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8화 : 달콤한 꿈 下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추악한 욕망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었다.
멋진 남자의 가슴 근육과 고간부의 우뚝 솟은 모양새에 눈이 가는 것은 여자로서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사람 성욕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온갖 인간 군상들이 있었고,
인터넷으로 자유분방한 이상 성욕을 접한 한예지는 이론상으로는 알거 다 알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중 몇 가지는 인정하고, 몇 가지는 여자로서 좀 그렇지 않나? 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상태.
보라색 조랑말을 비롯해 다양한 색과 품종의 말(馬)이 거근 미남으로 변하는 애니메이션에 취해
말 성기 모양 딜도에 환장하는 말박이들도 있었고,
역사서에 기록된 화신들이나 성좌들을 남자로 멋대로 바꾸는 TS충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상한 남자에게 파파 거리며 갓난아기처럼 응석을 부리는 녀석들도 있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야 했었다.
‘씨발... 너무 쪽팔려. 성좌님이 아시는 건 아니겠지?’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야밤에 이불과 속옷을 공용 세탁실에 처박는 그 끔찍한 기억이란.
다행스럽게도 성좌께서는 밤에 눈을 붙이시는지 다른 곳을 살피시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전부 보고 배려심 있게 입을 다무신 건 아니겠지 진짜?
아무리 성행위에 다양한 취향 다양한 체위가 있다 하더라도,
여자가 되어서 응석이나 부리는 것은 좀 꺼림칙한 취향 아닌가.
어제의 꿈을 꾸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
사락사락 남자의 두꺼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쓰다듬는 그 감촉.
뒷머리부터 목덜미를 지나 등허리까지 부드럽게 쓸고 넘어가는 그 남자다운 손.
등허리를 껴안는 따듯한 품은 딱딱하면서도 포근한 기묘한 감촉이었고
품에 안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은 머리가 텅 비어버릴 정도로 안락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오직 부성애만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뜨거운 남자의 품속.
귓가에 장하다 장하다 어린애 어르듯 속삭이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엉덩이를 꾹 쥐더니 은밀한 곳으로 슬그머니 침입해 오는 단단한 손가락...
‘진짜, 진짜 성좌님은 아니시겠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기보다는 거의 아버지와 딸 아니던가?
부성애를 느끼며 어리광을 피우는데 거기서 성욕을 해결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뒤틀린 성벽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그 대상은 어디서 본 멋진 남자도 아니고 상상 속의 성좌님.
성좌님, 당신의 첫 계약자가 첫 번째 권능으로 하는 일이 야한 꿈 꾸기입니다.
그것도 꿈속 망상으로 성좌님을 떠올리면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괴감이 물밀 듯 들어오기에 한예지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집이 아니라 낯선 공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런 거라며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
한예지의 꿈속에서 튕겨 나온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12시간을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한 번 치고 자는가?’
오랜 금욕은 나를 무뎌지게 했지만,
품 안에 나체로 온몸을 비벼오는 미녀는 그 금욕을 깨트리고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도 아니고 이제 시도 때도 없이 화면 속 한예지만 봐도 불끈 솟아버리는 내 물건이 슬슬 귀찮아질 수준.
홀로 해소하자면 할 수는 있었다.
욕실은 없지만 음식물 쓰레기와 오물은 사라지는 방이니까.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올 현자 타임과 자괴감을 생각하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차라리 16시간 정도 참았다가 다시 한예지의 꿈속에 들어가고 말지.
나를 꿈에서 튕겨낸 한예지는 정말 숨 가쁘게 움직였다.
새벽부터 공용 세탁실에서 빨래하고, 아침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샤워를 한다.
체력 단련 심화 과정을 선택하더니 다시 헬스장에서 땀을 쭉 빼는 둥,
쉬는 시간 없이 자신을 혹사하는 수준으로 숨 가쁜 하루를 보내려 한다.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와 그녀가 침대에 눕게 되었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허공에 손가락을 올리다 떡 하니 굳어버린 모양새가 사뭇 우습다.
하기야 손으로 만져 줬다는 것 하나로 몽정을 하며 잠에서 깼으니 창피할 만하겠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컵라면, 토끼 3분도 아니고 몇 번 손가락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성욕이 승리했는지, 아니면 자각몽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했는지
그녀가 허공에 손가락을 꾹 누르고 그대로 풀썩 팔을 떨어트린다.
[화신 한예지의 자각몽에 간섭하시겠습니까?]
[Yes / No]
내가 누르는 것은 당연히 Yes 버튼이었다.
시야의 옆에 보이던 커다란 TV 화면과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가 휘익 사라진다.
이제는 익숙해진 소음이 귓가를 가득 채우는 걸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여긴 또 어디래?’
집도 카페도 식당도 아닌, 뜬금없는 헬스장.
러닝머신이 줄지어 있고 내가 이름도 모르는 온갖 기구들이 잔뜩 나열된 곳에서 한예지 홀로 열심히 근육 운동을 조지고 있었다.
자세를 보는 용도인지 아령이 잔뜩 있는 곳의 벽이 통째로 거울로 되어 있길래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매 없는 나시티에 지난번보다 근육이 울룩 불룩 올라온 몸매.
