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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3화 : 성좌, 무기력한 악몽 (3/169)



〈 3화 〉3화 : 성좌, 무기력한 악몽

성좌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의사소통 기능은 은근히 필터링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무기력한 악몽’이라는 닉네임을 붙여둔 것처럼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은근슬쩍 필터링이 되어서 화신에게 전달 되는 것을 방금 봤으니까.
아마 포인트를 소모하게 만들려는 꼼수로 보인다.

자신이 지내는 공간을 넓히고 가구를 명품으로 채우며 식사를 산해진미를 먹으면 뭐 하겠는가.
직접적인 대화를 할  있는 건 자신의 화신들뿐인데.
 성격이 특이하게 뒤틀린  아니라면 나 말고 다른 성좌들도 화신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익숙해진 혼잣말 말고 쌍방이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너무 그리워.

잘 부탁한다는 채팅을 보냈는데 ‘인사를 건넨다’라고 채팅의 내용이 생략되는 상태.
아마 저 채팅창에 백날 글을 써도 안부를 묻습니다, 격려합니다 따위로 생략되겠지.
화면 너머에서 한예지가 자기도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넙죽 숙이는 모습이 보이지만 대화를 할  없었다.


‘조금 답답하네...’


다른 성좌와의 의사소통 기능은 나중에 추가되는지 아예 찾아볼 수도 없고
화신과의 의사소통은 정해진 문구로만 해야 한다니.

때로는 목마른 사람에게 주는 한 모금의 물이  큰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아무도 없다면 포기하고 침대에 처박혀 있을 텐데
눈앞에 다른 사람들이 있고 조금만 노력을 하면 이것저것 얻을  있으니 신경이 계속 쓰이게 되는 거다.

더 고급스러운 음식도 명품 가구도 화려한 저택과 넓은 정원도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 포인트를 최대한 모아볼까.
목록을 읽다 보니 화면 속 한예지는 어느새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신들은 일단 대륙 중앙의 교육소로 보내져 전투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당연히 교육 전부터 교육 기간과 견습 기간은 화신뿐만 아니라 성좌에게도 준비 기간이다.
성좌가 화신에게 내려 줄 수 있는  한두 개가 아니니 어떤 방식으로 화신을 밀어줄지 계획을 하라는  같았다.

물론 내가 정보를 모으는 방법은 화면을 확대해 한예지가 모으는 정보를 같이 보는 것뿐이었다.
다른 성좌들과 통신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검색 기능은 아예 없었으니까.
그녀가 인터넷에서 다른 성좌들을 검색한 게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다.

편의점에서 나와 계약한 그녀는 곧바로 점장에게 연락한 뒤 알바를 그만두고 국가에 신고를 한 상태.
이 세상에서 화신의 위상이 생각보다 높은 건지 가벼운 트러블 따위는 없었다.
대타를 구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알바를 때려치우는 모습에도
점장은 잘되었다며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겨주었고 화신 인증 중에는 잡음 하나 나오지 않았다.

평평한 행성, 도넛 모양의 대륙을 보고 짐작했지만 정말 다른 세상이구나.
하기야 사각 수영복을 입은 남자의 복근 옆에 소주병이 그려진 슈퍼마켓의 광고지만 보더라도  수 있겠지.
그나마 미적 기준은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어 세계가 조금 뒤죽박죽처럼 보이더라도 일단 이쁘고 멋진 건 그대로였으니까.
차라리 근육질의 멋진 형님 포스터가 있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지
살이 뒤룩뒤룩 찐 추남이 섹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면 기분이 많이 안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겨봐야 크리쳐 보다 잘 생겼겠지만.




화면 속 한예지가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서류를 작성하며 정부에서 붙여준 공무원과
이것저것 신청을 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상점의 목록을 뒤졌다.
그녀의 창백한 남동생이 병원에 입원하고 이사를 하고 집을 옮기며 가구를 들이는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목록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놓고 컨셉을 잡으라는 건가...?”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첫 번째 화신에게 푹 쉬라고 조언합니다]


이제 막 침대에 누운 한예지가 화면에 뒤통수를 보이며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성좌로서 화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보내는 안부 메시지였다.
그녀가 찾은 정보 중에는 화신에게 별 관심이 없는 성좌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럴 이유는 없었다.

지하실 쪽방에 처박혀 무기력하게 누워서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기만 하는 시체와 같은 삶을 다시 살라고?

그럴 거라면 계약도 안 했지.


더군다나 화신을 키우는 일은 운동보다는 게임에 가깝다.


내가 스스로 땀 흘리고 뛰어다니며 고통을 겪을  없이,
저 커다란 화면으로 화신의 주변을 살펴보며 그녀를 보살피고 그녀의 성장으로  많은 포인트를 얻는 것.
멸망한 세계에서도 심심하다는 이유로 녹슨 철판에 칼집을 내서 조잡하게 만든 보드게임을 즐기는 것이 사람이다.

이런 재미있는 걸 포기할 순 없지.

