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화 : 망상
도서관에서의 난동으로 쏠린 관심이 사라진다.
후다닥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이하린은도서관 사서에게 빌린 내부 전화기로 어느 교관에게 연락한다.
군사 학교에서 성좌와 화신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반쯤 전통이다 보니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나 보네.
보건 교관도 있었겠다 도서관 사서와 학생들도 다들 계약의 파장을 본 상태.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아 이하린은 자신의 기숙사실에서 방을 빼고 개인실로 옮겼다.
4인 1실을 기본으로 사용하던 군 기숙사에서 개인실로 옮긴 것은 화신과 성좌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라며 교관이 이하린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십만 포인트를 날려 먹었음에도 다행스럽게 3천 포인트 정도는 남아 있었다.
천 포인트씩 석 달 기다려 구매했던 걸, 이제는 잔돈으로 사는구나.
이걸로 달콤한 자각몽을 사 주면 진짜 반년 정도는 아무것도 구매 못 하겠네.
그렇다고 이 제한된 채팅 메시지로 마음을 읽는 퀴즈쇼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각몽은 반쯤 필수 아이템이고.
어차피 화신을 수십, 수 백 명 만들 생각은 없다.
몸을 섞을 사이가 되는 데 마구잡이로 늘리면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여자 수 백 명으로 이루어진 하렘 따위를 꿈꿀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지금 쟤만 해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이하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각몽을 사용한 게 아니라, 계약 첫날부터 권능을 하사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며 기절했기 때문에.
화들짝 놀라 화면을 최대한 확대하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심장마비는 아닌 것 같았다.
두 번째라고 내성은 생긴 건가.
‘씨발, 이러다 자각몽 속에서 심장마비로 두 번째 화신이 뒤지는 건 아니겠지?’
화신 한 명당 기본 포인트는 1,000pt.
섹스를 통해 영혼적 교감을 하고 몽마로서의 통정을 하면 5,000pt.
기본 포인트가 5배 차이 나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여자, 그것도 미녀로만 고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쪽 세상 기준으로 미남 미녀는 키가 훤칠하고 근육질에 다부진 몸을 가진 짐승남, 짐승녀들.
근육이 있지만 조금 아담한 편인 이하린은 엄밀히 따지자면 미녀가 아니었다.
나한테는 미녀지만.
...그래도 미녀니까 참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하린의 평소 모습은 조용조용한 문학소녀에 가깝다.
키도 여자 중에서 작은 편이고, 근육도 우락부락 붙어 있지 않으니까.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친절하지만, 공부에 대해서는 독종인 책벌레.
그런 이미지니까 사이가 특별히 좋은 사람은 별로 없어도, 사이가 나빠진 사람도 없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알려주는 공부 잘하는 애.
모두와 적당히 친한 사람 정도의 포지션.
그런 얌전한 여자애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교관을 밀치며 난동을 피웠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리 심각한 기절은 아닌지 이십 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이하린은 눈을 떴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째서인지 불안해 보이길래 달래주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몸이 괜찮은 게 맞냐고 묻습니다]
“아, 아아... 성좌님. 괜찮습니다! 완전 튼튼해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했는지 그대로 침대에 기대듯 눕는 이하린.
침대에 등을 기댄 상태에서 벌벌 떨리는 손이 그녀의 심리 상태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좀 쉬게 놔두었다가 밤에 자각몽을 꾸는 게 좋겠지?
“그,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푹 쉬면서 자각몽에 익숙해지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하린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눕는다.
밤이 되기는커녕 해도 지지 않았는데 망설임 따위는 없구나.
말만 하면 하루 24시간 내내 잠을 잘 녀석이네.
[화신 이하린의 자각몽에 간섭 하시겠습니까?]
[Yes / No]
한예지의 익숙한 자각몽만 들어가다가, 오랜만에 휘청거리는 자각몽으로 들어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람이 당황하면 몸이 굳고 사고가 멈춘다는 것을.
“이런 씹...”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전쟁에서 죽도록 구른 노련한 병사 같으면 몰라도, 나 같은 평범한 놈은 그렇단 뜻이다.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거나, 옆길에서 크리쳐가 튀어나오거나, 불량 기계가 펑! 하고 터져버려서 동료가 구워지거나.
그런 당황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몸이 반응하는 게 아니라 깜짝 놀라서 굳어버린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 트럭을 보고 어어어, 하다 치이는 멍청한 등장인물들처럼.
지금의 내가 그랬다.
‘...이건 뭐 어떻게 해야 하나.’
한예지의 첫 자각몽이 뒤죽박죽이었던 것처럼, 이하린의 자각몽 또한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었다.
신문 기사 스크랩과 동영상과 뉴스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거대한 방.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은 성좌나 화신의 활약상이 담겨 있는 정보들이었다.
