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 : 발전
흰 털을 가진 커다란 대형견과 부다다닥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
간단한 분장을 한 늙은 광대와 우스꽝스러운 복면을 쓴 살인마
그리고 손가락보다 가는 비키니를 입은 동성애 포르노 스타.
‘이걸 어디다 써.’
당장 환몽비약 복용도 생각 못 한 내가,
창의력을 발휘해 저걸로 뭔가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현실의 한예지 주변으로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뭔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고.
개를 풀면 한예지가 무서워하고, 광대나 살인마를 잠깐 보여준다고 사격 실력이 올라가겠는가.
그냥 익숙해질 수록 소환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느껴져 자주 소환만 할 뿐.
물론 이 자그마한 원룸에 가면 쓴 살인마나
늙고 꾀죄죄한 광대를 소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바퀴벌레를 소환하는 취미도 없었고.
오직 새하얀 대형견과 눈요깃거리가 되는 포르노 스타를 소환하며 점점 소환 시간을 늘렸다.
첫 소환에는 손바닥만 한 치와와를 3초 정도 소환하는 게 끝이었다.
거기에서 점점 늘어 대형견을 1시간 정도, 포르노 스타를 20분 정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질량에 비례하는 걸까?
그렇다면 바퀴벌레는 거의 24시간 소환할 수 있겠네.
지금까지 딱 한 번, 한예지가 첫 번째 화신이란 것을 질투해서
뒤에서 험담하던 녀석을 골리려고 소환하긴 했지.
24시간은커녕 5분, 그것도 반으로 잘린 바퀴벌레를 식판에 소환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소환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솔직히 바퀴벌레 소환해 놓고 24시간을 잴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소환만 연습하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매달 들어오는 포인트가 1,000pt에서 5,000pt로
확실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좀 더 많은 기초 권능을 구매할 수 있었으니까.
꿈 풀이 비법서를 구매할 때 고민했었던 업그레이드와 악몽 다루기를 구매한 상황.
역시나 1만 포인트 이하의 것들이라 그런지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목록에 검색과 분류 기능이 생겼고, 다른 사람의 악몽을 좀 더 오래 소환할 수 있게 되긴 했다.
초 단위에서 분 단위로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때문이니까.
얻은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슬슬 한예지도 고딩 알바생 티를 벗어 던지고
제식 각이 잡힌 숙련된 저격수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겉으로만.
“그래, 수고했다.”
“성좌님...”
거의 반년 넘게 몽마의 능력을 수련하느라
한예지의 꿈속에 난입해서 해 달라는 것을 전부 들어준 탓일까,
어째 날이 갈수록 응석 부리는 수준을 넘어 의존하는 기분이 드는데.
시험 대부분을 2, 3개월 안에 통과했기 때문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한예지의 일과는 언제나 규칙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풀고 오전에는 사격술 오후에는 범죄자 제압을 위한 근접 격투술 훈련.
그 때문에 여태껏 마취총만 쏴 대던 한예지는
무슨 하이퍼 FPS 게임 캐릭터처럼 다양한 총을 주렁주렁 챙기게 되었다.
마취총 말고도 범죄자 저지용 고무탄을 발사하는 유탄 발사기를 비롯해
테이저건이나 가스총도 다루게 되었다.
“오늘도 사격 만점은 받지 못했네요.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만점을 받아보고 싶은데.”
사격술도 순조롭게 늘어 난이도를 올렸음에도 평균 점수가 98점,
특히 아군에게 오발 사격 0회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단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헤헤, 역시 그렇죠?”
그래도 옆에 착 달라붙어서 뺨을 비비는 모습을 보면
여인 보다는 소녀, 그러니까 어린애 같다는 생각을 벗어 던질 수가 없었다.
육체의 성숙함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신적인 모습으로.
부모가 없어서 애정 결핍이라도 있었던 걸까.
내가 아는 인간 심리는 고작해야 살인을 처음 하면 정신적으로 몰렸다가
못 이겨내면 자살하고, 이겨내면 살아남는다.
딱 이 정도 수준만 이해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부모 없이 자란 장녀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났을 때 보이는 정신적 변화~
이런 거창한 거 모른다고.
“그래서 사격술 교관님이 몇 개, 실전에 관련된 조언을 해 주셨는데 확실히 홀로그램과 실전 서바이벌은 다르더라고요.”
“그래, 실전도 겪었으니 더 잘 할 수 있겠지.”
한예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사람 성격이 단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는 소리는 술 먹은 개똥 철학자한테 실컷 들었지만
이 정도로 입체적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손가락 끝에 걸리는 고운 머릿결이 사그락거리며 손 틈으로 흩어진다.
한 손으로 물을 뜨는 것처럼 손바닥 위에 남지 않는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쓰다듬는다.
꽤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지지만, 그녀는 되려 내 쪽으로 머리를 더 기대온다.
몸도 섞은 사이인데, 이게 뭐 대수인가 싶었지만 처음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르다.
마주 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함께 식사하던 꿈을 자주 꾸던 한예지는
이제 내게 딱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는 불안한지 반드시 손 정도는 잡아야 하는 상황.
심지어 이런저런 이유로 슬쩍 손을 놓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꿈속 세계가 끄트머리부터 달달 떨려온다.
그녀의 정신력이 마모되고 있다는 뜻인데...
‘무슨 손 한 번 안 잡아 줬다고 정신력이 훅 떨어져...?’
