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화 : 졸업식
흰 마네킹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한예지와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 학점만 따면 될 줄 알았더니.”
“실습 함 쎄게 한다고 쳐야죠 뭐.”
두 세 명씩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저마다 투덜거리면서도 긴장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예지도 마찬가지. 이쪽은 좀 더 심한지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방패를 등에 멘 여자가 앞장서고, 그 뒤를 한예지와 다른 남자 하나가 뒤따른다.
다른 사람들도 엇비슷하게 방패 든 사람 한 명에 곤봉, 마취총을 든 사람이 뒤따라가는 모양새.
사격장처럼 가만히 서서 쏘는 것도 아니었고, 혼자서 교관의 조언을 들으며 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의 도시 모습을 그대로 베껴온 거대한 세트장에서 실행되는 졸업 시험.
정확히는 마지막 학점을 위한 시험이었다.
그 때문일까? 한예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서는 턱이 아릴 정도로 이를 꽉 물고 있는 게 보인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한예지에게 긴장을 푸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네, 네...”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하긴, 긴장 풀라는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면 누가 수능 같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겠는가.
마네킹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세 사람이 걷는다.
마지막 학점을 위한 졸업 시험은 화신들의 희망 진로에 따라 바뀐다.
최전선으로 나갈 생도라면 마네킹의 도시가 아니라 황무지에서 몰려드는 괴수 군단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시험이 쉽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한예지의 시험 또한 다양한 제약이 걸려 있었으니까.
일정 범위 이상을 순찰할 것, 민간인의 피해가 없도록 할 것, 과잉 진압을 하지 말 것, 일정 시간 동안 한 장소에서 머무르지 말 것 등등.
3명씩 묶여서 대략 서른 팀.
약 100여 명의 사람이 흩어져 돌아다녀도 잘 마주치지 않는 거대한 도시 모형 속 어느 곳에서 고함과 전투의 소음이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한예지를 비롯한 모든 팀원이 흠칫거리며 어깨를 움찔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간 아카데미에서 뽈뽈 돌아다니는 한예지를 구경할 때, 남의 졸업 시험을 구경한 적도 많으니까.
성좌가 화신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졸업 시험조차 검은 안개로 가리지 않은 상태.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새하얀 마네킹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네, 네...? 하얀색이요?”
“음? 성좌 님이 정보를 주셨나요?”
“예, 하얀 마네킹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방패를 든 여성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고, 한예지가 답한다.
그러는 와중 허리춤의 테이저건을 꺼내 든 남자 화신이 크게 소리친다.
“11시 방향 가로등 아래, 흉기 소지 확인!”
방패녀와 한예지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플라스틱 총에서 발사된 두 개의 바늘은 마네킹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품속에서 식칼을 꺼내 휘두르려던 마네킹은 팔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몸을 달달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방패녀가 땅을 박차고 돌격해 마네킹을 자빠트리고 팔목과 발목을 묶어버린다.
바닥을 뒹구는 새하얀 식칼과 덜덜 떨며 제압당한 새하얀 마네킹.
이번 시험에서 그들이 제압해야 하는 것은 사격 훈련의 적군이던 검은색 마네킹이 아니다.
새하얀 마네킹 사이에 숨어 있는 미친 마네킹들을 분간해야 한다.
타락한 화신들이 이름표를 써붙이지 않고 다니는 것처럼.
“아, 이래서...”
“성좌님이 좋은 정보 주셨네요. 어쩐지 선배란 새끼들이입을 안 열더라니.”
180cm의 건장한 마네킹을 한 손으로 생선 뒤집듯 뒤집어버린 방패녀가 중얼거린다.
사격술이니 체포술이니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과목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훈련용 마네킹은 검은색이 제압 목표라는 것.
그제야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서 들리는 이 고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좌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지, 방심이라도 했다가 흰색 마네킹이 바로 옆 마네킹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겠지.
“일단 움직이죠. 좀만 더 있으면 점수 깎이겠네.”
“시간제한 이거, 제압도 빨리하라는 뜻이겠죠? 시간이 생각보다 빡빡하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세 사람이 다시 무기를 집어넣고 거리를 걷는다.
모르고 당하는 첫 번째 감점이 아니라면 시험에서 탈락할 이유가 없으니까
※
허공으로 치솟는 학사모, 뿌려지는 꽃가루, 번쩍이는 카메라 세례와 웅성거리는 환영 인파.
이런 건 당연히 없었다.
월초마다 수백 명이 입학하고, 월말마다 수백 명이 졸업하는 대륙 유일의 화신 교육기관이다.
어느 세월에 입학과 졸업을 전부 축하하고 있겠는가.