게임 같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목록에 있는 물품들의 가격을 보면 이 세상이 성좌에게 원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바로 컨셉을 잡는 것.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온갖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끌어모아 만든 세상을 창조하는 신적 존재를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좌가 컨셉을 잡고 캐릭터를 만들기 원한다는 것은 목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음입밀 [100,000pt]
- 텔레파시 [100,000pt]
꿈결 속삭임 [10,000pt]

내게 ‘무기력한 악몽’이라는 성좌 닉네임이 붙은 이후 목록에 갱신된 목록 중 하나였다.
필터링 되지 않은 메시지를 화신에게 보내는 기술.

처음에는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가격표에 0 하나의 차이가 보인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였다.
꿈이나 악몽, 몽환 등의 키워드가 들어간 스킬들은 일단 가격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름만 봐선 이해할  없는 녀석들도 일단 그랬다.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 있지만 꿈과 관련되면 90% 할인이라 보는  좋겠지.

이것만 봐도 딱 느낌이 왔다.

무기력한 악몽이니까, 정말 몽마처럼 스킬을 구성하라고.

이름이 유명해 인터넷에 정리된 대부분의 성좌도 그랬다.
육체파를 밀어주는 성좌가 있고, 마법사를 밀어주는 성좌가 있었다.
전투와 반대로 치유와 봉사를 시키는 성좌가 있었으며 연구와 생산을 지원하는 성좌도 있었다.


포인트를 효율적으로 벌기 위해서라면 전투직이던 생산직이든 상관없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신을 키우는 것이 나을 텐데 왜 한 쪽 직군에 몰아서 화신을 키우겠는가.
벌어오는 포인트 말고, 소모되는 포인트가 10배씩이나 차이가 나니까 그런 거겠지.


단순히 통신만 해도 1만 포인트와 10만 포인트, 차액이 무려 9만 포인트였다.
신발부터 머리끝까지 방어구를 맞춰주고 손에 맞는 무기와 그에 걸맞은 기술을 내려 준다고 생각하면
얼마가 깨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

할인을 받아도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인데 할인받지 않은 10배의 금액을 지불 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행인 점이라면 모든 물건이 답도 없이 무작정 비싼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딱 봐도 초보자용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꽤  편이다.
물론 싸다고 해도 무슨 수백만 포인트를 넘어가는 휘황찬란한 아이템에 비교해서 싸다는 거지
한 달 기본 포인트 1,000pt에 비하면 비싼 편이다.


달콤한 자각몽 [3,000pt]
환몽비약 5 EA [500pt]


한예지가 성좌에 대해 공부를 하는  훔쳐보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 아이템 목록을 살펴보며 고른 것은 두 개의 물건이었다.
달콤한 자각몽으로 꿈속에서도 수련하도록 만든 뒤, 꿈에서 운동해도 현실의 육체가 성장하게 해 주는 환몽비약을 먹이는 것.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았으니까.


솔직히 아직 편의점 알바생인 고등학생한테 포인트를 탈탈 털어서 갑옷이나 검을 사 준다고 뭘 하겠는가.
차라리 자신감도 올리고 아카데미에 적응도  수 있게 훈련이나 도와주는  낫지.


먹고 마시는 것에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대로 모은다면 한 달에 1천 포인트씩 넉 달이 걸린다.
만약 한예지가 재능이 있어 내가 추가 포인트를 벌게 된다면 3달.
아카데미의 교육 기간이  단위로 짜인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스킬을 주고 나서 기초를 닦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 뒤에는... 꿈결 속삭임을 구매해서 한예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들어 줄까?


성좌니 화신이니 해서 꺼드럭거릴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지하 셸터에 처박혀 웅크려 있던 놈이 뭐 잘났다고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겠는가.
화신으로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는 것도 한예지일 거고 이쪽 세상에 더  아는 것도 그녀일 테니까.


화면 속에서 그녀는 낡은 체육복을 입고 동네를 달리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화신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음에도 불만 하나 없이 행복하고 밝은 얼굴.
달리는 걸음마다 싸구려 머리끈으로 묶은 포니테일이 찰랑거린다.


근심 걱정 하나 없이 햇빛 아래를 달려나가는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매끈한 팔다리를 쭉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
이마에 난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냉수를 마시는 모습,
가끔 쏟아지는 소나기에 투덜거리며 푹 젖은 옷자락을 짜내는 모습.

꽤 아름다운 편에 속하는 여인의 건강미 넘치는 모습을 싫어하는 남자가 있으랴.


고등학생의 나이에 공부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도 없이 아픈 남동생과 살아가는 한예지.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웃었다.
내가 보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콘크리트 벽에 있는 물 얼룩과 곰팡이가 사람 얼굴 같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살다가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람을 계속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듯하게 약동하는 게 느껴진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서 그저 주워 온 식량이 떨어져 굶어 죽어가게  날만 기다리는 것
그걸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나보다 활발히 움직이던 사람들은 모종의 사고로 전부 죽은 것 같지만.

그래서 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사랑이나 집착 같은 무거운 감정은 아니다.
의식주의 해결과 생명의 위협이 사라짐에 따라 느슨하게 풀려가는 마음가짐이 원하는 것은 애정이었으니까.
물론 인간과 인간의 애정이라기보다는 게임 캐릭터에 대한 대리만족이 뒤섞인 가벼운 애정.

어차피 화신을 성장시켜야 한다면 최선을 다해 키워보는  재미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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