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화 : 화신, 한예지
백문이 불여일견.
뜬금없지만 그런 한자성어가 떠오른다.
조금 불경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권능인 ‘달콤한 자각몽’은 현실감이 좀 없었다.
매일 체력을 단련하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법률을 공부하고...
몇 달전의 자신에게 넌 화신이 되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신 법률 공부를 하게 될거야-
같은 소리를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손 끝으로 확실히 느낀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거지. 신중한 모습 아주 좋다! 그러니 남은 일주일간, 너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보도록 하지. 원래 별 마음이 없다가도 손에 익으면 끌리게 되는 게 무기니까 말이다.”
열성적으로 외치는 교관의 모습. 기초 무기술은 교관이 한 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보조 교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신의 옆에 딱 달라 붙어 있는게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부담스러움조차 잊게 만드는 최초의 특성.
평생 휘둘러 본 검이라고는 동생 밥 차려줄 때 만진 식칼이 전부.
목검을 쥐고 몽둥이로 후려치듯 마네킹을 두드렸다.
좌에서 우로 휘둘러 후려치자 텅, 하고 휘청거리더니 검을 빼기도 전에 텅! 소리가 나더니 마네킹이 반대로 휘청거린다.
[화신 한예지가 몽마의 첫 번째 정을 완전히 소화하였습니다]
[재능 개화 : 환幻]
그날, 그 포근하고 불경한 꿈을 꾼 날 이후로 얻게 된 특성.
성좌님과의 계약으로 인생이 바뀌었다면, 이 특성 하나만으로 교관들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었다.
공격시 한 번 더 공격을 해 주는 특성.
심지어 마취총을 쏴 보고 나서야 알았다.
막아도 추가 공격은 진행된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게, 상대가 막아도 일단 피격 된 걸로 쳐서 추가 공격이 진행되는 것 같군요.”
앞에서 명함을 건네주는 높으신 분 말고, 뒤에서 쑥덕거리는 교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 과연. 피격하는 순간 동일한 거리에서 두 번째 공격이 생성되는 방식인가?”
“그런 것 같죠. 마네킹이야 직접 후려쳤으니 바로 피부에 두 번째 공격이 직격으로 들어 간 거고. 아마 무기를 맞대면 추가 공격에 어느 정도 텀이 생기겠네요. 대처법은 무조건 회피를 하던가, 감각 특성 가진 사람이 창 같이 긴 무기로 멀리서 쳐내고 한 번 더 피해야겠네.”
화려하진 않지만 극도로 실용적인 특성.
그렇게 평가한 교관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인생 폈다고 축하해주더니 사라진다.
결국 남은 것은 비어버린 오후 일정과 명함 한 장.
명함을 들고 찾아본 노트북 속에서 재생되는 화신 제압 부대의 영상.
마취총과 그물을 들고 화신을 제압하는 홍보 영상이 지나가지만 멍한 머리는 그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 현관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어, 성좌님?”
“왜 그러니?”
소파에 앉아 있는 훤칠한 키의 미남.
웃는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가 소파의 옆 자리를 톡톡 두드린다.
그러나 오늘따라 요동치는 감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무슨 일 있니?”
소파에서 살며시 일어나 손을 잡아오는 그 자상하기 그지 없는 모습.
손등으로 느껴지는 따듯한 체온과 든든한 손아귀 때문에 속에 담아둔 말을 더욱 꺼낼 수 없었다.
마네킹을 향해 목검을 휘두르고 표적지에 사격 훈련을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
사람에게 총을 겨누는 감각이 무서웠다고.
고작해야 마취총이고, 그 마저도 방패에 쐈다.
바늘이 피부에 박힌 것도 아니고 특성의 효과로 잠깐 잠들었을 뿐.
각성제를 맞고 멀쩡히 일어났으니 별 일은 아니었을거다.
아마 술자리에 가서 신기한 특성을 몸으로 겪었다~ 하고 와하하 웃고 넘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아무리 해 봐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스물스물 안개처럼 끔찍한 생각이 기어나온다.
운동장을 뛰고 법률을 공부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아니 애써 외면했던 생각.
나는 전쟁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자자, 일단 앉으렴.”
힘 없이 마주잡은 손을 따라가자 소파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가 생겨난다.
내가 떠올린 것은 아니니 성좌님이 만들어 주신 게 아닐까.
달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넘어가니 그제서야 입이 열린다.
화신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감사함, 음몽에 대한 죄책감, 교관들과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압박감까지.
그 포근한 미소 때문인지 따스한 품 때문인지 나는 성좌님의 품 안에서 웅얼거리며 모든 심정을 툭 터놓았다.
‘창피해, 여자가 되어서 쪽팔려 뒤질 것 같아...’
이대로 품 안에 안겨 있고 싶다.
어디 망가에서나 나올 법한, 여자를 글러 먹게 만드는 남자.
