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화 : 소비
찝찝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손에 잡히는 것은 하필 수박 맛 탄산.
별로 선호하는 맛이 아니지만 침 한 방울 없이 말라붙은 혀는 이거라도 좋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목구멍을 따갑게 때리는 탄산의 감촉에 트림을 뱉으며 그대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옆의 TV 화면 속에서는 한예지가 조깅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상황.
안색이 나빠 보이지도 않고, 운동장도 어제처럼 멀쩡하게 잘 돌고 있었다.
그럼 그 꿈은 뭐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답답함이 밀물처럼 몰려와 가슴을 좀먹는다.
자각몽의 끝이 왜 그딴 악몽인 걸까.
한예지가 중학생 때 정말 겪었던 일일까, 아니면 그냥 꿈이니까 개꿈을 꾼 걸까.
악몽의 편린이 있는 악몽과 그냥 악몽의 차이점이 있나.
해소될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망설이게 만든다.
몽마, 인큐버스.
원래 세상에서는 종교적 이유로 순결을 지켜야 하는 젊은 남녀들이
참지 못하고 섹스를 하고 책임 전가를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악마.
결혼하기도 전에 속도위반을 해 버리면 ‘악마 새끼가 그랬어요~’ 하고
젊은 부부의 앞날을 지켜주기 위해 강간범의 누명을 쓰고 탄생한 존재다.
이렇게 표현하니까 진짜 인간이 쓰레기 같네.
아무튼,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다.
여자 몽마 서큐버스는 성인 만화에서 많이 나온다던가,
꿈속에서만 미남 미녀고 현실에서는 촉수 괴물이라던가.
딱 인터넷에서 읽은 정도.
그마저도 멸망 이전의 기억이기 때문에 왜곡되었을 수 있다.
거기에 나는 꿈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다.
멸망 이전에는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 전에 아버지 일이나 도와주었을 뿐이고
멸망 이후에는... 뭐, 꿈 같은 거 타령하던 놈들은 다 먼저 굶어 뒤졌지.
결국, 성좌네 뭐니 거창하게 말하더라도 지금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내가 아는 지식은 변이된 크리쳐의 두개골을 어느 정도로 부숴야 완전히 죽는가,
사람을 칼로 찔렀을 경우 안 빠지는 경우가 많아 칼을 여러 개 들고 다녀야 한다 이런 지식밖에 없으니까.
그걸로 18살 사춘기 여고생의 심리 상담을 어떻게 해.
그것도 꿈과 무의식에 관한 상담을 무슨 수로?
그러한 고민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눈앞에 있는 목록에서 찾아낸 것은 세 개.
정렬 기능도 검색 기능도 없이 나열된 목록을 뒤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처음에는 그래도 가격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는데, 목록이 늘어나면서 뒤죽박죽 섞였다.
그래서 지금 구매를 고민하게 된 것 중 하나가 기초 기능 업데이트.
이 불친절한 목록은 구매 물품에 대한 설명이 정말 최소한으로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구매를 마음먹었던 환몽비약의 경우
복용 시 꿈속에서 일어난 육체적 변화가 현실에도 미약하게 적용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걸 한예지의 체력 단련을 위해 구매할 예정이었다가 취소했지만...
꿈속에서 일어난 육체적 변화가 만약 안 좋은 쪽이라면?
예를 들어 어제의 악몽에서 한예지는 키가 140도 안 되는, 성장기 이전의 중학생 꼬마였다.
환몽비약 먹였다가 키가 줄어들고 단련한 체력이 중학생일 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저 기초 기능 업데이트를 하면 목록의 검색, 분류, 정렬, 즐겨찾기, 장바구니와 구매 물품의 자세한 설명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두 개는 나의 권능을 위한 것들. 하급 몽마를 위한 꿈 풀이 비법서와 임프도 따라 하는 악몽 다루기.
뭐 이름이 이럴까 싶었지만, 유치찬란하게 생긴 표지를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야 인간들만 있는 세상에서 왔다지만, 어느 누군가는 판타지 세상에서 왔을 수 있으니까.
그 동네에서는 몽마들이 평범하게 문명을 이뤄 살아갈 수도 있겠지.
기초 기능 업데이트는 5,000pt로 구매하면 1,000pt가 남지만 다른 걸 살 수 없다.
즉각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품목처럼 보이고.
반대로 두 권능을 구매하면 한예지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남은 기간 동안 저 뒤죽박죽 섞인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고.
악몽 다루기는 악몽의 편린을 쉽게 얻을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싶어 체크 해 둔 생태.
번거로움과 호기심 해결.
고민은 짧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코 뒤쪽까지 타고 내려와 골을 통째로 울린다.
그 김에 게으름 좀 피우고자 침대에 드러누워 얼얼한 이마를 문지른다.
선택한 것은 몽마를 위한 꿈 풀이 비법서.
한예지의 자각몽에 들어가면 꿈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기엔 너무 느렸다.
당장 자각몽을 구매하고 3개월이 되어가는 데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이러다가는 한예지가 정년퇴직하고 나서야 완벽한 몽마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약간의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와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달콤한 자각몽의 두 배 가격인 6,000pt의 값어치를 하려는 것처럼 한예지의 상황이 살살 이해가 되기 시작했으니까.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정리되는 정보를 어디에 메모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이 방에는 메모지와 펜조차 없었다.
그걸 1pt 주고 샀다가 괜히 999pt 낭비하는 꼴이 될까 구매하기도 싫고.
그와 동시에 낯선 감각이 온몸을 끈적하게 휘감는다.
