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화 : 사치
지하실에 숨어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하루의 20시간은 침대에 누워 있던 나의 삶.
그렇기에 잠이 없는 삶은 참으로 신선한 것이었다.
바깥 세상에 해가 떠 있는 동안 원룸에서 목록을 정리하고 한예지를 도울 방법을 찾으며 남매의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본다.
그러다 해가 지면 한예지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녀와 어울린다.
음탕하게 뒤엉킬 때도 있고,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휴식을 취할 때 도 있었다.
그러다 자각몽이 끝나면, 다시 원룸에서의 아침이 밝아온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조금 쉬고 싶어졌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낮잠을 자지 않더라도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름 피우고 싶어. 목록을 백 날 들여다 봐도 포인트가 늘어날 리 없으니 한 번 정한 목록은 딱히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의미 없는 노가다야 말로 가장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고 남은 시간 내내 한예지를 관찰한다면 그녀도 좀 불편할 것 같은데.
제압대에 들어가서 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집 안 소파에서 뒹굴다 동생이랑 말다툼이나 잠깐 하는 모습을 24시간 내내 관찰해서 뭐 하겠는가.
목욕을 하거나 화장실에 들리는 모습까지 계속 지켜 볼 정도로 관음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룸 침대에 누워 밍기적대며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사실 남동생 때문에 눈이 조금 피로해서 그렇지만.
털털한 여자가 속옷 차림으로 대충 자취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지.
누구 좋으라고 내가 화장하고 아이돌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연예인 이야기로 꺅꺅 통화하는 남학생을 지켜봐야 하냐고.
나는 침대에 누워서 나른하게 졸고, 화면 너머의 한예지는 소파에 드러누워 인터넷 방송을 보며 졸고 있었다.
또 그때 그 방송이네.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한예지는 엇비슷한 게임 방송만 계속 보고 있다.
...게임 할 시간조차 없어서 자투리 시간에 방송만 봤다는 사실을 아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다른 방송은 보지도 않고, 여학생답게 게임 방송을 즐겨 보는 그녀.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게임 취향이 생각보다 폭이 넓다는 것이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신중하게 총을 쏘는 리얼리티 중시 FPS부터
작은 화면으로 보니 토할 것 같은 빠른 속도의 대전 게임까지.
거기에 지금 보는 것처럼 공포 게임이나 퍼즐 게임에 아기자기한 캐주얼 게임까지 안 보는 게 없었다.
‘일단 악몽은 조졌네.’
하는 게임은 없으면서, 보는 게임은 벌써 수백을 넘었다.
온라인으로 유명한 게임부터 싱글 패키지 게임까지.
기억하라 하면 못 하겠지만 한예지의 무의식 속에는 저것들이 대부분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유두 빔을 쏘는 근육 양 갈래머리 소녀보다 끔찍한 놈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대흉근을 생각하니 기분이 괜히 나빠졌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방구석에만 있지 말고 외출 좀 하라고 조언합니다]
“성좌님? 그, 저는 집에 있는 게 가장 편하게 쉬는 건데요.”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반년 동안 외출도 안 하고 침대에만 있을 거냐고 묻습니다]
“...아뇨, 그건 아니죠.”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오락실이라도 가 보라고 조언합니다]
그래서 소파에 옆구리를 착 붙이고 스마트폰과 삼위일체가 되어가던 한예지를 밖으로 쫓아낸다.
차라리 오락실이나 PC방을 가서 게임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니까.
대중적인 게임을 하면 좀 덜 징그러운 놈들이 나오지 않을까.
설마 한예지가 사람들 잔뜩 있는 PC방 같은 곳에서 끈 비키니만 입은 헬창 근육녀들 게임을 하겠냐고.
작게 투덜거리던 한예지가 가벼운 옷차림을 챙겨 입고 지갑을 챙긴다.
제복과 체육복을 입고 1년 내내 생활하던 게 답답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습관이어서 그런지 집에서는 속옷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더니.
졸업하고 집에 온 다음부터 지금까지 반바지 말고 뭘 걸친 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남동생이 옷 좀 입고 살라고 잔소리를 하지.
나야 반바지에 브래지어만 입은 모양새도 보기 좋으니 내버려 두었지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집 근처를 소개받고 싶다고 부탁합니다]
“음, 제가 어딜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서요. 있어 봤자 저 다니던 학교랑, 좋아하던 분식집이랑,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밖에 없는데.”
헐렁한 반바지에 목이 늘어날락 말랑 한 티셔츠, 거기에 슬리퍼를 챙겨 신은 한예지가 현관을 박차고 밖으로 나간다.
햇볕이 가장 뜨거워질 점심시간이지만 성좌가 나가라는데 화신이 까야지 뭐.
“생각해보니 여기도 되게 오래간만에 와 보네요. 외출증 끊고 나왔을 때도 집에서만 놀아서...”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햇볕 좀 쬐라고 조언합니다]
“햇빛은 아카데미에서 질릴 정도로 쬔 것 같아요...”
사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심을 듬뿍 담은 잔소리를 보내주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조금 심심했거든.
