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1화 : 개화
치킨을 시켜 먹으며 TV 예능을 보다, 수다를 떨고 컴퓨터를 하고.
학생의 휴일답게 집 안에 푹 늘어져서 금토일 3일의 외출을 알차게 보낸 한예지가 다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무기력한 악몽이 푹 쉬었냐고 안부 인사를 건넵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한예지를 구경하고 있었지만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는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야 심심해서 한예지에게 화면을 붙여 놓고 멍하니 있었다지만, 당하는 처지에서는 불쾌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꿈속에서 몸을 섞는 사이라 해도 24시간 내내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무섭지 않을까?
아니면 내 원래 세상 종교인들이 신께서 인간의 행동을 기록한다고 믿는 것처럼 성좌는 예외로 두고 있으려나.
“한예지 생도, 복귀 확인되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길 또한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항구에서 유람선에 탈 때 아카데미 학생증과 외출증을 검사하고,
또 내부에서 음식 제공을 명목으로 검사하고,
내릴 때 다시 검사하고, 아카데미 정문에서 다시 검사하고.
이 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이 얼마나 아카데미를 노렸길래 이런 히스테릭한 검문을 하는 걸까.
해소할 수 없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다시 아카데미의 날이 밝았다.
기초 체력 단련과 화신 특별법을 끝마친 한예지가 9월에 선택한 과목은 기초 무기술과 기초 전술 전략.
이름 그대로 ‘기초’기 때문에 졸업 학점 중 고정된 50점을 세 달 만에 채우는 것이었다.
물론 합격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내가 살던 세상이라면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이 총을 쏘고 주특기에 매진했겠지만, 이쪽 세상은 다르다.
말 그대로 창과 칼, 방패를 들고 몸으로 뛰니 체력 테스트의 기준이 아주 엄격한 상태.
권능을 받지 않았다는 조건으로 100m 달리기 남녀 분간 없이 13초를 찍지 못하면 탈락,
오래달리기 3km를 13분 이내에 못 들어오면 또 탈락.
그 외에도 군장을 메고 계단을 오르거나 밧줄에 매달리기 등 엄청나게 많은 항목을 전부 통과해야 한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은 수치인데...
아무튼 가끔 빠방한 지원으로 시작부터 권능을 받은 녀석들은 한 달만에 통과한다고 하지만 한예지는 두 달째에 통과했다.
6월에 계약, 7월에 입학 및 기초 훈련 시작, 8월 말에 통과.
월초에 들어와 월말에 통과하는 엘리트보단 당연히 느리지만, 다른 의지박약 화신들이나 체력이 부족한 화신보다는 빠른 상황.
입학식 때 봤던 경도 비만 화신 같은 애들은 다른 과목을 미리 따고, 체력 단련을 반년에서 일 년 질질 끄는 일도 있다던데.
한예지는 나름의 아르바이트와 운동으로 계약 전부터 몸이 탄탄해서 그런지 두 달 만에 통과하였다.
거기에 법률 같은 이론 시험도 바로 통과했고.
이제 흐느적거리며 탈진 직전까지 운동장을 도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지만...
“무슨 무기를 골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 마라, 아카데미는 1년이고 10년이고 너희에게 연습용 무기를 쥐여 줄 테니까.”
씨익, 하고 사악하게 웃는 여 교관의 머리 위로, 8월의 땡볕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도넛 모양의 기이한 대륙이라도 8월이 제일 더운 것은 똑같은지 운동장에서는 아지랑이까지 보이는 수준.
거대한 아카데미에 걸맞게 수준 높은 의료진이 대기 중이고,
사람 굴리는 스페셜리스트인 교관들이 적절히 훈련을 시킨다지만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운동장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잘 모르겠으면 검이라도 잡아! 아니면 성좌 님께 빌어보기라도 하던가! 앞으로 5분 뒤, 가만히 있는 연놈들은 다시 운동장 뛸 줄 알고!”
