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 : 일상
정말로 별 다른 일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회에서 편의점 바코드만 찍던 한예지가 처음부터 무기술이니, 전술 전략을 배울 수 있을리도 없었으니까.
같이 들어온 대부분의 생도들 처럼 기초 체력 단련과 화신 특수 법률을 듣는 상황.
아카데미 졸업 점수가 정해져 있고 원하는 수업으로 채우면 되는 상황에서
화신 특별법, 몬스터 생태학 등 다양한 이론 수업이 필수 수업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체력 단련이야 PT 받는 것처럼 우락부락한 여성 교관들이 하나만 더! 하나만 더! 외치는 장소고,
화신 특수 법률은 이쪽 세상 상식도 모르는 내가 끼어들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한예지를 돌봐주기 애매한 상황.
그래도 할 일이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아카데미의 시스템이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오면 어떻게 해?”
“누나만 믿어, 성좌들이 설마 이런 걸 보고 계시겠어? 그리고 좀 보여지면 어때.”
“아 진짜, 누나! 뭘 보여지면 어때야!”
담벼락 가까이 있는 으슥한 공터,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긴 사이 좋은 두 남녀가 알콩달콩 다투고 있었다.
저런, 다른 성좌들은 화신이 많아 바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닌데.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또 다른 불순 이성 교제를 찾았노라 말합니다]
곧바로 키보드를 붙잡고 채팅을 치자, 땀을 뻘뻘 흘리는 한예지의 근처에 있던 교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다.
자신의 화신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성좌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간단한 기능.
그게 있다고 심심해서 몸 비트는 성좌를 감시역으로 써먹고 있으니 참 대단하긴 하다.
성좌가 감시하는 아카데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좌인 내가 이런 식으로 교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면 한예지가 약간의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졸업을 위한 학점이나 현금을 주는 것은 아니고
사소하게 주말 외출증이 나온다던가 식권을 한 장 더 받는 수준의 가벼운 이익.
물론 저 커플들도 가벼운 불이익만 받지만 들끓는 청춘 남녀들을 모아 놔서 그런가?
데이트는 주말에 나가서 하라고 교칙을 정해 봤자 결국 몇 쌍의 커플은 용감하게 도전한다.
훈련 일정 때문에 사람이 없는 건물 화장실에서, 이능 훈련의 여파로 부서진 훈련장 속에 숨어서,
아카데미의 거대함을 믿고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겨서. 참으로 다양한 곳에 숨어 있기도 한다.
윌리를 찾는 기분으로 넓은 아카데미를 뒤지다 보면 하나 하나 튀어 나오는 게,
성인 오락실의 싸구려 19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여름의 햇빛 아래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을 보면 뭐라도 해 주고 싶단 말이지.
7월에 계약을 하고, 8월에 입학을 해서 곧 9월이 되면 딱 3천 포인트가 모인다.
그런데 자각몽이 그렇게 큰 선물이라 봐야 할까?
지금도 죽자고 달리기와 헬스를 반복 중인데, 꿈에서는 조금 쉬게 해 줘야 하려나?
운동과 공부만 무한히 반복하는 한예지의 생활상을 보면 외출증이라도 얻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
자각몽 속에서 쉬게 해 주던 운동을 시키던 아직 한 달 남았으니까.
몸이 약한 한예지의 남동생은 화신 지원 덕분에 무슨 약을 받아먹고 입원 생활은 끝마쳤지만
그래도 걱정 되는 것이 가족 아니겠는가.
나름 대륙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섬에, 기숙사 생활까지 하느라 외출증이 없으면 보러 가질 못하니까.
“예 성좌님, 확인되었습니다. 이걸로 딱 10번째니 한예지 화신에게 외출증을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긍정합니다]
가끔은 이 필터링이 좋을 때도 있었다.
귀찮아서 ㅇ 한 글자만 보내도 성의 있게 보여주니까.
내 잦은 채팅에도 교관들은 익숙하다는 것처럼 메시지를 확인하고 서류에 서명을 한다.
첫 번째 화신과 계약한 대부분의 성좌들은 심심하다고 아카데미 교관들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다들 익숙한 모양이다.
하기야 열심히 공부하는 자기 화신 방해하는 것 보다는, 좀 많이 알고 있는 교관들을 건드리는 게 더 재밌고 유익하니까.
군기를 잡던 교관들이 이 섬에 있는 교관의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다.
“한예지 화신, 좋군요, 한 달 내내 기초 체력 단련 시간에 빠진 적도 없고.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법률 공부처럼 귀찮은 것도 참여 점수 깎인 적이 없고.”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첫 번째 화신을 자랑합니다]
“예, 크게 될 인물 같군요. 전투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 최전선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어딜 가나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섬 하나
고작 섬이라 하기에는 거의 도시 하나 크기는 가볍게 넘어가는 거대한 섬 하나.
그 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물과 훈련장과 운동장과 각종 첨단 시설들.
동서남북 모든 대륙에서 화신에게 아낌 없는 지원을 퍼부은 결과물이다.
대륙 외부에서 내륙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괴물들, 허공을 찢고 나타나는 괴물들, 인류를 배신한 화신들.
내륙이 아무리 평화롭다지만 이 세상은 일단 성좌와 화신과 괴물이 나타나고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정치인이 화신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한다는 소리를 지껄인다?
한 달 내로 옷을 벗고 내려와 광신도들에게 목이 매달릴 것이다.
아니면 어디 뒷골목에서 칼에 찔린 상태로 발견 된다던가.
그렇게 넓은 아카데미다 보니 교관도 외우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 되고.
당연히 교관들 중에서 화신과 성좌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외출증을 바로 지급하겠습니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던 교관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화신이 되지 못하였지만 질투심보다 존경과 경의를 마음에 품은 여자.