다만 노트북 같은 보급품을 반납하고 외출증 비슷하게 생긴 졸업증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와... 제가 진짜 아카데미 졸업을 했어요!”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화신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통과까지 2개월을 넘긴 과목이 없어 정확히 1년 만에 졸업한 한예지가 손안의 졸업증을 붕붕 휘두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카드, 굳이 따지자면 주민등록증 겸 화신 인증서 겸 아카데미 졸업증인 물건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생도복과는 조금 디자인이 다른 졸업한 화신의 제복을 차려입고 졸업증을 휘두르는 그녀에게 시선이 모인다.
아무리 재능이 넘치는 영혼들이라 해도 아카데미 졸업에 대한 부담감은 가지고 있을 테니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너무 성급해 하지 말 것을 조언합니다]
“성급하다뇨? 아... 알겠어요. 저도 조금 쉬고 싶긴 하니까.”
이제 저 멀리 다가오는 유람선을 타고동대륙으로 향하면 한예지는 아카데미 생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화신으로 취급을 받는다.
사회적으로 많은 배려를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된 만큼, 수많은 사항이 옥죄이는 화신이.
‘솔직히 좀 그래...’
정확히 1년이 지났으니 한예지는 고등학교 3학년, 19살이다.
스물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
냉장고에서 레몬 탄산을 한 캔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지만 목구멍만 따갑지 속이 시원해지진 않는다.
한예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커다란 키에 걸맞은 성숙한 몸매와 의젓한 행동, 거기에 화신용 제복까지 더해지면 어엿한 어른처럼 보이는한예지.
하지만 그녀의 정신이 얼마나 어리고 여린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시험에 떨어질까 무서워 손을 달달 떨며 성좌와의 계약이 해제될까 악몽을 꾸고,
기대에 못 미칠까 봐 홀로 겁을 집어먹고 망상까지 하는 소녀를 곧바로 포인트 벌이에 밀어 넣어야 할까?
“딱히 급한 것도 없지...?”
빈 캔을 구석에 던져 넣으며 중얼거린다.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속삭임이다.
멸망한 세상에서 수십 년을 보내왔기에, 나는 어릴 적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매달 오천 포인트씩 벌리는 것으로 기본적인 권능 몇 가지는 구매한 상태.
만 포인트 이하의 것들이지만 효과적인 녀석들로 구매했다.
그러니 급할 것은 없겠지.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가족과의 시간을 보낼 것을 당부합니다]
“네, 그럴게요. 성좌님.”
한예지는 어디의 전투 민족도 아니고, 총을 빵빵 쏴 재끼며 ‘으하하 다 죽어라!’ 하고 소리치는 정신병자도 아니다.
굳이 19살짜리를 곧바로 일하라고 내보낼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당장 나부터가 죽을 생각으로 지하 쉘터 독방에 처박혀서 겨울잠 자듯 처박혀 있었는데.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직접적인 삶의 위협이 없다면 게으름은 훌륭한 사치가 된다.
기억의 끝자락,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부모 없는 소녀 가장으로 살아온 한예지와는 거리가 먼 사치.
지원금이 있다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공부와 알바로 인생을 가득 채워서 살아온 그녀였다.
성좌가 시키는 대로 고작 1년 논다고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1년 꽉 채워서 노는 것도 아니고, 반년 정도 푹 쉬고 스무 살 되면 그때부터 화신으로 활약하면 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하는 동안 항구에 도착한 한예지가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 그녀는 즐겨 보던 개인 방송인의 게임 실황을-
“아니 씨발, 뭐 저딴 게임이 있어.”
곧바로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이미 늦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그런 흉한 방송을 보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성좌님? 어, 왜 그러세요?”
화면 속에서는 폴리곤으로 대충 만든 캐릭터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단백질 보충제를 훔쳐가려는 좀도둑 플레이어와 그 좀도둑을 사냥하려는 근육질의 헬창 NPC들이.
마이크로 비키니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대흉근에 매직으로 선 하나만 그어둔 근육녀들이 유두에서 붉은빛을 발광하며 쫓아오는 싸구려 코믹 공포 게임.
여성 방송인이 더러운 젖가슴 덜렁대지 말라고 하이톤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만, 실력이 미숙해서곧바로 게임 오버를 당한다.
그 모습을 보니, 한 가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악몽에 나오겠네, 씨발...’
저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라면 한예지의 무의식 속에 100% 남아 있을 거라고.
키가 2m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인간.
식스팩이 아니라 에잇 팩이 드러난 복근과수분 한 방울 없이 쭉 빠져 쭈글쭈글한 옆구리.
팔뚝이 아니라 허벅지 같은 비대한 양팔과 여자 가슴인지 스테로이드 맞은 남자 가슴인지 분간 안 되는 대흉근까지.
그 와중에 여자 캐릭터랍시고 예쁘게 땋은 양 갈래머리를 허벅지만 한 팔뚝과 함께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라니.
차라리 녹슬어서 움직이지 않는 파이프를 맨손으로 돌리고 말지.
악몽의 편린, 진짜 모으기 싫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