슬슬 포인트에 여유가 생기면 자투리 100포인트 이하에서 게임기 같은 오락거리를 구매해야 하나 고민도 되고.
물론, 소모품이나 기성 제품이 아닌 것들은 대부분 천 단위로 계산이 되기 때문에
애매하게 십, 백 단위로 자투리 포인트 남는 게 싫어서 계속 미루고 있긴 하다.
그렇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니 초여름의 햇빛 아래에서 한예지가 골목의 낡은 분식집으로 쏙 들어간다.
테이블 네 개에, 의자 열 개 남짓 있는 자그마한 분식집.
테이블의 간격이 1m는커녕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붙어 있는 모양새.
‘이 정도면 분식집이 아니라 쪽방인데.’
“아저씨, 저 왔어요.”
“어유, 오랜만이네. 요즘 왜 이리 뜸했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의 남성이 일회용 비닐장갑을 갈아 끼우며 말을 건다.
주고받는 대화가 퍽 익숙한지 대화에 망설임이 없었다.
같이 수업 듣는 생도들에게 말을 걸 때 몇 번이고 망설이던 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단골인지 짐작이 간다.
“라볶이에 김밥 한 줄 주세요.”
“그래, 매운맛?”
“어... 오늘은 짜장 맛으로요.”
끈적해 보이는 테이블을 정수기에서 떠온 물과 티슈로 닦아내는 한예지의 모습이 익숙하다 못해 제집처럼 느껴진다.
낡은 테이블, 금 간 수저통, 손으로 쓴 메뉴판.
5분도 채 되지 않아 널찍한 그릇에 담긴 라볶이와 빵빵해서 터질 것 같은 참치 마요 김밥이 식탁 위에 올라온다.
“잘 먹었습니다.”
“참, 늘 빨리 먹네. 그거 몸에 안 좋아.”
“맛있으니까 빨리 먹죠.”
한창때의 여자애라서 그런 걸까.
김밥에 라볶이를 먹는 데 10분도 쓰지 않은 한예지가 골목 밖으로 나온다.
무슨 놈의 식사를 저리 빠르게 하는지, 내가 렌지에 넣은 냉동식품이 데워지기도 전에 식사를 끝마쳐버리네.
“어, 이제 어디로 갈까요?”
하지만 자신 있게 들어간 분식집이 외출 코스의 끝이었는지, 한예지는 골목 끝자락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분식점, 편의점, 학교, 집만 오가는 생활이라니.
PC방으로 보내려 해도, 하는 게임이 없었다.
오락실? PC 게임도 안 하는데 리듬 게임이나 격투 게임 같은 걸 하겠는가.
지원금과 모아둔 돈으로 쇼핑이라도 시킬까 했지만 사고 싶은 것도 없단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정말 필요한 게 없냐고 묻습니다]
“네... 뭐, 여름옷도 몇 벌씩 있고. 운동화도 바꾼 지 1년 안 되었고, 슬리퍼랑 샌들도 멀쩡하고...”
눈으로 보기에는 여고생인데 뭐 좀 사라고 하면 나오는 말이 슬리퍼에다 후드티였다.
그러고 보니 옷장에 멋 부리기 용은 하나도 없고 회색 검은색 후드티만 잔뜩 있었지. 딱 패션에 관심 없는 남자랑 똑같다.
화장도 안 하고, 씻을 때는 남동생이 사온 클렌징폼 쓰고, 로션도 보디로션을 대충 바르는 식.
머리카락이 조금 길지만, 머리끈이나 핀 같은 액세서리 따위 없이
그냥 검은 머리끈으로 대충 묶고 다니거나 아예 풀고 다니는 형태.
‘와... 돈을 쓰라 해도 쓸 곳이 없네.’
이렇게 직접 외출을 시켜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얘는 돈을 주고 쓰라고 시키면 인터넷 방송에 도네이션이나 하지 않을까.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뭔가 답답했다.
한 번에 떼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하며 2년간 모아둔 돈을 써도 되는 상황.
내가 한예지에게 푹 쉬라고 조언한 것은 맛있는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고 펑펑 놀라는 뜻이었다.
내가 돈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원 빵빵한 국가 기관에 20살 되자마자 취직할 예정 아닌가.
그토록 대우받는 화신이 옷값 10만 원을 아끼는 것도 우습고.
뭐... 살 게 없다는 데 내가 강매를 시킬 수도 없고.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갈 곳이 없다면 집에 돌아가서 쉬라고 말합니다]
이걸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검소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복잡한 마음으로 채팅을 보내니 한예지의 표정이 확 살아난다.
밖에 나가라 한 게 그렇게 싫었니...
분식집에서 골목 끝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던 그녀가 가볍디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듯이 걷는다.
왔던 길이 아닌 걸 봐선 다른 곳에 들리려는 건가.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니 편의점이 나타난다.
한예지가 아르바이트하다 나와 계약을 했던 그곳.
그렇게 한예지의 첫 사치는 분식집 라볶이 세트 1인분에 감자 칩 한 봉지, 한 캔의 콜라로 끝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