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화 : 화신, 이하린
화신과 성좌를 숭배한다. 평범한 인간과 화신은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차별주의자의 마음.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반 사람들을 평범함의 범주에 넣고, 화신과 성좌를 신성시할 뿐.
평범한 사상이라 하기에도 뒤틀렸다.
과격한 사상이라 하기에는 모자라다.
성적은 우수하고 독종으로 소문났지만 선천적인 체형 때문에 체력이 부족한 그녀.
그 때문에 계약까지 잠시 알아볼 시간은 있었다.
다른 성좌들이 여길 구경하더라도 50위권 안에 든 초엘리트들을 먼저 볼 테니까.
체력은 벌써 이쪽 대륙 기준 특급 전사를 달성하고, 지식도 어지간히 쌓아 올리는 진짜 천재들이 있는데
반쪽짜리 천재를 홀랑 훔쳐가지는 않겠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보고 있다고 도장이라도 찍어두는데.
화신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간다.
한예지의 것과는 미세하게 다른 새하얀 복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예지의 기억이 중요한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전시되어 있었다면 이하린의 기억은 깔끔하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화신과 성좌가 엮여 있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는데 이 정도면 집착 아닌가?
바닥에 나뒹구는 낡은 기억들을 내버려 두고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기억들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평범하게 잘 사는 가정, 적당히 화목한 부모, 말 잘듣는 아이.
이하린의 인생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등학생 무렵부터 사건 사고가 있긴 했지만 별 탈 없이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이하린은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니,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는 밖에서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서 매일 놀던 이하린의 앞에 나타난 괴물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10살, 놀이터에서 괴수를 목격하고 겁에 질렸으나 화신에 의해 구출된다.
12살, 등굣길에서 난동을 부리던 여자가 그녀를 노렸으나 화신에 의해 구출된다.
13살, 초등학교 졸업 기념 여행지가 타락한 화신들에게 습격당하나 무사히 구출된다.
15살, 16살, 18살, 20살... 이하린의 가족은 마가 낀 것처럼 불행한 사건에 계속해서 휘말린다.
보는 내가 긴장 될 정도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다치는 사람 하나 없이 무사히 빠져나온 그녀의 가족.
오히려 보상금을 받는 빈도가 너무 높아 보험 사기 의심을 받지만 이 또한 어느 화신과 성좌에 의해 혐의를 벗는다.
“정말, 화신님들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몰라.”
“그러게요. 운도 참 좋지.”
이하린의 부모님은 사건이 지나갈 때마다 별생각 없이 가볍게 말했지만, 어린 이하린은 그것을 깊게 받아들였다.
화신과 성좌가 없었다면 살아있을 수조차 없었을 거라고.
부모들의 10년에 걸친 사소한 언행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되어 그녀에게 깊게 새겨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온전히 성좌와 화신 덕분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성적이 잘 나온다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치안을 지켜준 화신 덕이다.
어머니의 회사가 잘 나가는 것은 성좌님이 보우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전업주부로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 또한 성좌님과 화신님이 구해주셨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입는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화목한 가정과 꽤 부유한 가정과 출세가 빠른 편의 어머니와 자상하신 아버지
그녀의 인생을 행복한 편에 속하게 해 준 모든 것.
그 모든 것은 오롯이 성좌께서 자비롭게 내려주신 것이다.
‘...제대로 미쳤는데?’
나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질릴 정도로 봤다.
인류의 멸망이 신의 뜻이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광신도, 종말론자 새끼들.
대지의 오염도 인간의 크리쳐 변이도 전부 신의 뜻이오, 자신들의 죄악이니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맨몸으로 지상으로 기어 올라가 크리처의 배를 불려준 미치광이들.
사상만 놓고 보면 오히려 이하린의 사상이 더 과격했다.
종말론자들은 아포칼립스 상황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맨몸으로 지상을 향하는 자살 희망자들이었다.
하지만 이하린은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숨 쉬고 나고 자라는 인생의 모든 것들이 성좌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아포칼립스가 닥친 세상도 아니고 그냥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생활 속에서 알음알음 미쳐가고 있었으니.
‘이걸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충성심 하나는 확실할 것 같은데.거기에 외모도 빼어난 편이다.
이쪽 세상 기준으로는 좀 작은 편이라 여자로서의 신체적 매력이 떨어지는 이하린이지만
내 눈에는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사상이 확실하니 전쟁터에 보냈더니 탈주 화신이 되는 일도 없어 보이고.
궁금한 게 있다면 저 격한 사상이다.
꿈에서 얼굴 맞대고 만나야 하는데,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도 나한테 나쁜 반응은 아니겠지?
※
처음 화신 계약서는 무료였지만 다음 계약서부터는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다행스럽게도 한예지가 진압반에 들어가 사소한 실적을 올려 매달 만 포인트 정도의 수입이 생겼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구매할 수 있긴 했다.
‘손이 벌벌 떨리네.’
