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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21화 : 몽마 上 (21/169)



〈 21화 〉21화 : 몽마 上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영장에 들어 간 기분이라 해야 할까?
피부에 저릿저릿 느껴지는 이 기분을 표현할  없었다.
인간의 감각이 아니므로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기 어려운 이 느낌.

한예지는 꿈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그녀의 정신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격장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길쭉한 복도.
조명이 어둑어둑한 낡은 부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것까지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상황.


전시가 되지 않고 바닥에 방치된 유리 구슬을 집어 보았다.
초등학생인 한예지 옆 짝꿍이 급식 판을 들고 뛰어오다 엎어진 기억.
바닥에 있는 낡은 구슬들은  그런 녀석들이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별  아닌 것들.

조금  걸어보니 휘황찬란한 금박 액자에는 편의점의 풍경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미술관처럼 접근 금지 울타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다가가서 어루만져 보았다.

이건 내가 그녀와 계약 했던 순간이네.
반 년도 지나지 않았고 잊어버리기도 힘든 기억이긴 하지.
어지간히 기쁜 기억인지 금박 액자에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에 온갖 휘황찬란한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사람 손바닥만  새하얀 개 인형과  위에 홀로그램으로 확대된 커다란 괴물도 있고
비눗방울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도 있었다.
이건 과장된 기억과 흐릿해진 추억인가.

그렇게 그녀의 기억을 살펴보며 다니다 커다란 문을 만났다.

‘특별 기획관?’


단편적인 기억이라기엔 너무 많은 생각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기억.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 있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의 한예지였다.
5학년, 아니면 6학년? 중학생 무렵과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그녀가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무수히 걸려 있는 그녀의 액자.
손끝으로 어루만질 때마다 선명한 기억이 뇌리에 박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얼굴이 흐릿한 성인 여성.
어머니일까, 아니면 교사일까.


‘남자는 지켜줘야 한단다.’

남자는 키가 크고, 여자는 근육량이 많다.
채집을 담당하던 남성과 사냥을 담당하던 여성의 육체적 차이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인류가 급격히 발전해도 그 육체의 차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자애들이 덩치는 커도, 여자는 남자를 때리면  된다.
남자는 여자가 지켜줘야 할 존재니까.
초등학생 무렵부터 선생들이 입에 달고 살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린 한예지도 거기에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린 남동생이 있었으니까.
돌아가신 부모님도 누나가 남동생을, 여자니까 남자애를 지켜주라고 말했으니까.
그게 아니어도 누나로서 남동생을 잘 지켜 줬겠지만.


여자는 남자를 때리면 안 된다.
적어도 초등학생 한예지의 10년쯤 되는 짧은 인생은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날이 오기 전까지는.

손 끝에 와 닿는 감촉이 꺼끌꺼끌하다.
사진이 걸려 있던 액자는 이제 유채 물감으로 대충 뭉개놓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반에서 성질 나쁘기로 유명한 남학생 하나가, 급식 시간 배식 문제로 한예지와 말싸움을 했다.
세상 어느 초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가벼운 사건.

“이게 부모님도 없는 고아가!”


“뭐?”


“맞잖아,  고아지!”

약점을 잡았다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남학생이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제 누가 잘못했고 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 한예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남자아이의 얼굴을 후려친다.
초등학생 무렵은 아직 남자애들이 키가 커지기 전의 상태.
덩치도 체력도  되는 남학생도 마주 주먹을 휘두르지만, 코피가 나며 싸움은 허망하게 끝난다.

 뒤의 일도 뻔한 일이었다.


고아인 한예지는 보호자가 없고,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에 멍이 든 남학생의 부모는 득달같이 학교로 달려왔다.
 아빠는 한예지에게 삿대질하며 죽일 년 썩을 년 욕을 하고, 애 엄마는 뒤에서 점잔을 빼며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뻔하지 않았다.


“한예지 학생의 부모님은 의무를 다하다 돌아가셨습니다. 말이 조금 심하신  같은데요.”

젊은 여교사 하나가 끼어든다.

한예지의 어머니는 화신이었고, 아버지는 남군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도시 방위 때 불우한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제야 점잔을 떨며 방관하던 애 엄마의 얼굴색이 변하며 반응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화신이면 다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젊은 애 아빠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나의 세계였다면 교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물러나고 의기양양한 애 아빠가 더 소리를 질렀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다르다.


교무실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온다.
타자를 치던 교생이 손을 멈추고 신문을 넘기던 늙은 교사가 신문을 내려놓는다.
한예지와 남학생의 사이에서 상황을 방관하던 담임도 슬그머니 일어난다.

교무실 내부에 있던 교사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인다.
젊은 여성 교생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갑작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저기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화신의 자식이면 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도 되냐고!”

얼굴이 벌게진 남자는 끝까지 고함을 지른다.
이제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남학생의 엄마였다.
뒤에서 점잖게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애 아빠의 어깨를 붙잡고 말린다.

