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화 : 실험
해야 할 일이 생기니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작해야 아카데미나 살펴보며 서로 물고 빠는 남녀를 찾아 상점 하나를 받는 것보다는, 권능에 대해 파헤치는 게 나으니까.
물론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래, 그래... 수고 많았다.”
“으으... 성좌님.”
이제는 말도 없이 파김치처럼 푹 늘어져 있는 한예지를 달래는 일이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 10시가 될 때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교관들에게 끌려다녔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교관이 코 앞에서 지도를 하니 요령도 피우지 못하고.
평소라면 자정 좀 넘은 시간까지 할 일을 하다 침대에 눕던 그녀지만
오늘은 돌아와서 씻고 11시가 되기 전에 그대로 침대에 직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일 연속으로 교관에게 휘둘리는 것은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했는지 꿈속 세상도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늘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침실이 아니라 청소 안 한 자취방처럼 변해 있으니까.
첫날과 같은 아파트, 하지만 신발장에는 운동화와 구두들이 중구난방으로 벗어 던져져 있었고,
화장실 문은 열려 있으며 입구에 물이 튀어 있었다.
젖은 수건이 화장실 앞에 널브러져 있는 모양새.
안방과 작은 방문을 열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벗어 던진 옷들이 있지 않을까.
편해 보이는 훈련용 스포츠 속옷을 착용하고 소파에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한예지의 모습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꿈이라고 악취가 나거나 벌레들이 기어 다니지 않는다는 정도.
옷이나 책, 책가방과 학교 가정통신문, 신문 등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 먹다 남은 음식은 없었으니 참을 만했다.
소파에 옆으로 드러누운 한예지의 머리를 살짝 들어 그 아래에 앉는다.
허벅지를 베게 해 주었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봐선 정말 어지간히 지쳤나 보네.
남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벗어던지지 못해 포옹만 해도 뒷목과 귀가 시뻘겋게 변하더니, 오늘은 무릎 베개에도 반응이 없다.
지직거리는 TV를 리모컨으로 꺼버린다.
자각몽의 주인인 한예지가 잠들거나, 이렇게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으면 꿈의 주도권이 어느 정도 내게 오는 것 같았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한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더 확실해진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깨달아 가는 감각은 참으로 기묘하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는 한예지의 꿈을 건드린다.
널브러진 속옷과 벗어 던진 교복, 젖은 수건이 사라진다.
머리카락과 먼지로 지저분하던 바닥이 말끔하게 물걸레질이 되고 어둑어둑하던 세상이 조금 밝아지도록.
뽀송뽀송한 여름 햇살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공존하는 나른한 세상을 만들었다.
쾌적한 공기가 만족스럽다는 것처럼 내 허리로 뻗어오는 한예지의 양 팔.
드러누워서 머리맡 베개 껴안듯 나를 끌어안는 자세.
저러고 자면 허리가 아플 것 같은데.
잠이 들면서 힘이 빠진 그녀의 팔을 풀어내고, 바른 자세로 뉘어준다.
한예지가 교관에게 시달릴 때, 나는 악몽을 꿔 보고자 원룸에서 눈을 감았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악몽의 편린 자체가 자각몽으로 얻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자각몽 속에서 내가 한예지보다 먼저 잠들면 악몽은 발현되지 않는 걸까?
그건 나중에 실험해 봐야겠다.
창밖에서 내리쬐는 뜨끈한 햇볕, 에어컨은 없지만,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고롱고롱 작게 콧소리를 내며 바른 자세로 잠든 한예지와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허벅지의 따듯한 체온.
나 또한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드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
내가 세운 가설은 간단했다.
나는 몽마고, 자각몽은 꿈을 다루는 기초 권능이다.
3,000pt 아래의 권능은 단순히 꿈을 꾸게 할 뿐이니 달콤한 자각몽이 가장 기초적인 권능이겠지.
그리고 지난번 꾸었던 악몽은 나와 한예지의 악몽이 뒤섞인 모양이었다.
아마 자각몽에 들어온 사람들의 악몽을 흡수하는 게 아닐까.
낡은 지하 터널과 콘크리트 미로는 내가 생활하던 모양새 그대로였지만, 괴물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크리쳐들은 방사능과 오염 물질에 육체가 붕괴하여 기괴하게 변이한 살덩이처럼 생겼지,
그 괴물처럼 각 잡힌 근육맨... 근육 우먼?처럼 생기지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제대로 찾아, 안 그러면 다음 제물은 우리다.”
눈을 뜨자 마자 낡은 복도에 고개를 박고 웅크린 상황.
목구멍 속으로 훅 들어오는 먼지 때문에 기침 소리가 새어나간다.
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두 여자는 고개를 숙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떠난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와 랜턴의 불빛.
이번 외출 때, 여객선에서 한예지가 스마트 폰으로 봤던 공포 게임 영상과 똑같은 상황과 대사였다.