혈관을 타고 느릿하게 퍼지는 기괴한 감촉.
마치 마취 주사를 맞았을 때 온몸으로 감각이 퍼져나가듯, 심장에서 시작된 감각이 손끝과 발끝까지 꼼꼼하게 퍼진다.
두통 속에서 자그마한 생각이 들었다.
‘하급 몽마를 위한’ 꿈 풀이 비법서기 때문에, 나는 정말 몽마로 종족이 변했다는 생각.
근거도 없이 감각에 의존한 생각이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을 수집하는 기괴한 이 세상의 창조주가 고작 종족을 못 바꿀까.
뿔이 솟아나거나 꼬리가 생기거나 날개가 돋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감염자들이 자신의 육체가 변이해간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끼듯이, 나 또한 나의 육체가 변해감을 느꼈다.
멍한 상태로 고개만 겨우 돌려 TV 화면을 내려다본다.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흘렀는지 점심은 지난 지 오래고, 씻고 저녁을 먹은 뒤 자신의 방에 있는 한예지가 보인다.
그와 동시에 어제의 그 꿈이 제멋대로 불어난 가짜 악몽이라는 사실도.
운동장에 난입한 괴물은 그렇게 거대하지도, 원거리에서 참격을 날리지도 않았다.
괴물치고 너무 약해서 탐지망에서 벗어난 커다란 들개 수준의 괴물.
새하얀 털을 가진 들개가 급식 냄새를 맡고 운동장으로 뛰어들어 식당으로 향했고
학생을 감싸던 남자 교생의 다리가 물어뜯기는 것으로 피해는 끝.
단지 얼굴에 피가 튀어 시야가 가려진 것과
그 흐려진 시야 사이로 처음으로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도 모르던 작은 트라우마가 그녀의 기억 한 편에 곱게 숨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사실을 내가 어떻게 눈치챘는지 고민할 무렵 시간이 또 흘러갔는지 공부를 하던 한예지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몽마의 이 능력에 익숙해질 때까지 오래 걸리겠는데.
마치 컴퓨터를 처음 쓰는 사람의 타자 속도가 느리듯이, 나 또한 별 것 아닌 꿈 하나를 읽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저녁 식사 이후에서 침대에 누울 때 까지면 거의 4, 5시간을 멍하니 있었다는 소리인데...
빨리 익숙해지지 않으면 시간 낭비가 극심할 것 같다.
[화신 한예지의 자각몽에 간섭 하시겠습니까?]
[Yes / No]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할 건 해야겠지...
※
어제의 그 못다 한 꿈이 아쉬웠는지 오늘의 꿈도 그 사격장이었다.
배치가 조금 바뀐 것 같지만 뒤죽박죽 섞인 상태로 마네킹과 드론이 잔뜩 있는 건 매한가지.
이번 달 사격 훈련에서 평균 93점, 최고 점수 94.8점을 받았기 때문에 뇌리에 강하게 박힌 거다.
눈을 뜨고 사격장을 바라보자마자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실에서 두통에 시달리며 몇 시간이나 걸리던 걸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차이.
몽마라서 꿈속에서만 강해지는 건가?
내가 간섭하지 않고 그녀를 관찰하는 동안, 꿈은 똑같이 흘러갔다.
마네킹이 나타나고, 한예지가 총을 쏘고, 점수는 또 93, 94점 언저리.
현실에 기반을 둔 꿈이라 그런지, 그녀는 위에서 내려오는 드론 말고 하수구에서 등장해 저공비행을 하는 드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드론이 하수구에서 나와 흰 마네킹의 다리를 툭툭 건드릴 때마다 0.1점씩 계속 감점이 되는데 눈치를 못 채니 점수는 계속 내려가는 상황.
그녀도 슬슬 도전 정신보다는 스트레스가 커지는지 사격장 끝자락이 조금씩 바스러져 사라지고 있었다.
“사격 자세가 좋군. 나쁜 습관이 없어.”
“음, 시야를 넓게 가져라.”
“지원 사격을 할 때는 많은 걸 봐야 한다.”
“긴장 풀어, 시야가 쏠린다!”
똑같은 얼굴의 남 교관, 지난번 봤던 사격술 교관이 나타나서 한마디씩 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야를 넓게 가져라, 많은 것을 봐라, 시야가 쏠렸다.
교관은 정답을 돌려서 말해 주고 있는데 한예지는 눈치를 못 채는 상황.
비행하는 적군이 당연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생각하는지 무릎 아래를 살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은데.
“자아아-세가아아-”
“아오 씨, 시끄러워!”
자각몽을 유지하는 것에 정신력이 필요한지, 스트레스 때문에 꿈이 조금씩 바스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 자각몽이 무너지면 컨디션 회복에 악영향인데.
자각몽을 꾸는 이유가 꿈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여도 평소보다 컨디션 회복이 우수하다는 이점 때문인데
그 점이 사라지면 뭐하러 자각몽을 꾸겠어.
깨져가고 있는 꿈이니 직접 난입해 들어갈 수도 없고, 그냥 놔두자니 권능이 낭비되는 꼴.
머리가 깨져라 고민을 하고 있으니 두통과 함께 내 앞에 익숙한 컴퓨터가 나타난다.
허공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곧바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무기력한 악몽이 밑바닥을 주의하라고 조언합니다]
“어, 성좌님?!”
화들짝 놀란 그녀가 아래쪽을 살핀다.
허벅지에 금이 간 흰색 마네킹과 총에 맞지 않고 멀쩡한 날개를 자랑하는 검은색 드론.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과 함께, 그녀의 꿈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