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화 : 휴식
나는 한예지가 푹 쉬면서 좋은 것, 예쁜 것만 보며 정신 관리를 하기 원했다.
신장 2m를 넘어가는, 가슴 대신 대흉근에서 붉은 레이저를 발사해 사람을 추적하는 근육 괴물?
그런 끔찍한 존재 말고 좀 힐링 되는 걸 보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취향상 이미 늦어버린 것 같네.
첫 번째 악몽의 편린은 무사히 회수했고, 두 번째 악몽의 편린은 첫 번째 퍼즐도 풀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런데 세 번째 악몽의 편린은 눈만 마주쳐도 내가 포기할 것 같은데.
어디다 쓰는지 몰라서 미뤄 둔 악몽의 편린 수집을 아예 그만두고 싶다는 욕심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우리 집에 누워 있는데 뭔가 어색해요.”
[무기력한 악몽이 목록 두 번째 페이지 세 번째 드라마를 요구합니다]
“네, 그러면 이쪽에 틀어드릴게요.”
제복을 대충 벗어 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던 한예지가 리모컨을 집어 든다.
나는 그녀가 적어도 반년간 푹 쉬기를 바랐고, 그녀도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 중독자도 아니고 집안이 찢어져라 가난한 것도 아니니까.
화신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사치를 부리는 게 아니라면 두 명이 먹고살 돈은 된다.
때문에 반년간의 시간을 가족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푹 쉬라는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화신이 되기 전에는 대학 등록금이나 동생을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뛰었지만, 지금은 지원금이 빵빵하게 나오니까.
국가 유공자인 두 부모님의 보험금, 거기에 본인이 화신이 된 것까지 합치면 어지간한 회사원 월급만큼은 나온다고 한다.
네 가족 중 두 명이 화신이고 두 명이 죽어서 그런 거지만.
TV 속에서는 뻔하디뻔한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자신을 평범하다고 주장하는 꽃미남 주인공과 그 주변을 가득 채운 온갖 미녀들.
성별만 반전된 한국식 막장 드라마였다.
평범한 중산층이라면서 2층짜리 개인 저택에 사는 모양새와
재벌 2세인 미녀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너무 익숙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
화신인 시아버지가 염동력으로 남주인공 얼굴에 커피를 뿌리는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으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나, 나 왔어... 아, 옷 좀 입고 다녀!”
“야, 넌 누나가 1년간 고생하다 집에 왔는데 오자마자 잔소리냐?”
“그럼 양말이라도 제대로 벗어 두던가!”
책가방을 메고 후다닥 뛰쳐 들어온 한예지의 남동생은 속옷 차림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보고 소리를 꽥 지른다.
1년 전, 아픈 몸 때문에 행동도 느릿하고 목소리도 자그맣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
점차 건강해지고 활발해지는 남동생의 모습은 한예지가 더욱 뼈저리게 실감했는지 실실 웃으며 그대로 소파에서 등을 돌린다.
브래지어의 후크와 팬티 사이로 늘씬하게 빠진 매끈한 등허리가 보인다.
“으, 뭐 자랑할 게 있다고 벗고 다니는 거야.”
“자랑하려고 벗었겠냐?”
물론, 그 늘씬한 몸매에 대한 반응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남매간의 혐오감으로 돌아왔을 뿐.
옳게 된 남매란 이런 것이라고 주장하듯 두 사람은 투덜대며 계속 말싸움을 이어갔다.
소파에 드러누운 한예지는 버티겠다는 것처럼 계속 누워 있었고, 잔소리하던 남동생이 거실에 널브러진 제복을 주워든다.
누나를 배려하는 것은 아니고, 호기심 때문인지 더러운 걸 집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고 쭉 펼쳐본다.
“으휴, 이런 푼수가 화신이라니. 핸드폰이랑 TV 동시에 켜놓고 백수마냥.”
“TV 끄지 마, 성좌님 보시는 거야.”
“성좌님이? 이걸?”
투닥대는 남매 뒤로 남자 때문에 집안 말아먹게 생겼다며 싸우는 여주인공과 그녀 아버지의 모습이 방송된다.
이쪽 세상에서도 막장으로 유명한 드라마여서 그런지 리모컨을 들고 멈춰버린 남동생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진다.
나도 작품성 때문에 보는 게 아니라, 한예지가 보던 인터넷에서 움짤을 보고 궁금해서 튼 건데.
염동력을 이용한 스테이크 싸대기와 그걸 방어막으로 막아내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궁금해하지 않을까.
화신이 얻는 권능에는 특이한 것도 많지만 내가 아는 기본적인 초능력이나 마법도 잔뜩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드라마가 참 신기하게 다가온다.
남녀의 반전이야 배우의 배역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현대 배경의 로맨스 드라마에서 대놓고 초능력을 쓰고 있으니까.
지각할 것 같다고 택시에서 내려 날아가는 하이틴 드라마 주인공이라니?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이야.
물론 길거리를 봐도 가끔 권능을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렇게 대놓고 쓰지는 않는다.
