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화 : 꿈 속의 꿈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 중요한 선택.
고등학교 가정통신문에 장래희망을 써 내려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중한 결정이다.
20살 넘어 술 마시고 고민하고 상담을 받아도 자신의 미래를 확고하게 정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고등학생이야 말해 무엇하랴.
“성좌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 그런지, 오늘의 한예지는 응석이 한층 더 심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다른 것도 전부 잊고 그대로 내 품 안으로 뛰어들더니 빠른 속도로 중얼거린다.
“성좌 님이 저를 존중해 주시고 믿어 주시는 건 알겠지만, 저는 성좌 님이 정해주시면 좋겠어요. 첫 번째 화신이잖아요. 제가 잘못하면 성좌 님은 어떻게 해요.”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웅얼거린다.
달싹거리며 빠르게 움직이는 입술에서 나오는 숨결은 얇디얇은 셔츠 한 장 차림으로 막기 힘들었다.
목 늘어난 반소매 티에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 차림이라니, 현실감 넘치는 복장이네.
“네 말대로, 너는 나의 첫 번째 화신이란다. 나는 네가 원하는 길로 갔으면 해서 그렇게 말 한 건데...”
“그래도, 성좌님... 여자로서 못난 소리인 건 알아요. 하지만 불안감이 사라지질 않는걸요. 제가 잘못해서 성좌 님의 포인트를 날려 먹는다면 너무 죄송할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나 했더니 성좌와 화신의 관계와 포인트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구나.
하기야 성좌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몰라도 입 가벼운 녀석 한 명은 있겠지.
아니면 성좌가 화신에게 상담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성좌는 살아남은 쪽이고, 화신들은 재능이 뛰어난 쪽이니까.
머리 쓰는 게 어렵다고 생각한 성좌 중 하나가
자신의 화신에게 다 털어놓고 컨설팅을 받는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 과정에서 성좌와 화신의 포인트 순환 과정이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고.
“포인트야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데, 네게 너무 부담을 준 것 같구나.”
팔다리를 전부 써서 나무늘보처럼 엉겨 붙는 한예지의 등을 토닥여 준다.
남성의 품에 안겼다는 부끄러움도 하나 없이 그 작은 입술을 쫑알거리는 것을 보면 부담감이 내 생각보다 컸나 보다.
하기야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한예지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솔직히... 교관님들이 좀 무서워요. 교관님들 마다 담당 길드가 있어서 그런지 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엄청 열성적이셔서...”
“그래, 그래. 힘들었겠구나.”
화신과 길드.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의 이야기여서 그녀의 뒷머리와 등을 꼬옥 포옹해 말을 얼버무린다.
화신들끼리 뭉쳐 길드를 만들고, 국가와 계약을 해 대륙 외각의 수비 장벽에 파견을 나가거나 내륙 순찰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딱 그정도. 화신들이 길드로 뭉쳐 계약하고 다닌다는 점 밖에 모른다.
축구 선수들처럼 이적하고 돈이 오가고 스카우터가 있고 그런 걸까?
사실 스포츠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이적료 같은 단어만 신문 표지에서 몇 번 본 게 전부니까. 그래서 나는 대꾸 없이 한예지를 그저 토닥였다.
세 교관 사이에 껴서, 험악한 그들의 자존심 대결에 심력을 소모했는지 오늘은 아무런 일 없이 내 품에 안겨 고른 숨을 내쉬는 그녀.
여 교관 둘에 남 교관 하나.
근접 무기술을 가르치는 무투파
마법 기초 이론을 가르치는 화신
아카데미 총화기의 관리를 맡은 군 관련 장교까지.
사이가 좋다고 보기 힘든 조합이긴 했다.
거기에 교관직과 스카우터 역할을 동시에 맡은 사람들답게 혓바닥이 아주 노련했지.
근접 무기술 교관은 여자는 근육이라며 최전방을 수호하는 여자다운 이미지로 한예지의 영웅 심리를 자극하려 들었다.
