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화 : 몽마 下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고민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방식이 효율이 높은지.
매달 5,000pt가 쌓이게 되었다 해도 여전히 비싼 권능들은 백만 단위에서 놀고 있었으니까.
백만짜리 하나 사려면 대충 계산해서 83년 기다려야 하는 걸 16년 기다리면 되는 상황.
당연한 이야기지만 16년 내내 이 원룸에서 뒹굴며 기다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혹여나 내가 눈치를 채지 못한 물건 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매일같이 상점 목록을 정리하고 머리를 굴리다 알아낸 것이 있다.
나는 존나게 멍청하다는 사실을.
손에서 달그락거리는 마지막 한 알의 알약.
한 알에 100pt, 5알씩 묶어 파는 그 환몽비약이었다.
성좌가 되자마자 확인한 게 이 알약인데 이걸 떠올리는 데 3개월이 걸렸다.
...그래, 3개월.
눈 쌓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한예지를 보니 자괴감이 훅 올라온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정확히 말하자면 사고방식이 굳어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환몽비약의 효능은 ‘꿈속에서의 변화를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한예지의 육체 능력을 올리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꿈속에서 정신력이 떨어지면 중학생, 초등학생 시절의 꿈을 꾸는 것을 보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육체가 어려지는 식으로 퇴보한다면 되려 독이 되니까.
그렇게 환몽비약을 까맣게 잊어버리고서는, 다른 권능이 없나~ 하고 계속 상점 목록만 뒤지고 있었다.
내가 몽마가 되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지 못한 상태로.
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몽마로 종족이 변화했으니
환몽비약의 부작용이 사라졌다는 생각조차 못 한 상태로 한예지의 사격 훈련만 주구장창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올해가 지나기 전에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한 달 치 기본 포인트인 1,000pt 치 환몽비약 10알을 전부 먹었다.
3일에 한 알씩, 27일 내내 내 몸을 감싸고 움직이던 약효가 잠잠해졌다.
손에 들린 마지막 한 알만 먹으면 이제 이 짓거리도 끝이다.
나는 완전히 몽마가 되는 것을 꿈꿨다.
이 세상에 진짜 몽마가 있는지도 모르니 그저 내가 상상으로 꿈꾼 몽마가 되는 것을.
알약을 쥐고 있는 손은 남자의 손답게 커다랗지만, 우락부락 두껍지는 않았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새하얗고 유려한 손가락과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팔뚝.
그 아래로 보이는 복근과 운동선수처럼 근육이 잔뜩 붙은 장딴지.
그리고 반바지 아래에서도 걸을 때마다 묵직하게 존재감을 주장하는 살덩어리까지.
한예지와 주변 여자들의 야한 꿈에서 나오는, 이쪽 세상 기준 섹시한 남자의 육체였다.
거울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 험악하던 내 얼굴도 곱디곱게 변하지 않았을까.
이쪽 세계의 남자인지라 식스팩이 쭉 빠진 짐승남의 몸매여도 근력으로는 여성에게 밀릴 수 있지만
애초에 몽마라는 존재가 육탄전으로 싸우지는 않겠지.
근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보다 내용물이니까.
솔직히 강간물이 취향인 여자 생도의 머릿속에서 키 190은 되어 보이는 보디빌더가
키 170짜리 여자에게 맨손으로 제압당하는 꼴을 보면
이쪽 세상 인간의 근육은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
내가 상상하는 몽마의 능력은 유명한 영화의 살인마 캐릭터에 가깝다.
왜냐하면, 기억 나는 게 그거밖에 없거든.
솔직히 길 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몽마에 관해 물어보면 다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이쪽 세상은 좀 다른가?
멸망 전 밤에 신세 좀 졌던 어디 19금 사이트에서 본 녀석도 있고
대충 시간 보내려고 읽은 소설에도 가끔 나오지만
뇌리에 가장 깊게 새겨진 것은 연쇄살인마 영화 시리즈였다.
야한 꿈을 꾸게 하는 정력 넘치는 악마~ 같이 별거 아닌 설정보다는
상대방의 공포심을 읽어 악몽을 만들고 그 악몽을 현실에 겹쳐 살해한다는 방식이 훨씬 정교하니까.
화상 자국도 없고 칼날 손톱 달린 장갑도 없지만 내가 상상한 몽마의 능력은 그 시리즈의 주인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상대의 무의식에서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사람의 무의식을 탐험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어느 정도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악마.
물론 육체가 변했다고 고작 1,000pt 알약으로 어마어마한 진화를 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꿈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걸 현실로 가져오려면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으니까.
처음 꿈 풀이 비법을 구매했을 때, 한예지의 악몽을 해석하느라 5시간 넘게 두통에 시달린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가 덜 된 건지 원룸에서 소환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사나운 치와와 정도였으니까.
한 3초 정도 아르릉 거리다가 사라졌지.
고작 그 정도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온종일 한예지 훈련하는 거 보면서 캔 음료나 마시는 것 보다 생산적이니까.