최전선에서 괴물들의 습격을 막아내고 되려 전선을 밀어냈다는 뉴스 속보,
갑작스럽게 열린 게이트로부터 습격당한 도시를 지켜낸 홍보 영상,
거대 괴수가 처치되어 후방으로 이송되었다는 내용 등 다양한 화신들의 활약들.
그리고 정보가 알려진 성좌들을 정리한 자료까지.
가장 커다란 화면에서는 불꽃에 휘감기며 허공을 비행하는 강렬한 화신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내 눈에는 그것보다 강렬한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영상 속 화신에게 절을 올리고 있는 이하린.
경건하다 못해 비굴해 보일 수준으로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숨이 턱 막힌다.
이게 이하린의 잠재의식 속 욕망이라는 소리니까.
한예지의 첫 자각몽은 방과 후, 집에 돌아왔더니 누군가 자신을 맞이해 주는 소박한 욕망이었다.
부모 없이 장녀로 자랐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루어진 꿈.
그런데 이하린은 무의식 속에서도 화신의 영상에 절을 하고 있었다.
황송하다는 것처럼 고개도 들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이것이 자각몽 속이라도 이게 대체 무슨 욕망인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꿈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 지금, 나는 이하린의 자각몽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한예지가 자신의 자각몽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던 것과는 다르게.
그런데 이러면 대체 뭘 간섭해야 하는데?
화신의 활약이 담긴 동영상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상황에, 대체 뭘 간섭하고 뭘 건드려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
결국, 나는 이하린의 꿈속에서 다른 간섭은 하지 않고 그녀가 모아둔 화신들의 정보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상상 이상의 광경에 섣불리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자각몽에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첫날 두 번의 시도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시도에도 늘 이마를 박고 엎드린 이하린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방 안으로 간섭을 시도했다.
“성좌님, 드디어 오셨군요. 제가 너무 미숙했나요?”
그제야 내 발을 보더니 바닥에 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물어보는 그녀의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이 기괴한 방은 그녀가 자각몽을 다루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그냥, 이하린의 심상 세계가... 약간 스토커나 사생팬처럼 되어 있을 뿐.
그녀는 첫날부터 자각몽을 완벽히 다루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미숙하지 않았단다. 이곳은 너의 꿈.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보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할지 잘 몰라서 서재의 의자처럼 생긴 곳에 그대로 앉아 적당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성좌를 존경하다 못해 숭배하는 이하린답게 설정 오타쿠처럼 성좌들에 대한 정보를 왕창 모아놓은 서류.
질주하는 화염이나 인류 최후의 꽃 같은 화려한 이름부터 악랄한 복수극이나 악의 어린 숨결같이 악당 냄새 풀풀 나는 성좌들까지.
공부하듯 성좌들을 외워놨는지 세세한 권능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잔뜩 쓰여 있길래 그대로 서류를 읽어보았다.
이하린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걸 기다리면서.
“내, 내 마음대로...”
조금 이상한 방향이지만 자각몽을 첫날부터 제대로 다루고 있었으니 욕망대로 꿈을 다루는 법도 빠르게 익히지 않을까.
하지만 내 말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그녀가 조금씩 다가오더니 -
“...뭐 하는 거니?”
“너무 건방졌나요?”
그대로 내 앞에 다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이게 그, 도게자였던가?’
바닥에 웅크리듯 엎드리던 처음 자세와 달리, 엉덩이를 조금 들고 이마를 바닥에 박은 자세.
원하는 걸 하라고 했더니 그녀는 내 앞에 석고대죄를 올리고 있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걸 마음껏 해 보렴.”
건방지다니, 무슨 소리일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된 소통은 되지 않을 것 같아 반쯤 포기하고 뭐든 해 보라고 말을 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죄송해하는 녀석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원하는 걸 하라 하니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변한다.
그래, 도게자니 석고대죄 같은 거 말고... 그토록 갈망하던 성좌를 만났는데 하고 싶던 게 있을 거 아니야.
육체는 한예지와 아카데미 생도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몸이니까 건드릴 수도 있고.
반대로 호기심 때문에 성좌인 내게 뭐라도 물어볼 수 있지.
“뭐든, 뭐든지... 헤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헤벌쭉 웃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박는다.
그러던 엉덩이를 실룩대며 기어와서... 발등에, 입을 맞춘다.
‘...돌겠네 진짜.“
내 발등 위에 그녀의 입술이 닿는 순간, 세상이 산산조각이 난다.
한예지가 오르가즘을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이. 그래도 그때에는 손가락 장난이라도 쳤는데.
이하린은 내 발등에 입을 맞춘 것만으로 과도한 정신적 쾌감 때문에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음몽 속에서 섹스하면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