내가 발견한 커플처럼 기초 규칙을 어기는 화신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교관이지만
한예지처럼 모범생에게는 온갖 편의를 봐 주는 유형의 교관.
누군가가 보기에는 편애 때문에 교관의 권력을 조금씩 남용하는 불쾌한 교관이지만
내게는 한예지를 은근 슬쩍 도와주는 착한 교관일 뿐.
“한예지 생도, 달리기 중지!”
“예!”
그늘 한 점 없는 운동장에서 한예지만 스윽 빠져나오자 부러워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 몇 명.
아마 성좌가 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화신들일까.
“가산점 10회 누적으로 외출증 지급이다. 한 달만에 받는 생도는 별로 없는데 참 빠르군.”
“감사합니다!”
“감사는 네 성좌님께 드려라. 8월 담당 사무실에 이 서류를 제출하면 외출증이 지급 될테니 바로 가도록.”
“알겠습니다!”
“그 전에, 사무실에는 교관들 말고 일반 행정 공무원들도 많다. 땀 냄새가 심하니 반드시 몸을 씻고 환복을 하고 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직 오전 11시지만 그늘이 없는 운동장에서 1시간 넘게 구보를 진행한 사람들은 반 쯤 탈진 상태로 헉헉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운동복 차림의 남자들을 보고 눈이 흘끗흘끗 돌아가던 혈기 넘치고 음흉한 여자들도
지금은 땀인지 침인지 모를 것을 줄줄 흘리며 느릿하게 운동장을 도는 상태.
그 와중에 30분 먼저 달리기를 종료하고 샤워를 할 기회를 받았으니
부러움이 가득 찬 눈길이 날아올 법 하다.
씻고 사무실에 서류를 제출하면 자연스레 점심 시간이 되니 다른 화신들보다 먼저 쾌적하게 식당을 사용할 수 있을 거고.
‘노련하네, 진짜.’
땀에 푹 젖어 허우적 허우적 운동장을 도는 대부분의 생도들은 눈치 채지 못한 미묘한 호의.
일부의 눈치 빠른 생도들만이 질투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한예지를 바라본다.
아무리 고급지고 거대하게 만들어 놨다 해도, 공용 시설을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먼저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보여지는 미약한 호의는 한예지도 지난 한 달간 충분히 느꼈는지 저 교관을 상대할 때 더욱 정중하고 깍듯하다.
몇몇 화신들은 우월감이라도 느끼는지 아카데미를 둘러보다 보면 삼삼오오 모여서 뒷담화를 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긴 하지만 대놓고 교관에게 까부는 모양새는 찾아볼 수 없다.
하긴, 지난 달 까지만 해도 학생이나 사회인이었는데
이번 달에는 1시간 오래 달리기 같은 걸 하고 있으니 욕 할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화신이 성좌를 욕할 리 없고.
실내 체육관도 있는 주제에 햇빛을 핑계로 오전 10시부터 11시 반 까지 체력 단련을 시키고,
점심 식사를 마치는 오후 1시부터 법률 수업을 편성 한 것부터 교관들의 악의가 잔뜩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달리기, 샤워, 영양 성분을 위해 일정량 이상 먹도록 강제된 풍부한 식사, 그리고 법률 공부.
어떻게 생각해도 졸 수 밖에 없는 시간표 아닌가.
그 때문에 다른 화신들 뿐만 아니라 한예지도 법률 공부 시간에 식곤증을 이기지 못한 적이 꽤 있었다.
그 벌점도 이 교관이 슬쩍 지워버렸을 뿐이지.
똑같이 조는 상황에 한예지는 운동을 열심히 한 증거라며 슬쩍 넘어가지만 그 것 까지 화신들이 알 방도가 없었다.
조는 모습을 체크하긴 하고 있다. 체크만 하고 벌점이 부여 되지 않을 뿐.
담당 교관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은 벌점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 정도는 내가 아카데미를 순찰하는 것 만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점심 먹고 조는 걸로 뭐라 할 생각도 없었고.
털레털레 운동장에서 빠져나온 한예지가 기숙사 건물에 들러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공용 샤워장으로 향한다.
건물이 넓고 쾌적하다는 장점은 운동장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샤워실로 이동하는 데에만 시간을 10분씩 소비한다는 단점이 된다.
뭐,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돌고 있을테니 상관 없겠지.
그 사람들도 운동이 끝나면 기숙사에 들러 샤워를 하고 식당을 갈 테니까.
식당에도 교관들이 있기 때문에 씻지도 않고 식당을 간다면 욕이란 욕은 다 먹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갈아입을 옷을 챙긴 한예지가 공용 샤워실로 향한다.
공용 샤워실이라 몸 담굴 탕은 없지만 크기는 거의 대형 사우나와 필적한다.
안 쪽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도 귀찮아 보이는 커다란 샤워실에 혼자 옷을 훌렁 훌렁 벗어 던지고 들어가는 한예지.
그녀는 내가 본다는 생각도 딱히 하지 않는지 수건으로 가리지도 않고 위풍당당하게 들어간다.
이 쪽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탕을 엿보기 때문이려나.
머리끈을 풀어 헤치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찰싹 붙은 상태로 걸어가자 그녀의 가슴이 보기 좋게 출렁거린다.
170cm 정도의 꽤 커다란 키와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의 가슴.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가 마치 모델의 걸음걸이 같다.
적당히 그을려 건강 미인처럼 보이게 해 주는 피부까지 눈을 뗄 수 없을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땀에 젖은 미녀의 나체보다
그녀가 한 여름에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장면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먹지만 싸지는 않는 몸뚱아리.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음식물 찌꺼기와 오물들.
목욕탕은커녕 화장실도 없는 원룸.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나는 점점 인간다운 삶에 매료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