귓가에 속삭여오는 말을 듣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응석만 부리다가는, 정말 인간 언저리까지 떨어지겠다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끌어안고 뭐든지 괜찮노라 속삭여주는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
품 안에 안겨 불안감을 호소하는 한예지의 모습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아무리 의젓하다고 해도 고등학교 2학년.
18살 여자애한테 총 쥐어주고 가서 괴물 좀 죽이라 하면 누가 좋다고 쏴죽이겠는가.
대테러 영상에 마음이 쏠리는 것도 그런 거겠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범죄자를 제압하는 것에는 그만큼 커다란 격차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사람도 죽여보면 별 거 아니라 할 수도 없고.’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배수관 때문에, 통조림 때문에,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때문에 죽인 사람이 몇 명이던가.
낡은 쇠파이프로 머리를 깨고 금속 조각 벼려 만든 칼로 옆구리를 쑤시고.
비대한 살덩어리가 된 크리쳐들은 잘 죽지도 않아서 몇 번이고 찌르다 망치를 구해와서 다진 고기로 만든 적도 있다.
그리고 그건 내 사정이고, 한예지는 전혀 달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던 여고생한테 칼 한자루 쥐고 괴물과의 전쟁에 내보내면 멀쩡할까?
근접 무기던 총기던 전방 전쟁으로 보내면 PTSD 걸려서 정신병 걸리는 미래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들도 지하 골방 구석에 쪼그려서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죽어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첫 번째 화신이니 안전함을 핑계로 내륙 쪽으로 보내는 게 좋겠지. 남동생도 돌봐줘야 할 거 아니야.
일단, 자괴감과 창피함과 공포심으로 쭈그러든 한예지에게 기를 불어 넣는게 먼저겠지만.
소파에 앉아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른 세수를 하는 한예지를 옆에서 어깨동무 하듯 껴안는다.
품 안에서 작은 소동물처럼 움찔거리는 그녀.
그대로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소근거린다.
“늘 말했잖니. 나는 괜찮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하구나.”
“그래도, 제가 너무 한심한 것 같아서...”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들어간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이라 해도 가슴 한 편에 숨겨둔 어둠이 있다는 것처럼.
하기야 부모도 없이 남매 둘이서 보조금과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던 상황.
화신으로 선택되기 이전부터, 한예지의 속이 곪아들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고작 대화 몇 번에 치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다음 화신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다.
시간이 많은 만큼 매일 밤 달래주면 되겠지.
얼굴을 가린 손을 부드럽게 쥐어, 그대로 내 심장 쪽으로 이끈다.
이 넓데데한 남자 가슴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지만, 한예지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나보다.
가냘프게 떨던 몸이 다른 의미로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는 사라지고 열기 띈 숨결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나는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선택했단다. 누구보다 괴물을 잘 죽일 것 같은 재능이 아니라.”
거짓말은 아니었다.
선택 장애 끝에 웃는 얼굴이 동료 닮았다 싶어 선택했을 뿐이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벗어 던지니 슬금슬금 성욕이 솟아나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매일 밤 만나 횟수로 치자면 벌써 10회차에 다가가는데 어째 처녀 티를 못 벗어 던지는지.
고작해야 가슴팍에 손바닥 하나 올렸다고 손가락에 힘도 못 주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상태로 몸에 힘을 빼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몸이 옆으로 반 쯤 돌아가 어정쩡하게 앉은 한예지가 반응해서 움직일 때 까지 가만히.
나른하기까지 한 따스한 집의 온기 때문일까, 드디어 그녀가 용기를 낸다.
벌벌 떨리는 손이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벗긴다.
어느새 옷이 새하얀 와이셔츠로 변한 모양.
냉정한 시선으로 이렇게 파악하고 있으니 어째 우스꽝스럽지만,
세상 진지하게 단추 하나 하나 풀러가는 그녀를 위해서 참아야겠지.
첫 번째 단추가 풀리고, 두 번째 단추가 풀린다.
옆으로 자연스레 벌어지며 쇄골이 슬며시 드러나는 목깃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춘다.
여기서 단추를 더 풀면 가슴이 아예 드러나기 때문일까.
나는 별 상관 없는데 망설이는 모습이 조금 답답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 미숙하고 풋풋한 것 또한 나름의 맛이 있는데.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나더니 멈춰섰던 다시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가슴팍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이 슬그머니 올라와 마주쳤다.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어보이자 황급히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더니 창피함을 감추려는 듯 손가락에힘을 꾸욱 줘서 단추를 마저 풀어 헤친다.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셔츠 앞자락이 풀리자 드러나는 복근.
이 쪽은 남자의 근육이 성적 매력인걸까, 어째 날이 갈수록 복근과 가슴 근육이 곱게 갈라지는 것 같은데.
아니면 한예지가 남자의 몸에 익숙해지며 조금씩 더 정확하게 상상하는 것 일지도 모르지.
“자아, 말했잖니. 괜찮다고.”
양 팔을 벌리고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드디어 망설임을 떨쳐내고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여태 모든 꿈에서 그러하였듯이 내 품 안에 얼굴을 묻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