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화 : 외출
하룻밤의 달콤한 꿈을 꾸었다 해서 일상이 쉽사리 바뀌지는 않는다.
“한예지 생도, 외출증 확인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피로는 확실하게 해소된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운동, 식사, 이론 수업이라는 끔찍한 3단 콤보 때문에 졸다가 지적을 당해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화신의 의무에 대한 이론 강의를 듣는 모습.
화신들의 절반 이상이 고개를 흔들고 조는 것과 대비된다.
꿈에서 성욕과 스트레스와 피로를 전부 털어내고 가서 교관이 봐주는 일 없어도 벌점이 쌓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한예지와 같은 이론 수업을 듣는 몇 명의 화신들은 그녀를 질투한다.
같이 졸던 녀석이 말끔해진 걸 보고 벌써 성좌에게 정신 집중에 관한 권능을 하사받았다 지레짐작해서.
대부분의 성좌가 화신의 전투력과 특기에 관련되어서 권능을 내려주지,
고작 화신 특별법 같은 것 때문에 일찌감치 권능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에 생긴 질투다.
막말로 체력과 법률 등 기초 점수만 채우고 나머지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면 포인트가 낭비되니까.
[무기력한 악몽이 당신의 일정을 궁금해합니다.]
“예, 뭐 간만에 동생 얼굴도 보고 집밥 먹고... 게임 좀 하려구요 헤헤.”
섬의 아카데미만큼 거대한 선착장에서, 한예지가 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허공에 중얼거린다.
그렇다고 해서 미친년처럼 바라보는 모습은 없었다.
선착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허공에 중얼거리고 있었으니까.
[무기력한 악몽이 집단 혼잣말을 보고 정신병원 같다 느낍니다]
“어, 그런가요? 하긴 다들 허공에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이니... 그걸로 화신인 척 사기 치는 사람도 있었다던데. 그 이후로 성좌 님이 화신 말고 근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셨대요.”
장난삼아서 채팅을 치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돌아온다.
성좌가 존재하고 그들의 권능과 이계의 괴물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적 존재를 사칭하는 간 큰 놈이 있기는 하구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저 멀리서 거대한 유람선이 다가온다.
어지간한 건물 크기만큼 거대한 초호화 유람선.
아카데미 접근 권한을 받은 네 대의 배 중 하나.
동서남북 네 개의 대륙마다 하나씩 운영하는 이 유람선은 선장부터 선원과 종업원들 또한 전부 화신인, 내해를 떠다니는 거대 요새였다.
이 세상이 얼마나 성좌와 화신과 그들의 교육 기관을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첫 외출이시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유람선 내부에서도 ”
“감사합니다.”
[무기력한 악몽이 화신에게 푹 쉬라고 조언합니다]
제복을 차려입은 화신 둘이 특이하게 생긴 기계로 외출증을 스캔한다.
들어오는 것 말고 나가는 것도 엄청 엄중하게 검사하네.
탕 탕,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예지가 금속 가교 위를 걷는다.
유람선이 거대하다 보니 승강장과 유람선을 이어주는 금속 가교도 어지간한 육교 크기다.
외출증을 받은 학생들 말고도 교관부터 공무원까지 수백 단위의 사람들이 그 위를 오간다.
서류 가방을 든 양복 차림의 여자들,
교관 제복을 그대로 입고 나가는 한 무리의 남녀들,
쫙 달라붙는 바지에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남자들,
거기에 시선이 콕 박혀 입에 헤 벌어지는 여자 생도들까지.
한 달 내내 책을 붙잡고 운동장을 달리는 모습만 봐 오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내 화신이 아카데미에서 구르는 중인데 세계 구경을 할 맛은 나지 않아서 한동안 아카데미만 둘러 봤으니까.
아카데미에 올 때 한 번 탑승했던 유람선이지만, 고작 한 번의 탑승으로 돌아보기에는 유람선이 너무 거대했다.
평범하게 1년 졸업을 하면 유람선의 절반도 구경 못하고 졸업한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니까.
화려한 조명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감싸고 아름다운 조각품과 실내 분수까지 있다지만, 아름다움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외출 준비를 하고 외출증 검사에, 항구에서 검사를 여러 차례 하니 미리 아침 식사를 못한 상태.
아침도 굶은 와중에 조각상과 분수대를 감상이나 하고 있겠는가.
주린 배를 채우러 발걸음을 옮기지.
멋들어지게 꾸며진 유람선이지만, 한예지는 여자답게 예술과 아름다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지난번 봤던 생도용 카페로 발걸음을 옮길 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아니면 그냥 사람이 많은지 한예지가 가는 길에는 사람이 잔뜩 있었다.
탄산음료에 수제 햄버거.
간단한 요깃거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열심히 스마트폰을 보는 한예지의 모습을 마우스로 최대한 확대했다.
마우스 하나로 이동부터 확대, 축소에 시야각 회전까지 해야 해서 불편하지만
이미 3달 내내 만지작거려서 어느 정도 숙달된 상태.