친절하고 상냥한 교육 같은 건 없었다.
이제 우르르 흩어진 화신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무기를 들고 열심히 마네킹을 상대로 휘두르게 될 테니까.
권능 지원을 받는 게 약속 된 건지, 성좌와 상담이라도 미리 했는지 곧바로 무기를 고르는 사람도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왕좌왕 고민하다 목검이나 창을 집는다.
가장 기초적인 무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보급품이 제일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예지도 목검을 하나 골라 쥐고 운동장 한구석에 세워진 마네킹 앞으로 향한다.
몽마와 무기술, 딱 봐도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니 도와줄 수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9월 기본 포인트 1,000pt 뿐.
고작 1,000pt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은 달콤한 자각몽의 명백한 하위 호환들뿐이다.
자각몽이 3,000pt인 만큼, 그 아래는 대부분 단순한 악몽이나 음몽 정도의 가벼운 기술들뿐이니까.
지금 저걸 구매한다면 한예지 주변 사람들이 악몽을 꾸게 하거나 야한 꿈을 꾸게 할 수 있지만,
그딴 걸 위해 1,000pt를 사용할 이유가 있겠는가?
슈슈욱, 하고 휘둘러지는 목검.
검을 휘두르는 모습보다는 방망이를 휘두르는 엉성한 자세였지만,
기본적인 체력이 있다 보니 바람을 가르고 마네킹을 후려쳐 따당 울리는 하나는 매서웠다.
음, 따당?
[화신 한예지가 몽마의 첫 번째 정을 완전히 소화하였습니다]
[재능 개화 : 환(幻)]
근처를 지나가던 교관의 고개가 부러질 듯 확 꺾더니 후다닥 달려온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상황 파악도 못한 한예지가 고개가 움츠러들 정도로 강렬하게.
“한예지 생도, 다시 한번 휘둘러 보도록.”
“어, 아, 예!”
그제야 시야 한구석의 시스템 메시지를 봤는지 황급히 다시 자세를 잡지만, 엉성한 건 그대로였다.
다시 한번 목검이 바람을 가르고, 마네킹을 후려친다.
고요해진 운동장에 명백하게 울려 퍼지는 두 번의 소리.
교관이 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주변 화신들도 숙덕대기 시작한다.
“검 말고, 다른 무기도 하나씩 전부 들고 와 봐.”
“네!”
어느새 무기 휘두르는 걸 멈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예지가 후다닥 달려가 나무 무기를 한 아름 안고 온다.
2m 정도 되는 길쭉한 나무 봉부터 연습용 무기보다는 공구 닮은 짧은 한 손 메이스까지.
“엄지를 이쪽으로, 양손 간격 조금 더 벌리고,왼발 뒤로 조금 더 빼서, 찔러!”
“그다음에는 그대로 잡고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옆으로 휘둘러, 그래, 그렇지!”
“벽에 못 박는다 생각하고 망치질하듯 붙잡고 마네킹 머리에 휘둘러라.”
권능의 실험에 조금 익숙한 교관인지, 다양한 지시를 내린다.
정자세로 무기를 무기답게 사용해 타격하는 것부터, 파지법도 없이 대충 잡고 휘둘러 후려치는 식까지 하나하나 실험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 봉으로 마네킹의 가슴을 후려치자 뒤로 넘어갔다 돌아오던 마네킹이 허공에서 떠밀린 것처럼 한 번 멈칫거린다.
메이스로 정수리를 내리치자 아래로 푹 꺾이던 마네킹의 머리 부분이 위로 휙 치솟는다.
“흐음... 다 내려놓고 따라와라.”
그 모습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지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교관의 얼굴 하나만으로 가볍게 진압된다.
※
세 명의 교관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한예지가 허공에 말을 건다.
정확히는, 내게 말을 건다.
“성좌 님 생각은 어떠세요?”
[무기력한 악몽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물론, 정하기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도 한예지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교관처럼 고민하고 있을 뿐.
