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화 : 두 번째
별 것 없는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 나는 내 생각이 틀려먹었음을 겸허히 인정했다.
“존나 심심해...”
혼잣말을 뱉어 봐야 커다란 골드 리트래버, 아니 흰색이니까 화이트 리트래버라 해야 하나?
아무튼, 소환해 둔 커다란 개는 꼬리만 흔들고 있었다.
쟤가 갑자기 사람 말로 ‘나도 심심해’ 하고 대답하면 좀 더 악몽다워 지긴 하겠네.
“잘 돌아가렴.”
대답도 못 할 개에게 말을 걸며 돌려보낸다.
안 그래도 조용한 원룸이 한층 더 조용해진 기분.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이쪽 세상에 데려온 신적 존재가 대놓고 무기력한 놈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가.
멀쩡한 시계는 없어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굶어 죽기 직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진짜 죽을 것 같을 때 침대 근처에 있는 비상식량을 뜯어 먹는 삶.
체감상으로는 거의 하루에서 이틀 사이에 캔 하나를 먹고 조금씩 죽어가기만 했던 생활.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하루 한 캔은커녕 입이 심심할때마다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식량이 있다.
쇠 비린내 나는 물 대신 신선하고 차가운 음료수가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구매할 방법도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한예지 한 명만 집중적으로 마크하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잘못 짠 계획인 것이었다.
여기가 하루에 수 십 번씩 괴물이 침략해 올 정도로 끔찍한세상은 아니니까.
한예지가 예정보다 일찍, 연말에 취직했지만 이 무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순찰 코스를 돌아다니는 그녀지만 사건은 거의 일주일에서 한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두 번째 계약자를 찾기 위해서.
‘조건은 지난번이랑 비슷하게... 조금만 더 엄격하게 할까.’
계약자의 조건이야 처음과 비슷했다.
생활 양식이 조금 더 익숙한 동대륙
전쟁에 나갈지도 모르니까 20대 초반 언저리의 여성
그리고 보기 좋으라고 얼굴 좀 따지고.
거기서 조금 더 엄격해졌을 뿐.
한예지의 경우처럼 화신 될 사람과 꿈속에서 섹스할 확률이 거의 99%에 가깝다.
내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발정 상태인 게 아니라, 기초 포인트가 5배 차이 나니까.
거기에 사람의 공포를 읽을 수 있으니 싸움과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걸러낼 수 있다.
자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백날 골라봐야 심리적 이유로 아무것도 못 하면 얼마나 귀찮겠어.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확 거르고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화면을 돌렸다.
바로, 군사대학이다.
짧게 친 단발머리만 수백 명 있는 기숙사부터 반바지에 웃통을 까고 젖가슴을 덜렁대며 아침 구보를 하는 운동장까지.
강제 징집된 것도 아니니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
저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괴물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끼리의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군인이 하는 역할은 딱 하나다.
대륙 외곽에서 화신을 보조하는 역할.
내륙 쪽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 소속인 대테러 팀 소속 제압부대가 움직이는 모양새고.
이쪽 세상 법률과 관공서 편제는 잘 모르지만, 일단 한예지가 명함 들고 검색했을 때에는 그랬다.
바꿔 말하자면 이 군사대학에서 머리 짧게 치고 모인 사람들은 전부 엘리트에 속한다.
화신보다 엄격한 훈련을 스스로 받는 모든 학생들이 최전방 전쟁터에 나가 괴물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성좌와 화신에 대한 선망부터 괴수에 대한 증오심까지.
내륙에서 괴수에 의한 사망자가 개에 물리거나 벌에 쏘여 죽는 사람보다 적긴 해도 0명은 아니니까.
각오를 다진 사람들이니까 한예지처럼 전쟁에 나가는 심적 부담감에 짓눌려 악몽을 꾸지는 않겠지.
“이번 기수에는 계약자가 나올까?”
“모르지, 한동안 안 나왔잖아. 대놓고 뛰어난 애들은 입학하기도 전에 계약하니까.”
교관들이 담배를 피우며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면
전쟁터에 화신을 보내려는 성좌들도 자주 와서 계약하는 것 같고.
성적 우수생이 군사대학 졸업 전에 화신이 되는 것도 일종의 전통이란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다더니, 나 말고 다른 성좌들도 여기서 몇 명씩 뽑아 가는구나.
‘하긴, 대놓고 데려가기 편하긴 해.’