거기에 노력에 따라서 초능력처럼 보이는 권능이 진화하는 것도 신기했고.
자각몽이랑은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뭔가 소환된다는 것은 정말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들뜨는 바람에 한예지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다 두통으로 기절하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기분이 상할 리 있나.
만들어진 도넛 모양의 모형 대륙에, 온갖 평행 우주에서 끌어모은 영혼들이라 해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비슷했다.
그걸 하나씩 모으는 재미도 있었고.
한예지가 무서워하는 것은 털이 수북한 짐승이었다.
정확히는 목줄 풀린 대형견 같은 애들.
사격술 남 교관이 무서워하는 것은 약을 뿌렸더니 비행을 시작하는 대형 바퀴벌레였고.
그 외에도 광대, 거대한 거미나 바퀴벌레,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낡은 인형,
고장 난 가로등이 있는 뒷골목, 고장 난 엘리베이터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화면 너머의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세상이 달라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어서 더욱 보는 맛이 있었고.
한예지와 같이 수업을 듣는 여자 생도 하나가 그랬다.
그녀의 악몽은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은 섹시한 금발 여성.
유두도 겨우 가릴 정도로 얇은 천이 어깨끈도 없이 가로로 가슴팍에 매여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끈을 뜯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가슴, 잘록해서 한쪽 팔로 휘감고도 남을 허리.
그리고 끈에 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작은 천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비키니 하의까지.
구릿빛보다는 덜 탄, 선키스드(Sun kissed)라고 불리는 건강미 넘치는 피부의 금발 글래머가 10초 정도
추잡하게 내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이더니 사라진다.
사라지기 직전, 내가 남자인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확 쓰긴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를 욱신거리게 만드는 이 노출광 미녀가 왜 이름 모를 생도의 악몽일까.
수영복 차림만으로도 어지간한 포르노 사이트 인기 동영상에 올라갈 수 있는 음란한 미녀가 무섭다고?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생도의 무의식에 침입한다.
침입하는 것은 간단했다.
화면을 돌려 대상의 눈동자를 깊게 바라보면 된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움직이는 사람은 화면 조정이 힘들어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
목표인 여자 생도는 책상에 앉아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허튼짓하면 다른 성좌와 마찰이 생길지도 몰랐지만
방금 봤던 그 음란한 장면이 너무 궁금해서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왜 비키니를 입은 여자를 무서워할까?
한예지와는 다른 갈색의 눈동자, 외꺼풀, 꽤나 준수한 외모의 여성.
눈동자를 바라볼수록 나는 이름 모를 어린 생도의 기억을 읽었다.
데이터를 전송받는 안드로이드가 이런 기분일까.
기억의 시작은 조금 충격적이게도, 어린 소녀의 자위였다.
털도 채 자라지 않은 미성숙한 여자아이가 부모님 몰래 야한 동영상을 찾아보는 장면.
사춘기가 찾아온 여학생은 성적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을 떠돌았다.
자연스럽게 음란물을 접하고, 부모의 명의를 도용해 성인 사이트를 들어간다.
어딘가에서 무료 음란물 사이트 주소를 보고 차마 등록해 둘 용기가 없어 사이트 주소를 외워두는,
전형적인 사춘기의 모습.
그렇게 평화로운 성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어린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무료 야동 사이트의 링크를 눌렀다.
“악, 씨발 이게 뭐야!”
발기한 남성기 사진 정도나 봐 왔던 그녀 앞에 펼쳐진 것은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고 레슬링을 하는 두 여자의 동영상.
“어, 어, 이거 왜 안 꺼져!”
팬티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어린 소녀가 패닉에 빠져 알궁둥이를 가리지도 못한 상태로 벌떡 일어났다.
자그마한 손바닥이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려 보지만 악성 링크는 제 할 일을 마저 한다.
- Get the FUUUK!!
- You Biiiitch!
금발 벽안의 글래머와 갈색 머리 라틴 미녀가 마이크로 비키니만 입은 상태로 서로에게 달려든다.
알몸에 가까운 여체 둘이 얽히고 끈을 잡아당기고 가슴을 꼬집으며 엉덩이를 두드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초조함과 당황함에서 오는 압도적인 공포.
10분 뒤에 부모님이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과 부모님 몰래 야한 걸 보다 컴퓨터를 망가트린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눈앞에서는 동성애자 포르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엉덩이를 쑤시고 있지
스피커를 꺼도 동영상은 멈추지를 않는 상황.
당연히 강제 종료를 하면 되지만 당황하고 겁먹은 초등학생은 그 정도의 지식조차 없었다.
결국 컴퓨터 코드를 뽑아버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생도의 정신 속에서 튕겨 나왔다.
목줄 풀린 대형견, 거미, 바퀴벌레, 광대에 이어 동성애 포르노 배우인가.
성좌가 수집한 악몽치고는 참 볼품없기는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