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화 : 달콤한 꿈 上
6월에 한예지와 계약을 하고, 7월 1일에 그녀가 입학을 했다.
8월이 된 지금 한예지는 기초 체력 단련 과목과 화신 특별법 수업으로 졸업 점수를 챙긴 상태.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자신의 첫 번째 화신에게 권능을 선물합니다!]
[화신 한예지에게 ‘달콤한 자각몽’의 권능이 깃듭니다!]
“가, 감사합니다!”
8월 1일 자정, 포인트가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3달 내내 1포인트짜리 간식 하나 먹지 않고 모아둔 포인트를 탕진했다.
달이 바뀌며 기초 체력 단련 대신 새로운 수업을 듣기 위해 시간표를 짜고 있던 한예지가 펄쩍 일어난다.
허공에 고개를 꾸벅 꾸벅 숙이는 모습을 보면 괜사리 기분이 좋단 말이지.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기대감을 품고 당신을 기다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던 한예지가 허공에 손가락을 슥슥 긋는다.
상태창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것 치고는 허공에 상태창! 하고 외치는 사람은 본 적 없는데.
입 밖으로 외치지 않아도 되면 편리하긴 하겠네.
안내 서류와 책자, 보급된 싸구려 노트북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낑낑대던건 안중에도 없는지
옷도 갈아 입지 않고 그녀가 침대에 다이빙하며 드러 눕는다.
그 와중에 정강이를 침대 틀에 박았는지 쿵 소리가 나지만 아픈 다리를 부여 잡고 이불 속에 웅크리는 걸 보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렇게 좋을까, 하긴 화신이 되고 그녀가 처음으로 겪는 이능이다.
어느날 초능력이 생긴 것과 같은데 두근거리지 않을 사람이 있으려고.
불도 끄지 않아 눈이 부실 법 하지만 달콤한 자각몽을 사용했는지 5분이 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빠져든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잠이나 잘까 싶어 냉장고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모니터에 처음 보는 메시지가 출력된다.
[화신 한예지의 자각몽에 간섭 하시겠습니까?]
[Yes / No]
간섭이 무엇인지, 내가 영혼만 끌려 온 게 아니라 정말 몽마라도 된 건지 깊게 고민하기도 전에
나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Yes 버튼을 바로 클릭해버렸다.
※
화면이 깜박거린다, 같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시야가 휙휙 변했다.
어느새 나는 원룸이 아니라 다른 방에 와 있었다.
천장에 있는 새하얀 조명, 깨끗하게 잘 정리된 하얀 벽지와 황갈색 마루 바닥.
벽걸이 TV나 가죽 소파, 흰색 검은색 배열의 말끔한 소파 테이블을 보면 꽤 있는 집 거실 같은데.
성좌의 원룸처럼 덩그러니 막혀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거실에서 이어지는 두 개의 방과 넓은 거실도 그렇고 시선을 뒤로 돌리면 보이는 현관과 화장실도 있었으니까.
무너지고 박살나지 않은 정상적인 집에 서 있다는 것이 뭔가 기묘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사람 한 명 없어서 그런가 지금이라도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와 서랍장에 있는 보존 식품을 챙겨 아지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
머리 한 구석을 간질이는 생존본능을 애써 억누른다.
“다녀왔습니다!”
그런 고민 속에 있자니 띡 띠디딕 리듬감 있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채 반응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현관 신발장에서 거실로 가는 통로에 서 있었으니 몸을 숨기지도 못 해 당황했지만-
“오늘 저녁은 뭐에요?”
갑작스레 들어온 여성은 나를 자연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잘 보니까 한예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꿈이라 그런 걸까, 화면으로 보던 것과 아주 약간씩 다른 것 같은데.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는지 우당탕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화장실로 향해 거울을 본다.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화장실도 없던 성좌의 원름에서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내 얼굴이 물얼룩 하나 없는 화장실 거울에 비춰진다.
아래로 서글서글하게 내려간 눈매부터 남자치고 새하얀 피부, 새빨간 입술에 오똑한 콧날.
“이건 좀...”
평범한 남자 보다는 아이돌을 닮은 얼굴을 보니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한예지의 꿈 속이라,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바뀐 것이라고.
아무리 거울을 안 본지 오래 되었다 해도 내 얼굴을 모를 리 있나.
이렇게 눈웃음 짓는 교회 오빠 스타일의 아이돌 상이 아니라, 눈매가 험상궃어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화난 것처럼 보이는게 내 얼굴인데.
내가 속해 있던 쉘터가무너지기 전에는 협상 테이블 뒤에서 분위기 잡는 병풍 역할로 고용된 적도 있었고.
‘그래서 뭘 해야 하지?’
결국 이 넓은 집은 한예지의 꿈이 만들어 낸 공간이라는 뜻이다.
오늘이 능력 사용의 첫 날이라 자각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꿈 속 등장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내게 뭘 원하는 걸까.
‘저녁이 뭐냐고 물어봤으니 밥이라도 차려 주면 되는 걸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주방으로 갈 때 까지 한예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교복 차림이었으니 옷이라도 갈아 입는 건가.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 와서 저녁밥을 먹는 꿈.
참으로 소박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네.