“그쪽 자식이 먼저 돌아가신 화신을 욕한 게 아닌가요?”

“그렇다고 애를 때려욧!”


담임이 한예지의 어깨를  치더니 교무실 밖으로 슬그머니 데려간다.

“괜찮아, 먼저 집에 가 있어. 다음부터는 때리지 말고 선생님한테 먼저 말하고.”


툭툭, 머리에 아프지도 않게 딱밤 몇 대 맞은 한예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는 길에 남동생을 데리러 가야 했으니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교무실에 있던 그녀는 자신이 왜 아무 일 없이 풀려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  장면을 함께 본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

어째서 자신이 벌을 받지 않았는지.
오히려 얻어맞은 남자애가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는지.
남자애 아빠가 학부모 모임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심지어 어느 한 교생이 올린 글 때문에 남자애 엄마의 회사까지 소문이 퍼져 반년 만에 이사를 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다만 어린 한예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물건 깨지는 소리와 탁자 엎어지는 소리가 뜻하는 것을.
교사가 사람 팬다고 곡소리를 내며 우는 남자와 남편 맞는 모습을 보고 눈이 돌아가 난동을 피우는 여자,
 여자와 드잡이질을 하는 교생의 소리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기에.

그녀가 교무실에서 나가 느낀 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과 화신에 대한 존경심뿐.

화신과 성좌에 대한 이미지는 그녀의 무의식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내게 응석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은 아마 이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한예지에게 있어 성좌는 사회적 통념 그 이상의 존재다.

어린 시절 교사도 부모도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남자애는 지켜줘라’라고 말했지만
성좌와 화신에 관련되면 그런 사소한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국가를 위해 희생한 화신과 군인 부부의 자식이라는 것은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교관이 고작 달리기를 열심히 한다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온 것처럼.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3년, 나와 계약하기 전의 고등학생 시절까지.
그녀의 인생 구석 구석마다 성좌에 대한 광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한예지를 대한 사람들이 그녀의 무의식을 건드린 것이다.



꿈속에서 깨어난다.
마치 유수 풀에서 뒷덜미를 누군가 잡아당겨 쑤욱 뽑아내는 감촉처럼 어떠한 흐름 속에서 거슬러 나오는 느낌.
역시나 한예지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는 시간이 흘렀는지 그녀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따 쓰지?’

몽마의 기초를 깨우친 것은 좋다.
한예지가 왜 내게 이렇게 매달리고, 응석을 부리며 부담감까지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어린 나이에 성좌는 부모와 교사보다 대단한 존재라고 깊게 각인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결국, 한예지가 내게 매달릴 것이고 나를 기쁘게 하려고 헌신할 것을 알게 되었지만 딱히 나아가는 것은 별로 없었다.
오늘  자각몽에서 악몽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밖에.
역시,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게 밸런스 잘못 잡은 모바일 게임도 아니고, 스킬 하나로 급성장 할  있지는 않겠지.


“한예지 생도, 위치로.”

“위치로!”

점심 식사를 마친 한예지는 꿈속에서 계속 나오던 사격장 앞에 서 있었다.
첨단 과학 기술로 만든 건지, 성좌의 권능으로 만든 건지 그녀의 꿈속에서 나온 것처럼 혼자 걸어 다니는 마네킹이 잔뜩.

“훈련 개시!”


“개시!”

사격술 교관은  관련 교관이어서 그런 걸까, 어째서인지 복명복창을 외치며 총기를 번쩍 들어 올린다.
그러더니 군인처럼 자세를 잡고  멀리서 등장한 검은 마네킹의 머리에 정확히 총을 맞춘다.


‘나보다 훨씬 잘 쏘네.’

어림잡아도 300m 밖에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뛰어오는 마네킹이지만
망설임 없이 발사된 총탄이 머리를 후려치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일정한 리듬감 있게 발사되는 총알이 빗나가는 일 하나 없이 검은 마네킹들을 무너트린다.

“사격 컨디션이 좋군, 그대로 유지해라. 시야 더 넓게 잡앗!”


시간이 흐르고, 슬슬 드론들이 나타났다.
한예지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마네킹들의 시점으로 화면을 돌린다.
역시 모형 하수구에서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드론 몇 개가 보인다.


“눈 크게 뜨고 제대로 안 봣!”

이대로 또 감점을 당하게 될까 걱정되어 컴퓨터 앞으로 엉덩이를 옮기려 하지만
교관의 외침에 꿈속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한예지가 총구를 훅 내린다.
그곳에 있는 것은 저공비행을 하며 엄폐물 뒤에 웅크린  마네킹에게 몰래 접근하던 검은 드론.

퉁, 하고 발사된 총알이 웅크린 흰 마네킹의 옆구리를 지나 드론의 날개를 정확히 격추함과 동시에 커다란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97.8 / 100]


만점은 아니라도 그녀의 최고 점수를 훌쩍 뛰어넘은 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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