성좌와 화신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거의 우상 숭배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대접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 써먹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이 드라마가 막장으로 유명한 것도 쓸데없는 곳에 화신의 능력을 써먹는다고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성좌님께서 내려주신 권능을 고작 방송의 소재 따위로 써도 되냐고 묻는 의견과
정작 성좌님들은 즐기셨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오히려 드라마의 시청률을 올려 주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권능은 상관없고 다른 성좌들도 스테이크 싸대기가 궁금해서 본 게 아닐까 싶었다.
막장 드라마로 유명한 한국 출신인 나도 궁금해서 드라마를 틀게 했으니까.
판타지 세상이나 무협지 세상 같은 드라마가 뭔지 모르는 성좌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뭐 어때, 다른 성좌님들도 이 드라마 재밌게 보셨다던데. 남자애들한테 인기 있지 않아?”
“남자애들이 아니라 아저씨들한테 인기 있겠지. 고등학생 중에 막장 드라마 씹는 거 좋아하는 애가 얼마나 된다고. 대가리 좀 치워봐 진짜.”
“그러면서 넌 왜 보냐?”
“성좌님도 보신다며. 나도 궁금하니까 같이 보는 거지.”
자극적인 장면이 지나가고 싸구려 신파극이 시작된 드라마에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소파에 드러누워 버틸 생각이 가득한 한예지와 밀어내려는 남동생의 싸움.
그러는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
자그마한 액정 속에서는 어제 그 게이머가 비명을 지르며 새로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저런 방송을...’
공포 게임 전문 방송인이라니.
아르바이트와 공부 사이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한예지가 볼 법한 내용이긴 했다.
그게 나를 귀찮게 할까 걱정이 돼서 그렇지. 오늘은 조금 평범한 공포 게임인지 기괴한 헬창녀들은 없어서 다행이라 봐야 하나.
생각해보니 이미 볼 만큼 본 것 같은데 달라질 게 있나?
유두에서 레이저를 쏘는 2m 근육질 양 갈래머리 소녀보다 끔찍한 존재가 있긴 할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남매 사이의 우애가 보기 좋다고 전합니다]
“와, 진짜 성좌님이 보시고 있네.”
“그럼 내가 가짜 화신이 되었겠냐?”
나는 한예지의 방송 취향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매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
서로를 죽이도록 DNA 레벨부터 조정된 것이 나이 차이 없는 남매라 했던가.
여동생이랑 푸닥거리 한바탕 했던 놈이 맨날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못난 사람 없이 잘나기만 한 이쪽 남매에게도 통하는 말이기도 했고.
장녀인 한예지는 이쪽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우러러보는 화신이며,
계약 전에도 부모 없이 장녀의 몸으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해내는 든든한 소녀 가장이었다.
공부를 대륙 1위니 전교 1등 하는 수준으로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 치고는 꽤 상위권 모범생이었지.
아직 이름도 모르는 남동생은 아픈 기색이 사라지자 꽤 잘생긴 미남이 되었다.
한예지도 외모가 빼어난 편인 만큼, 남매가 쌍으로 미남미녀인 것이다.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걸 봐선 제 누나와 달리 꽤 인싸인 것처럼 보이고.
동생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노는 것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한 장녀와
그런 장녀를 돕기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집안일을 했던 남동생.
우애가 깊고 서로가 고생하는 것을 알며 그 점을 서로가 똑똑히 알고 있지만-
“야, 미쳤다고 닭 다리를 두 개 연속으로 처먹냐?”
“야? 이게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고생하다 왔는데 좀 먹을 수도 있지.”
“화신 아카데미 식당 수준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데 고생 같은 소리를 해?”
그렇다고 해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출출해져서 냉장고의 냉동식품을 렌지에 데우는 동안 저녁으로 시킨 치킨 때문에 벌써 식탁에서 싸우고 있었으니까.
품에 안겨 어리광만 부리고, 뭘 시켜도 헤실헤실 웃던 소녀가
닭 다리를 쥐고 목소리를 높이는 꼴을 보니 어째 소녀도 아니고 그냥 애 같아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평화로운 풍경이니 상관없나.
“아, 누나. 학교에 누나 화신 된 거 소문 쫙 났는데... 뭐 권능 받은 거 있어?”
“권능? 있긴 한데... 남한테 보여주기는 조금 어려워서.”
“뭔데?”
닭 다리를 둔 남매의 전쟁이 끝나고, 남은 치킨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권능 자랑이라... 하긴 학생들한테 친구 누나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은 흥미롭기 그지없겠지.
그런데 보여 줄 권능이 있나?
달콤한 자각몽을 시작으로, 내가 한예지에게 챙겨준 권능 대부분은 사격과 관련된 것들이다.
시력을 올려 주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격 보조를 해 주는 권능.
꿈과 관련이 없어 할인받지 못하고 만 포인트 단위로 구매하느라 그 두 개밖에 없는데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재능과 권능인 만큼 보여 줄 수 방법이 없지.
“무기력한 악몽 님이잖아. 꿈 관련된 거랑 사격 관련돼서 눈 좋아진 것밖에 없어. 그걸 무슨 수로 보여줘. 부탁하면 악몽을 꾸게 할 수는 있는데? 오늘 밤에 악몽 한 번 꿔볼래?”
“그걸 꾸겠냐? 나도 조금 궁금하긴 했는데 아쉽네.”
투닥대는 모습이 딱 그 나이의 학생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포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