랜턴 빛을 안 맞으면 소리를 내도 못 찾는 모습에 가슴 한 켠을 차지한 불안감이 훅 하고 사라진다.
아마 기억을 잃고 책상 밑에서 깨어난 남자가 낡은 저택에서 퍼즐을 풀고 탈출하는 내용의 게임이었지.
교관들의 열성적인 어프로치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는 건지, 두 번의 악몽 모두 누군가에게 쫓기는 내용이네.
그래도 지난번처럼 3m짜리 거대 괴물에게 쫓기는 것보다는, 랜턴을 든 감시자 두 명을 피해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10분 전의 내가 죽도록 미웠다.
‘이번 꿈은 그냥 나가리인데?’
악몽의 난이도 자체는 쉬웠다.
액션 게임보다는 퍼즐 요소에 주력한 게임이라 그런지 랜턴 불빛에 정확히 노출되지 않으면 등 뒤에 있어도 무시하고 지나간다.
퍼즐을 풀기 위해 낡은 문이나 책상을 건드릴 때 나는 끼익하고 울리는 소음도 무시하는 태도까지.
순찰을 하는 두 명은 나를 쫓아오는 추격자 보다, 가려는 길에 있으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방해꾼 수준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경비원 뒤를 따라 걷는다.
낡은 나무 복도가 끼익하고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앞만 랜턴으로 비추기 때문에 여기서 갈라져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들킬 일도 없으니 경비원이 계단을 내려오기 전까지는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된다.
분위기만 으스스하고, 실제로 위협이 될 것은 거의 없는 낡은 저택.
문제는 퍼즐이었다.
낡은 계기판 속에는 회전이 가능한 작은 파이프들을 찾았다.
목표 지점에서 도달 지점까지 파이프를 연결하는 기초적인 퍼즐.
아무튼, 공포 게임 공략 스트리머는 마우스로 붙잡고 휙휙 돌리니 찰칵하고 30초 안에 클리어했지.
그리고 그건 마우스로 붙잡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딴 데서 생생하고 지랄이야!”
괴물에게 쫓기는 공포 게임을 하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잘 달리다 돌멩이를 밟고 혼자 자빠지거나 달리기를 잘 못 해서 발목을 삐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지만 어제의꿈에서는 발밑에 밟히는 날카로운 콘크리트 파편과 금 가고 깨진 웅덩이가 내 달리기를 방해했지.
그것과 마찬가지다.
낡은 저택답게 낡고 녹슨 금속판과 그 안에 들어 있는 5x5, 25개의 녹슨 파이프.
손으로 붙잡고 하나하나 돌려보지만 끼기긱 소리를 내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음매에 녹이 잔뜩 슬었는데 윤활유 없이 돌아갈 리가 없다. 지식이 있어도 풀지 못하는 퍼즐.
설마 악몽이라 이런 건가?
아무 이유 없어 공격당하거나 쫒기거나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헤메거나 하니 악몽인걸까.
여기를 벗어나서 다른 퍼즐을 찾아볼 까 하다가도,
어차피 다른 방문 열쇠가 이 안에 있다는 걸 떠올리니 의욕이 팍 사라진다.
꼼수로 풀어가는 걸 막기 위한 디자인인지, 문 하나를 열면 다른 문 열쇠가 있는 방식이었던가.
그러니 이 계기판 퍼즐을 풀지 못하면 다른 퍼즐은 근처에도 못 간다.
손가락만 한 파이프 주제에 건장한 성인 남성의 체중을 실어도 내려가질 않고,
짜증이 나서 저택 내부에 있던 창틀 같은 것을 뜯어와 후려쳐도 흠집만 나는 상황.
나는 퍼즐의 클리어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히 꿈속에서 악몽의 편린을 찾는 것이 아니었구나.
남아 도는 시간동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고민을 해 본다.
어제와 오늘, 다른 점이 뭐지? 응석 부리는 건 똑같고, 대화를 별로 안 했지.
섹스는 어제도 안 했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자 떠오르는 것은 별로 없었다.
설마 에어컨 바람 따위의 사소한 일은 아닐 거 아냐.
순찰을 도는 두 여자가 열 바퀴 넘게 퀴즈 존 앞을 지나다니는 동안 딱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한예지의 악몽이라 이렇게 된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는데.
자각몽 속에서 악몽을 컨트롤 하라고 할 수 없잖아.
아니면 권능을 사용한 게 한예지여서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내가 직접 권능을 사용해 한예지의 악몽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까?
퍼즐을 풀다 잡혀 게임 오버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인지 퍼즐 판 앞으로는 순찰을 오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생각 할 수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랜턴 불빛에 몸을 던지기에는, 내가 겁이 너무 많았으니까.
또각또각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자장가 삼고 낡은 카펫을 이불 삼아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자각몽 속의 악몽 속에서, 나는 다시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설마 꿈속의 꿈속의 꿈까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나니, 한예지는 이상한 사람에게 붙잡혀 주 무기로 총을 강요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