그나저나 정보를 얻는 방법이 이렇게 남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법밖에 없다니.
성좌를 위한 인터넷 연결 서비스 같은 거라도 찾아봐야겠다.
왼손에는 햄버거, 오른손에는 스마트폰.
조금 긴 항해 시간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아니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못 본 인터넷 콘텐츠라도 있는지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한예지가 갑자기 슬글슬금 주변 눈치를 본다.
‘어우, 씨발거...’
무슨 일인가 싶어 한예지와시야각을 동일하게 맞추고 스마트폰을 확대해 보니 화면에 끔찍한 것이 확대되어 등장한다.
TV 화면에 내 얼굴보다 커다랗게 등장한 남자의 삼각팬티.
‘좆 같네 진짜...’
수영복을 입고 촬영한 남자 화신의 19금 잡지 표지를 보자 역겨움이 훅 밀려온다.
전생에 야한 달력 사진 같은 걸 보고 역겹다 한 여자 방랑자가 생각나네.
그 여자들도 섹시 슬링 수영복이나 마이크로 비키니 같은 걸 보고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어디 유머 사이트에 홍보성 글로 올라왔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한예지가 후다닥 다른 글로 넘어간다.
그래도 대놓고 음란 사이트를 보는 건 아닌지 다음 글은 내가 모르는 예능에 관한 게시글이었다.
어째서인지, 오늘 밤에는 수영복을 입게 될 것 같았다.
※
그렇게 자리에 없는 척 채팅도 치지 않고 조용히 한예지가 인터넷 하는 것을 엿보는 동안, 배는 순조롭게 동대륙으로 향했다.
이제 곧 항구에 도착해서 외출증을 또 검사받고, 집 근처까지 가는 셔틀 버스를 외출증을 이용해 무료로 타게 되겠지.
그러는 동안 한예지는 지난 몇 달 동안 하지 못했던 스마트폰을 몰아서 하겠다는 것처럼 오른손에서 폰을 놓지 않았다.
공부에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단체 기숙 생활까지, 스마트폰으로 딴짓하기에는 그녀의 요령이 부족했으니까.
유머 사이트의 게시글이라지만 정치적, 제도적인 글이나 뉴스도 멋대로 추천해서 올리는 사이트인지
한예지의 집까지 가는 동안 본 인터넷 글이, 내가 그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훔쳐본 뉴스보다 많은 것을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뽀송뽀송한 방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눈앞에서 온갖 현대 문명이 지나다니니 욕심이 커지는 것 같은데.
특히 한예지가 대충 넘긴
‘남성의 사각팬티는 강간을 위해 만들어진 여성 위주의 의상이며, 삼각팬티는 성 상품화를 위한 여성 위주의 의상이다’라며
진지하게 주장하는 극단적 마초이즘(Machismo) 운동가들의 주장을 보고 나니까 더욱 더.
솔직히 말해서 무슨 병신 같은 소리인지 읽어 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볼 시간도 아깝다는 듯 제목과 로딩중인 첫 번째 문장만 보고 바로 게시글을 이동해서 읽을 수 없었다.
그 의문은 한예지가 집에 도착해 남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각팬티가 강간을 위한 헐렁한 복장이며, 삼각팬티가 성 상품화를 위한 딱 달라붙는 의상이라면
저 남성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래디컬 마초이즘 남자들은 노팬티 시위를 하는 걸까?
전생에 토플리스(Topless) 시위를 하던 러시아 미녀들이 등장해, 곧바로 노팬티 근육남의 이미지로 변한다.
공공장소에서 물건을 덜렁거리는 남자들의 모습을 생각하자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 이런데 어쩌겠는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 하고 외쳐 봐야 계속 떠오르는데.
“누나! 왔으면 연락을 하지!”
“문자 못 봤어? 오늘 외출 나온다 했잖아. 저녁 뭐 시켜 먹을지 골라 놔.”
“나가서 안 먹고?”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성난 코끼리들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동안
한예지의 남동생이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 봤을 때 보다 훨씬 생기가 넘치는 모습.
화신의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좌의 권능이 담긴 의약품을 지원받는다니,
정말 어지간히 화신을 우대해 주는 세상이구나 싶다.
퀭한 얼굴, 느릿한 몸짓과 구부정한 허리의 음침한 남학생은 온데간데없고 한예지와 똑 닮은 활발한 남학생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카데미 쪽은 어때?”
“처음 반년 동안은 죽어라 체력 키우기밖에 안 해. 그리고 법률 공부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아.”
“하긴, 누나 머리가 공부할 머리는 아니긴 하지.”
“요게, 죽을래?”
원래는 동네 구경이라도 해 볼까 했는데, 치킨을 시켜 놓고 닭 다리로 오순도순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나중에 포인트를 많이 벌면 아바타 형태로 강림해서 현대 문명을 즐길 수 있을까?
조금 먼 이야기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