최전방이 아니더라도 내륙 침략 상황 때 가족 하나는 확실히 지킬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초 마법 교관은 반대로 한예지가 첫 번째 화신임을 강조하며, 화신과 성좌의 끈끈한 유대감을 강조했다.
마법 교관도 화신인지라 첫 번째 교류가 얼마나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설명하는 쪽으로.
마지막이자 청일점인 사격술 교관.
화신 지원과 길드 지원과 군 지원을 전부 뭉뚱그려 받을 수 있는 국가 계약직 길드를 여러 개 소개해 줌과 동시에,
가장 안전한 곳에서 화력 지원을 하라고 꼬드기는 상황이다. 가족인 남동생을 들먹이면서.
“누구 하나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 은...데.”
“복잡한 생각 말고 푸욱 쉬렴.”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이번에는 침대방이 아니라 온돌에 솜이불이 있는 따끈따끈한 안방의 모양새였다.
이러니까 이렇게 얇은 옷을 입었지.
뜨끈한 온돌, 폭신한 솜이불, 얇은 반소매 반바지 때문에 맞닿아 있는 보드랍고 뜨거운 살결.
고른 숨소리가 들려 품 안의 한예지를 내려다보니 내 명치쯤에 팔을 꼬옥 두르고 그대로 잠이 든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교관들 신경전 틈바구니에 내버려 둔 것이 조금 미안해져서, 그대로 끌어안고 나도 눈을 감았다.
혼자 자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끌어안고 자는 것이 덜 외로우니까.
※
멍한 머리를 붙잡고 시선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린다.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지저분한 천장.
쩍쩍 갈라진 틈바구니에 피어오른 푸른 형광색 이끼.
녹슬어 깨지고 박살 난 배수관.
파이프를 타고 울려 퍼지는 음울한 크리쳐들의 합창곡.
낡은 천을 찢어 만든 손잡이.
크리처의 파랑 초록 알록달록한 체액으로 더럽혀진 쇠 파이프.
익숙하다 못해 끔찍한 공기가 코를 통해 폐부로 스며들자마자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꿈속의 꿈
몽중몽(夢中夢)
쇠 파이프를 쥔 손이 조금만 더 주름졌다면, 내딛는 걸음이 조금 더 비실거렸다면,
시야가 조금 더 낮고 구부정한 자세였다면 속아버렸을 정도로 생생한 악몽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혼잣말이 생각보다 커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고작 몇 달 안락한 곳에서 지냈다고 안일해졌다는 생각과 그래 봐야 꿈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굶주리고 늙어가는, 근육 쪽 빠진 나약한 몸뚱어리가 아니다.
손안의 쇠 파이프가 끼긱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쥘 수 있는 강인한 육체.
...한예지가 쇼타콘이 아니라서 진짜 다행이다.
복부의 식스팩을 시작으로 넓은 어깨에 잘 빠진 팔 근육, 단단한 근육질의 허벅지와 훤칠하게 큰 키 까지.
다리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거근을 생각한다면 여러 의미로 여자에게 좋은 육체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지하 통로를 걸었다.
근처에 발전기가 돌아가는 구역이 있는지 어두침침한 터널 군데군데에 낡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차박 차박, 물기 젖은 콘크리트를 피해 발소리를 줄인다.
들이쉬고 마시는 숨결조차 느릿하게 행해 숨소리도
내 심장 박동도 최소한으로 줄이며 나는 낡은 통로를 걸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전기가 있다는 것은 발전기 소음을 내면서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대 집단이 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사람이 돌아다니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차라리 조명이 없어 암적응을 하는 게 낫지
간헐적으로 켜져 있는 조명은 오히려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된다.
조명과 조명 사이의 어둠 속에 어떤 녀석이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개꿈인가?’
너무 오랜만에 걷는지라 실수가 잦았다.