“와, 이건 무슨...”
냉장고 문을 열자 거기서도 이게 꿈이라고 주장하듯이 어마어마한 풍경이 나를 반긴다.
커다란 양문 냉장고 안에 가득한 고기와 고기의 산.
아무리 남자가 집안 일을 하는 세상이라지만 누가 장을 이렇게 보겠는가.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훈제 오리에 김치와 마늘, 양파, 쌈 무.
고기를 구워서 먹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꿈에 투영되었는지 냉장고 안에는 고기와 쌈 재료만 있었고,
싱크대 아래 찬장에는 소금과 후추, 참기름과 허브 솔트만 몇 종 있었다.
심지어 왼쪽 냉동칸을 여니 거기에는 냉동 고기들이 잔뜩.
그래서 만만해 보이는 삼겹살을 꺼내 구울 준비를 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가벼운 발 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맨발이 타박타박 마루 장판을 밟는 소리. 때 아닌 악몽도 아닐테니 당연히 한예지겠지.
식탁에 앉아 있으라고 말 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등 뒤로 다가왔다.
“헤헤, 오늘은 삼겹살이야? 김치 맛있게 익었더라.”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이건, 무슨 꿈인데?’
내 등 뒤로 다가온 한예지가 나를 자연스럽게 끌어 안았기 때문에.
그리고 피부가 닿고 그녀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뇌리에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쪽 세상은 남녀 역전, 그러니까 모계 사회의 틀로 계속 발전해 여성이 외부 활동을 하며 육체적 특성이 조금씩 바뀐 세상.
사춘기 남학생이 야한 꿈을 꾸는 것이 당연하듯, 이 세상 여학생들이 야한 꿈을 꾸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여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당황스러운 사실에 반응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진짜 연인 관계던, 통조림 몇 개로 오가던 원나잇 관계던 딱 정해진 관계면 반응이라도 하지.
화신의 꿈 속인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부드럽게 껴안아 오는 손, 등 뒤로 느껴지는 말캉한 육체, 목덜미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
강제적이던 금욕을 깨트려 버리고 욕정을 무럭 무럭 샘솟게 하는 달짝지근한 여인의 향기.
이대로 손을 마주 잡고 침대로 이끌어? 아니면 톡 쳐내고 고기를 구워야 하나?
어찌할 바 모르겠어서 내가 내린 선택은 얌전히 있는 것이었다.
니 꿈이니까, 니가 맘대로 움직이겠지.
꽁냥거리다 밥을 먹던가, 밥 대신 나를 먹던가.
한예지의 반응을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돌돌 말린 삼겹살에 칼집을 내고 허브 솔트를 뿌린다.
목덜미에 와 닿는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등 뒤에서 내 옆구리를 휘감고 깍지를 낀 손도 조금씩 떨리더니 날개죽지에 툭 하고 뭔가 닿는다.
이마? 내 등에 얼굴을 묻은 건가?
대꾸도 대화도 없이 한동안 내 등 뒤에 이마를 대고 있던 한예지가 어느 순간 껴안을 손을 풀고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향한다.
자각몽이라는 거, 스스로가 꿈이라는 것을 알고 꾸는 꿈 아닌가?
나의 자각몽이 아니라 한예지의 자각몽이라서 그런지 조금 따라가기 힘든 느낌이었다.
현실에서 공부와 훈련이 너무 힘드니 꿈에서는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서글서글한 눈매에 포옹심 넘치는 이 미남 얼굴도 그녀가 응석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의 결과인 거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가스레인지에 불을 킨다.
손잡이 이음새에 그을림이 살짝 묻어 있는 생생한 프라이팬 위에 삼겹살을 올리자 치이익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인스턴트 식품 말고 신선한 고기와 야채가 눈 앞에 있었다.
한예지의 꿈이 뒤죽박죽이면 뭐 어때? 눈 앞에 신선한 야채가 있는데.
냉동볶음밥에 썰려서 들어가 있는 기름 먹은 채소 조각 대신 싱싱한 상추와 양파를 씻는다.
물기를 털어내고 그대로 자그마한 소쿠리에 담으니 고기보다 신선한 채소에 눈이 간다.
그 뒤로는 별 것 없었다.
딱히 대화는 없었지만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
김치와 상추, 구운 양파와 구운 마늘에 정신이 팔려 고기 맛도 잊어 버릴 정도로 배가 터지도록.
그 다음에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본다.
TV의 화면에서는 내가 모르는 예능이 나왔다가,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왔다가, 다시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나오는 등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한예지는 점점 내가 엉겨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을 잡더니, 엉덩이를 스윽 움직여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 앉는다.
팔뚝에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느껴질 즈음 내게 기대오는 모습.
부모님 없이 학생 둘이서 생활하더니, 겉으로는 활기차고 긍정적이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던 걸까?
연인간의 달콤한 애정행각 보다는, 커다란 대형견이 머리를 비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길래 충동적으로 그대로 팔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어깨에 기댄 상태라 각도가 잘 나오진 않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는 있었다.
따끈따끈한,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체온.
“어, 어?”
대화도 없이 TV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성좌님?”
한예지가 입술을 달싹거림과 동시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