한예지가 한 달에 만 포인트에서 만 오천 가량을 벌어오는데, 두 번째 계약서가 십만 포인트였다.
권능 하나 비싼 거 사려고 한예지의 아카데미 졸업부터 취직 활동까지 모아만 뒀던 포인트.
거의 1년간 모은 포인트가 클릭 한 번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울적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대로 가다간 심심해서 원룸 안을 게임기나 사치 물품으로 채우게 생겼는데.
반년 내내 원룸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정신 고문처럼 느껴졌으니까.
화신을 적당히 늘려서 저쪽 세상에 놀러 갈 방법을 찾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포인트를 소모해서 계약서를 구매하고 또 기도를 시작한 이하린을 마우스로 달칵 눌렀다.
클릭 두 번.
고작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1년간 알뜰하게 모아 둔 모든 포인트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 상실감도 잠시, 화면 속 이하린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뻐서 날뛰는 것도 아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서관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용하게-
“악, 씨발 뭐야! 소생기, 소생기!”
“의료 교관님 불럿!”
“이건 또 무슨 상황인데!?”
화면 속 그녀는 조용히, 손가락을 위로 뻗어 허공의 Y를 누르려던 자세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의자를 뒤엎으며 옆으로 자빠진 그녀의 마비된 팔이 옆 사람의 책상을 밀어버리면서.
“멀쩡하다가 왜 이래, 이거?”
“컨디션 조절을 잘못했나?”
“누, 눈 감겨 줘야 하지 않냐?”
“아이 씨발, 그건 고인한테 하는 거 아니야?”
기쁨의 외침도 최후의 단말마도 없이, 눈을 부릅뜬 상태로 뻣뻣하게 굳은 모습에 주변의 학생들이 슬금슬금 모여든다.
노력파 독종으로 소문이 나서 그런지 인망은 나쁘지 않나 보네.
저 멀리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후다닥 달려온다.
학생들도 나도 얼빠진 상태로 구경을 하고 있으니 단추를 뜯어내듯 상체를 벗긴다.
식스팩 대신 십일자 복근이 있는 잘록한 허리와 조금은 초라한 가슴이 드러난다.
“거기, 물러나! 소생기 작동시킨다, 하나, 둘, 셋!”
가슴 위와 옆구리에 전극을 붙이고 이것저것 바르더니 빠지직!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
“흐에엑-!”
“정신 차리고, 호흡 가다듬어!”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버둥거리며 깨어난 이하린과, 어깨를 누르며 말리는 보건 교관.
멀쩡하게 깨어나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비 피하는 개미처럼 우르르 흩어진다.
남은 것은 보건 교관과 이하린 두 명.
눈이 둥그렇게 되어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하린이 벌떡 일어나려 하자 교관이 막는다.
교관 처지에서는 기절해서 뒤로 자빠진 년 뇌가 위험할까 챙겨주는 모습이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이하린은 그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 눌러야, 눌러야 해요! 눌러야 하니까 팔 놔 이 개새끼야!”
아직 계약되지 않아 진정하라고 메시지도 보낼 수 없는 상황.
한예지는 저 먼 곳에서 월급 값을 하기 위해 순찰 중이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이런 미친년이 진짜! 가만히 있어, 머리 흔들려!”
처음에는 침착하던 의무 교관도, 바둥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이하린의 모습에 화가 났는지 그대로 팔목을 꺾어 제압한다.
역시 보건 교관이라도 교관답게 깔끔한 자세로.
“성, 성좌님이랑 계약해야한다고오- 놔아, 씨발!”
“어, 엉? 화신 계약 말하는 거냐?”
“빨리 놔 씨발!”
입에 거품도 닦지 못한 상태로, 인생의 원수를 쳐다보듯 노려 보는 이하린의 모습에 그제야 교관이 손을 놔 준다.
붙잡혀서 벌게진 팔뚝과 바닥을 뒹굴며 먼지투성이가 된 의복, 흐트러진 단발머리.
난리가 난 몸 상태를 정리조차 하지 않은 그녀가 후다닥 Y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당연히 기다려 줄 텐데, 왜 저리 급하지.
설마 다른 성좌들은 대답을 바로 안 하면 자존심 상해서 계약 취소를 해 버리나?
과거, 편의점의 한예지처럼 빛이 쭈욱 퍼져나간다. 도서관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모인다.
그리고 그 시선의 중심부에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이하린은 뻣뻣하게 굳어 있다 주륵 눈물을 흘린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몸은 좀 괜찮냐고 걱정합니다]
“가, 감샤합느의다아...”
눈물을 질질 흘리며 허공에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하린의 모습에, 보건 교관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조용히 사라진다.
교관 신분으로 학생에게 쌍욕을 먹고 몸싸움까지 했으니 징계를 내려도 정당한 대응 아닐까.
그러나 성좌와 화신의 계약을 방해했다는 생각이 있는지 아무 말 없이 도서관 밖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