발아래에 있는 콘크리트 조각을 걷어찼다가 복도에 따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고,
조명과 조명 사이의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하 통로는 고요하기만 했다.
슬슬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삶을 포기한 부랑자나, 변이 때문에 추방된 크리쳐들이 한두 명은 나올 법한데.
꿈속 강인한 육체와 지치지 않는 체력 때문인지 솟아난 자신감에 발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이렇게 걷기만 할 뿐인 꿈을 꿀 거라면, 차라리 빨리 깨서 한예지의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꿈속에서는 한예지를 잘 유도하면 카페나 분식 등 성좌 단칸방 냉장고에 없는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저 멀리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숨길 생각도 없는 커다란 발소리,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먼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그륵 거리는 기괴한 소음까지.
“...이건 또, 무슨, 씨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깜빡거리는 조명 저 너머에서 거대한 발이 먼저 등장한다.
두 개의 발가락이 발굽처럼 있는 거대한 발, 핏줄이 근육처럼 도드라진 두꺼운 허벅지와 무릎,
헤진 거적때기로 허리춤만 겨우 가린 하반신과 그 위로 이어지는 대들보처럼 두꺼운 허리.
“나으암, 자?”
거기까지 보고, 나는 주저 없이 등을 돌려달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없지만, 저 정도 크기, 조명에 머리가 닿을 3m 크기의 크리쳐는
사제 총기를 든 집단을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어 봤으니까.
아무리 식스팩이 있고 체력이 온전하다 해도 쇠 파이프 하나 들고 싸울 상대가 아니다.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포효는 없었다.
다만 그륵 그륵 거리는 끔찍한 가래 끓는 소리가 조금씩 다가올 뿐.
3m의 덩치, 무게는 거의 1t이 되지 않을까 싶은 근육질 피부 울룩불룩한 핏줄.
혈관이 도드라진 살덩어리 괴물이 전력으로 달려오는데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널려 있고 웅덩이가 이곳저곳 패여 있는 울퉁불퉁한 길이다.
이런 곳에서 뒤를 돌아보며 전력 질주를 할 자신 따위는 없다.
붙잡히면 끔찍한 꼴을 당하겠지.
조명이 한 번 깜빡거릴 때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진다.
그것이 꿈이라 할지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평온한 숨소리 사이에서 갑작스레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고, 뒷골에 소름이 훅 돋아 앞으로 넘어지듯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묵직한 무게감과, 흐릿한 조명을 잠시나마 완전히 가려버리는 거대한 그림자.
한 손으로 나를 쥘 수 있는 크기인데?
이대로 달리다가는 따라 잡힐 것 같아 미로처럼 얽힌 통로에서 벽을 박차며 골목길로 향한다.
속도를 유지한 채 오른쪽 왼쪽 마구잡이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다 보니 디딤발이 된 종아리가 터질 것같이 아프다.
몇 번이나 피했는지, 어디를 어떻게 꺾어 들어갔는지 까먹었을 즈음, 저 앞에서 기이한 색의 아지랑이가 보인다.
그와 동시에 그우욱, 하고 기묘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그 작은 발소리마저 사라진다.
조명과 조명 사이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뒤쪽을 한참 주시했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다시 고요해질 때까지.
괴물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라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기묘한 아지랑이로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벽면에 낡은 계기판이나 두꺼비 집 같은 게 있어야 하는 모양새지만
이 벽에는 주먹만 한 유리 조각이 있었다.
설마, 이거...
손을 뻗어 파편을 집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메시지.
[악몽의 편린을 획득하였습니다.]
[악몽의 편린은 몽마가 다룰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근원입니다.]
“아니 씨발, 공포 게임이냐고...”
미로를 헤매는 플레이어와 랜덤하게 돌아다니는 무적의 괴물.
그리고 미로 어딘가에 있는 목표.
아무리 생각해도 방송으로 몇 번 접해 보았던 공포 게임과 같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