계열은-”

성좌 오타쿠가 몇명 더 있으니까.

밀리터리 오타쿠, 통칭 밀덕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총기 제원이나 탱크, 헬기 제품규격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과 같나?
무리의 중심에서는 이하린을 포함한 성좌 오타쿠들이 온갖 성좌 이야기를 꺼내고 있고,
나머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내가  번째 화신이니까 권능은 잘 모르지. 첫 번째 화신은 내륙 대테러 진압팀 들어간 것 같은데... 그러면 나도 괴수가 아니라 타락한 화신 제압팀으로 갈 수도 있겠다.”

“야,  아플 텐데 맥주라도 마시면서 말해.”

기숙사 식당에 배달 음식들이 다양하게 배달된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돈을 모은 건 아니고, 아까 면담하던 높으신 분이 카드를 쥐여 준 것인지
교관들이 먹고 남기라는 식으로 잔뜩 시켰기 때문에 탄산음료를 비롯해 맥주까지 허용된 즐거운 식사.

‘뭔가, 뭔가 이상한데...’


치킨을 비롯해 족발처럼 보이는 돼지 다리와 양념에 절인 고기 같은 게 잔뜩 배달된다.
음식도 술도 우리 세상이랑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뭔가 거슬리는  있는데.’


몽마로서 느끼는 게 아니다.


예쁜 사진에 얇은 줄 하나 그어둔 것 같이,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위화감.
 다리로 싸울 뻔한  년이나, 탄산음료가 터져 바지를 적시고 배달원을 욕하는 등
떠들썩한 대화에서 뭔가가 나를 간질이고 있었다.

“응, 뭐... 나도 좀만  노력하면 특성 개화할 수 있겠지.”

“그래 뭐, 아등바등 계약까지 해냈는데 특성을 못 얻겠냐. 힘내서 해라!”


그리고 들려오는 성좌 오타쿠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들으며 음료 한 캔을 마시다 깨달았다.

“그렇지? 나도 빨리 특성 생기면 좋겠다.”


이하린은 한예지를 알고 있었다.


뭔데, 씨발.









성좌 오타쿠.

이쪽 세상에서는 생각보다 메이저한 장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메이저하다 못해 오타쿠  가장 사회적 위상이 높다고 해야 하나?
성좌와 화신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넘쳐나는 세상에, 타락한 성좌와 타락한 화신도 있는 세상.
그러다 보니 성좌와 화신에 대해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특이해 보이지만 경멸의 시선은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방구석 오타쿠처럼 자기 관리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침하게 성좌와 화신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정도면 다르게 보겠지.
안 그래도 재능 넘치는 영혼들만 모인 세상이라 더 그런 면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는 군사 대학.

최전선에 나가 화신 옆에 서고자 하는 욕망으로 동대륙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군사학 공부를 하고 체력 단련을 하는 군인이 성좌에 대해 줄줄 외운다고 누가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어느 정도 전문성이 인정되지.


근데 그게 도를 넘었어.


“다른 화신 특성이 추가타 1회라고? 권능 말고 특성은 전쟁에서 괴물 새끼들 밀어버릴  참 좋아 보이는데.”

“근데 몽마 계열이 괴수 특화는 아니지. 특성 말고 권능만 보면 내륙으로 가는 게 맞다.”

“성좌님이랑 상담은  봤어? 아니면 그냥 권능만 내려주시는 분이냐?”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이하린이 들뜬 마음으로 꼬박꼬박 대답한다.

한예지는 권능보다 특수 능력빨로 내륙 대테러 팀에 들어갔다.
자각몽으로 매일 접신해서 계시를 받는다. 지금도 지켜보고 계실 가능성이 크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카데미를 1년 만에 깔끔하게 졸업했더라.
성좌님께 돌봄을 잘 받거나, 재능이 뛰어나거나, 내가 모르는 권능 사용법이 있다-

... 그걸 전부 어떻게 알았는데 씨발.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예지와 이하린은 전혀 모르는 사이다.

같은 동대륙이라 하지만 말 그대로 대륙이다. 적어도  단위 인구가 사는 동쪽 대륙. 위치도 가까운 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 대학 다니는 22살 사관생도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출신 20살 화신을 어떻게 저리 잘 아냐고.
순찰이 끝나고 쉬고 있던 한예지에게 후다닥 화면을 돌려 메시지를 보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첫 번째 성좌에게 SNS라도 하냐고 묻습니다]


“네? 저 그런  관리 귀찮아서 안 하는데... 지금이라도 만들까요?”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첫 번째 화신의 개인정보를 걱정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성좌님 정보는 제가 상담한 내용만 국가 기관 데이터베이스에만 있을거고, 화신인  개인정보는 어디서 유출될 일이 없는데...”

순찰이 끝나고 쉬고 있던 그녀가 사무실 컴퓨터로 어느 사이트를 보여준다.

국가 공공 데이터 센터의, 공익 데이터 센터 내부의, 성좌목록등록 항목에 빽빽하게 가득 찬 인터넷 서류를.
평범한 사람들은 들어  일도 없어 보이는 공공데이터 포털의 목록 구석에 성좌 데이터 제공 신청란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하린은 취미로 국가데이터센터에서 성좌와 화신 데이터를 읽는다 이건가?

정말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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