어차피 전쟁 최전선으로 가기를 희망하는데 하급 장교로 가느냐 화신으로 가느냐의 차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급 장교와 화신의 대우 차이는 천차만별.
심지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화신과 성좌에 대한, 호감을 넘어선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인이 되면 최전방으로 향해서 괴물과 싸우는 걸 알고, 사망률이 10%는 확실히 넘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성적이 우수하면 성좌님이 데려가는 전통이 있단다~’ 같은 말을 교관들이 흘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진짜, 화신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아카데미였네.”
화신 아카데미에서는 자기들끼리 몰래 연애도 하고, 조금 늦어도 벌칙이 없으니 주말에는 늦잠도 자고
외출 외박도 즐기는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봤는데 여기는 전혀 다르다.
외출증과 휴가증을 관물대에 곱게 쌓아두고 운동하는 사람이 흔한 동네.
‘이쯤 되면 무서운데?’
화면을 돌리며 구경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건물의 규모와 시설의 수준 등을 비교하자면 군사대학은 아카데미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 날 잡고 천천히 관찰하니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이게 인간 찬가라는 건가?
방구석에 숨어 죽는 날만 기다리던 나와 달리, 인류를 재건하기 위해 크리쳐로 변이해 가면서도 노력하던 사람들을 다시 보는 기분.
장교를 육성하는 사관 학교답게 문무겸비를 노리는 사람들.
기숙사 뒤편 분리수거장을 보면 손 떼로 지저분해진 낡은 노트가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었다.
체력 단련장에서는 분 단위, 초 단위를 측정하며 육체를 단련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서관에서는 괴수에 대한 논문까지 뽑아서 자습하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대학 내부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업이 끝난 오후의 훈련 교관들.
‘이러니까 여기서 데려가지...’
외모로 엄격하게 거른다 해도 계약할 만한 사람이 수 백 명은 될 법한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니까 한예지가 계약할 때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지.
성좌들 편하라고 사람들을 모아 둔 수준인데.
이제 제압팀 신입으로 출근을 한 한예지와 저기 군사대학 1학년이랑 1:1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니 말 다 했지.
물론 몇 년이 지나고 포인트를 모아 권능이 개화되면 한예지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이 되겠지만,
지금의 모습만 비교하면 군사대학 1학년생들이 아카데미의 어지간한 생도들을 때려눕힐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윈도쇼핑을 하는 기분으로 군사대학을 둘러보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자른 지 조금 되었는제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의 여성.
신체적으로 우락부락해서 눈에 띄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조금 왜소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신체적 특성이 아니라 하는 행동.
‘기도?’
초 단위로 근육량을 체크하는 헬창들 사이에서, 그녀는 꼬박꼬박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꼬박꼬박.
호기심이 생겨 하루를 꼬박 관찰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나서, 식사 전에, 식사가 끝나고,
수업 시작 직전에,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 수업이 끝나는 벨 소리에,
운동하기 전에, 운동 루틴 사이의 짧은 시간에, 자기 전에-
성좌의 존재로 종교계가 힘을 못 쓰는 세상에서 뭔 놈의 기도를 그리 독실하게 하는지.
성좌가 아닌 신을 섬기는 종교는 마이너한 오타쿠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그녀는 거의 한 시간마다 기도를 올린다.
낡은 팔찌를 손에 꼭 쥐고.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성좌님, 오늘도 제가-”
그녀는 신이 아니라 성좌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특정 성좌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좌’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
성좌와 화신에게 호의를 가진 수준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올리는 기도.
그녀는 일종의 차별주의자였다.
자신을 밑바닥에 깔아 놔서 그렇지.
화신이 아닌 화신 우월주의자.
그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군사대학에 들어온 이유도 화신 계약률이 가장 높은 집단이어서 그렇단다.
머리가 좋아 성적은 잘 나오지만, 체력은 간당간당하게 특급 전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
그 때문에 교관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수준의 광신도였다.
체력도 안 좋은데 성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아득바득 따라오는 독종이라고.
군사대학에 독종이라 불리는 사람은 많았다.
인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 대신, 괴수를 죽인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괴수에게 잃은 복수자들이다.
하지만 그녀, 이하린은 달랐다.
그녀는 순수하게 화신이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화신이 되면 얻게 될 막대한 혜택과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성좌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신이 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짧은 기도를 끝마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그녀의 순수한 집착을 알 수 있었다.
이하린의 악몽은 성좌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