지난번 나의 모습이 교회 오빠였다면 이번에는 거의 몸매 좋은 헬스장 트레이너 같은 모양새였다.
이러면 요상한 기구에 앉아서 다리를 쭉쭉 밀어대는 한예지를 내가 도와줘야 하나?
헬스장에서 뭘 해본 적이 있어야지.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가까이 가 볼까?
슬금슬금 등 뒤에서부터 접근했다.
한예지 또한 헬스장에 걸맞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 과하게 시원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무릎 위,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와 있는 쫙 달라붙는 회색 트레이닝 팬츠에 11자 복근을 그대로 노출하는 검은 끈 나시.
그녀의 가슴이 약간만 더 컸다면 끈나시인지 스포츠 브라인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살을 가리는 면적이 좁았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은 아니고... 꽉 찬 B컵쯤 되려나.
아포칼립스의 영양실조 여성들보다는 확실히 크다.
낑낑거리며 하체 운동을 하던 한예지와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숨 가쁘게 움직이는 눈동자. 하지만 오늘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마치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
지난번처럼 성욕에 가득 차 몸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는 것 보다, 바닥과 주변을 살피는 빈도가 더 높다.
“아니, 이게, 왜...?”
그렇게 고개를 몇 번 젓더니, 귓가에 다시 먹먹한 소음이 들린다.
이번에 등장하는 것은 아카데미의 거대한 운동장.
그늘 하나 없이 땡볕이 내리쬐고 있고, 또 그곳에서 한예지는 홀로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반팔 반바지의 평범한 체육복을, 나는 남자 교관용 제복과 구두를 착용한 상태.
땀을 뻘뻘 흘리는 한예지의 뒤태를 보니 그녀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몽정한 게 창피해서 자각몽에서 운동으로 성욕을 누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운동으로 누른다고 성욕이 눌릴 리 있나. 그것도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 하는 운동으로?
운동장 트랙에 서 있으니 한 바퀴 돌던 한예지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온다.
헉헉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리던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또다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려 하길래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나섰다.
“서, 성좌님은 아...”
“맞다면?”
“아으... 그럴 리 없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던 세상이 다시 익숙한 광경으로 바뀐다.
그때의 그 침실, 그 침대.
한예지가 내 손가락 두 개에 패배하고 몽정을 하며 꿈에서 깨어났던 그 장소.
그 창피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이제는 목욕 가운도 없이, 서로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침대에 마주 앉은 상황.
브래지어 없이 탄력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젖가슴에 시선을 잠시 빼앗기는 동안 그녀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낸다.
“이거, 내 자각몽이니까... 진짜 성좌님일 리 없죠? 그냥 내가 꾸는 꿈...”
그 기어가는 목소리를 듣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니, 이상한 느낌이라 해야 할까. 마치 본능에 새겨진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그 말에 대꾸했다.
“그래, 여기는 너의 자각몽이야.”
“그렇죠? 그러니까 나는...”
“그리고 나는, 악몽의 성좌란다.”
그녀의 새빨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나는 이 세계에 온 지 고작 석 달이지만 한예지는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랐다.
남자가 집안일을 하고 여자가 바깥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류에게 성좌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존재였다.
일단, 성좌가 없었으면 인류가 멸망했으니까.
실시간으로 소통이 되며 인류에게 선물을 내려는 신.
그게 성좌들이다.
한예지는 그런 성좌에게 성적 욕구를 투영하고 욕정을 풀어냈던 사실을 떠올리며 온갖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잘생긴 남자에게 느끼는 호감,
몸 좋은 이성에게서 느끼는 은은한 섹스 어필,
자신을 선택해주고 돌봐주는 성좌에 대한 감사함,
토닥여주던 손길에서 느껴버린 부성애,
꿈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들켰다는 창피함,
감히 성좌가 내려준 첫 번째 권능을 성욕 처리용으로 사용했다는 죄책감,
응석을 받아주는 내 모습과 거기에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배덕감까지.
그녀를 꿈꾸게 한 것이 욕망이었고 멈추게 한 것이 죄책감이니,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무기력한 악몽, 꿈속의 성좌가 되어버린 내 본능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한예지의 자각몽이되 몽마가 되어버린 나의 주 무대.
다시 한번, 어제의 꿈처럼 양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는다.
맨 가슴팍에 그녀의 말캉한 젖가슴이 비벼져 오는 감촉을 만끽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입술로 살포시 깨문다.
“그래, 내가 너의 성좌란다, 나의 사랑스러운 첫 번째 화신아.”
“죄송해요 성좌님, 이러려는 게, 주어진 권능으로 이러려던 게-”
“쉬이- 그래, 무슨 상관이니. 나는 너의 성좌지만 여기는 너의 꿈인 것을.”
전원이 빠진 라디오처럼, 그녀의 입이 꾹 다물린다.
횡설수설 거리던 자기변명은 사라진 지 오래.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몸은 점차 성욕이 죄책감을 좀먹어 가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이곳은 오롯이 너의 꿈이란다.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달콤한 자각몽.”
입이 저절로 움직이며 고풍스러운 말을 쏟아낸다.
전부 챙겨, 전부 죽여 정도의 단어가 익숙한 내 입에서 나온 거라고 믿기 힘든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
“내가 뭘 해주었으면 하니?”
그 작은 질문에,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