사격 훈련을 10번 연속으로 실패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 못 하는 답답한 상황과
내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
이 두 개가 비슷한 수준으로 마음 아프다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너무 오냐오냐한 걸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예쁜 여고생이 온몸으로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오며 응석을 부리는데
그걸 아무 이유 없어 걷어찰 남자가 있나?
적어도 게이 아니면 고자겠지.
지금 상태만 봐도,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것처럼 기대오느라 가슴이 가슴을 짓누른다.
남녀 간의 개념이 뒤바뀌어서 그런지 훨씬 무방비한 상태로.
이쪽 세상에서 여자의 가슴은 별 의미가 없다.
남자의 넙데데한 가슴에는 온갖 의미를 부여하는 주제에
여성의 큰 가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끽해봐야 임신 후 모유 수유를 위한 부위라고 생각할 뿐.
물론 여자의 발목이나 뒷목에 흥분하는 남성이 있는 것 처럼
여성의 가슴에 흥분하는 남성이 있긴 해도 마이너한 취향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역전된 정조관념을 가진 나는 마이너 성욕의 끝판왕 아닐까.
여자 가슴에 흥분하고, 잔머리 있는 뽀얀 목덜미에 흥분하고
잘록한 허리나 탄탄한 엉덩이, 쭉 뻗은 각선미를 전부 좋아하니까.
얇은 옷 한 장 너머로 이리저리 뭉개지는 부드러운 가슴에 의미가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하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팔을 내리자 한예지는 곧바로 내 팔을 낚아챈다.
기둥에 매달리듯 내 오른팔을 양팔로 꼭 껴안는 그녀.
자연스럽게 내 손은 그녀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남녀가 뒤바뀌었다 해도 이 쪽은 똑같은 모양.
슬그머니 허벅지를 배배 꼬는 한예지가 몸을 움찔거린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정겨운 풍경.
내게 의존하는 게 불안하다 어쩐다 해도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긴 싫었다.
손목을 움직여 손등으로 살살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셔츠도 바지도 얇디얇은 차림이라 그런지 천의 감촉보다는 말캉하게 눌리는 살의 감촉이 선명한 것 같았다.
“으음... 성좌님, 죄송해요.”
“늘 죄송해하는구나.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을 텐데.”
그렇다 해서 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 또한 이쪽 세계의 여성상에 익숙해지고 있었으니까.
내 팔뚝을 붙잡은 한예지가 슬금슬금 허리를 앞뒤로 흔든다.
허벅지 사이에 내 손을 꾹 끼워둔 상태로.
따스한 허벅지 사이에서 조금씩 습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거실 소파에 편히 드러누워 있는 걸 상상했는지
나도 한예지도 속옷 따위는 걸치지 않은, 얇은 잠옷 차림이었으니까.
팔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손등과
손바닥을 양쪽에서 눌러오는 말캉한 감촉에 자연스럽게 내 물건에도 힘이 쏠린다.
오른쪽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 바지를 밀어내는 그 우람한 윤곽.
“아아, 성좌님 냄새...”
어째 이상한 성벽도 추가되는 것 같은데, 아니겠지.
그녀가 내 물건에 손을 뻗는 일은 없었다.
다만 충혈된 눈으로 내 고간부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소파에 엉덩이를 더 격렬하게 비빌 뿐.
이제 내 손가락 끝자락에는 면바지의 얇은 감촉이 아니라 축축하게 젖은 천 조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감히 성좌를 자위 도구로 삼는 불경한 짓에, 배덕감 섞인 쾌감이라도 얻는 걸까?
이쪽 세상 사람들이 성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들의 성욕이 어떠한 방향인지 모르니 지레짐작만 할 수밖에.
몸이 점차 기울어진 한예지가 내 팔에 매달려 겨드랑이 쪽에 얼굴을 박는다.
순간적으로 냄새가 그리 심한가?
하고 반대쪽 겨드랑이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댔지만
별다른 암내는 안 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참을 허벅지를 바르작거리던 그녀가 가벼운 절정을 맞이했는지
허리를 움찔거리고 허벅지의 힘을 풀 때,
나는 자유로워진 손바닥을 살짝 움켜쥐었다.
손바닥 전체에 느껴지는 축축하게 젖은 면바지와 그 너머에서 움찔거리는 도톰한 살집.
보짓두덩이가 꼬집히듯 잡히니 힉, 하고 새된 소리를 낸 한예지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물론 이게 정말 싫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힉, 가, 가고 있는 즁인뎨헤...”
제 얼굴을 뭉갤 것처럼 품에 안겨 들어온 그녀가 내 팔을 아플 정도로 꽈악 쥐어짠다.
이제 축축한 면바지는 의미가 없었다.
바르르 떠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동안,
힘겹게 다리를 움직여 그녀가 스스로 벗어 던졌으니까.
침입을 방해하던 얇은 천 쪼가리가 사라지자
손가락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아직 부족하지? 괜찮단다.”
“으으, 저, 저 또...!”
옅은 쾌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벌렁거리는 살 틈바구니로 손가락을 푸욱 집어넣는다.
몇 달 내내 몸을 섞어도 여전히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속살을 향해서.
팔에서 힘이 풀린 그녀가 반바지 아래에 눌려 있는 내 물건에 뺨을 비비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쾌락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손가락이 팅팅 불어 터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