한예지의 특성인 환(幻)은 이름과 연관도 없이 공격에 추가 1타를 보정해 주는 특성이었다.
원래 환검, 환술이면 눈속임이 국룰 아닌가?
무협지의 환검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정말 모든 공격이 한 번 더해지는 상황.
운동장에서 벗어나 사격장으로 향해 활과 석궁을 발사해보니 화살 한 방에 구멍이 두 개씩 뚫렸다.
심지어 비 마법적이라는 이유로 화신과 성좌들이 꺼리는 총기와 소모품인 마법 스크롤 같은 물건도 마찬가지.
소모품마저 공격 관련된 물건이라면 권능이 통하는 무시무시한 상황 때문에
교관들이 한예지의 진로를 놓고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근접 직군으로 가야지! 추가 타격 위치가 랜덤 패턴인 거 안 보여? 검술이든 창술이든 뭐 하나만 붙잡고 기본기만 충실히 익혀도 어지간한 녀석들은 못 막아! 기본기만 닦아도 변칙성이 보장되는데 무슨 헛소리들을 하고 있어?”
“아니, 추가 타수가 있는데 근접 직군이라뇨? 계약 한 성좌 님도 육체파가 아니신데, 당연히 마법과 권능 특화로 가야죠. 공격에만 통한다니까 악몽의 성좌님 답게 광역 디버프를 2 중첩으로 걸어도 전쟁에서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데!”
“저기요, 전장에서 영향력 따질 거면 당연히 거너 쪽으로 와야죠. 성좌 님이 내려주시는 권능과 달리 특성은 성장할 수 있는 거 몰라요? 칼질 한 번, 마법 한 번 더 쓸 바에는 고폭탄이나 특수 마법 탄환 비싼 놈으로 쏴 재끼는 게 낫지.”
세 사람의 말은 전부 일리가 있어서, 한예지도 나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접 직군으로 가면 소형, 인간형 괴수들이나 화신과 싸울 때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무기끼리 한 번 충돌했는데 추가로 한 번, 두 번 충격이 몸에 들어오면 자세가 무너지게 될 테니까.
마법 직군으로 가면 게임처럼 대규모 전쟁에서 엄청나게 환영을 받을 것이다.
한 번 펼쳤는데 여러 번 날아오는 화력 지원이나 광역 저주, 디버프는 1:1보다 대규모전쟁에 특화되었으니까.
거기에 내가 ‘무기력한 악몽’ 이라 포인트 상점에서 저주 관련된 게 더 찾기 쉬울 것 같기도 하다.
지금 1,000pt 이하의 물품만 봐도 악몽과 음몽을 꾸게 하는 저주만 있는 상황.
마지막으로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거너 직군.
유일한 남 교관의 말대로, 특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거너가 맞는 것 같다.
돈 지랄이긴 하지만 특수 처리된 비싼 총알을 기관총에 처박고1초에 20발씩 갈겨버리면?
한예지가 방아쇠를 당긴 것만으로 초당 발사 총알이 두 배, 세 배가 되는 마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거대종 레이드 때 어마어마한 화력을 뽐낼 수 있겠지.
소형 엘리트 몹과 PVP 특화, 대규모 전쟁 디버프 특화, 보스 레이드 극딜 특화.
게임이라 생각하면 어느 하나를 고르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은근히 결정 장애가 있으니까-
[무기력한 악몽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무기력한 악몽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무기력한 악몽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열띤 토론이 끝나지 않는 교관들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눈이 시커멓게 죽어가는 모습에 양심이 조금 찔려온다.
어차피 오늘 밤 꿈에서 풀어주면 되겠지.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 앞에서 떠나 냉장고 문을 열고 깨달았다.
몽마의 정을 소화해서 특성을 얻었다는 것은, 나와의 섹스 때문이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다른 화신을 만든다고 치면, 자각몽을 한예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사용했어야 하는 건가?
매번 3천 포인트씩 써서 기초 스킬처럼 나눠주면 낭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