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2화 : 첫 계약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화면 속 세상은 껌껌한 밤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도시는 화려한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저토록 많은 사람이 근심 걱정 없이 대로변을 걸어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해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자신만의 걱정거리는 있다는 것은 안다.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든다.
적어도 저들은 등 뒤에서 스캐빈저나 크리쳐가 급습해 칼이 박히거나 목덜미를 뜯길 걱정은 하지 않을걸?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도 흔한 일은 아닌지
간헐적으로 비명이 울려 퍼질 뿐, 아비규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괴물을 봐도 화들짝 놀란 뒤 제 갈길을 가는 시민들.
다만 화면을 돌리다 보면 인간의 범죄 현장은 은근하게 보였다.
취객의 주머니를 뒤지는 남자들이나 골목에서 제 또래의 뺨을 때리며 지갑을 뺏어가는 여학생들.
그리고 검은 안개로 가려져 볼 수 없는 몇몇 구역들.
“저건 또 뭐야?”
쿡쿡, 마우스 커서로 클릭을 해 보자 기본 기능으로는 관찰할 수 없다고 뜬다.
나와 같은 사람, 아니 존재들이 있다고 했으니 그 사람들이 포인트를 내고 가린 걸까?
안개로 가려진 몇몇 곳들이 모텔가나 개인 주택인 걸 봐선 계약을 맺은 화신들이 사생활을 위해 가려뒀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 0pt짜리 계약서를 구매해본다.
“그냥 클릭하면 되는 건가.”
계약서를 구매하고 나서부터는 화면 안쪽의 사람들을 클릭할 때마다 계약하겠냐는 메시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별거 없는 방법이긴 하네.
일단, 관찰을 좀 해 볼까.
※
싸구려 매트리스에 냉동 볶음밥, 캔 음료밖에 없는 생활이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풍요로운 세상이었다.
방 안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도 흠이 될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숨어 있던 지하실보다 2배는 넓고 쾌적한 상태.
그러니 한 병에 3천 포인트가 넘는 양주와 와인을 마시며, 몇만 포인트를 내고 방을 넓히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사치품이라는 이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런지 명품 가구들이나 의상, 방을 꾸밀법한 소품들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가격으로 목록에 기재되어 있었으니까.
한 달에 기본으로 주는 포인트는 1,000pt.
햄버거나 피자 같은 10포인트 이하의 음식을 구매해서 먹고 살면 한 달 내내 과식을 해도 포인트가 남겠지만
조금만 더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가격이 10배씩 겅중겅중 불어나고 있었다.
특히 검이나 갑옷 같은 아이템들은 강철 검 같은 공산품이 1천 포인트로 시작해서 수십만 포인트까지 훅훅 치솟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밑바닥부터 키워 나가라 이거지.
화면 너머의 세상을 살펴보며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 있었다.
나와 같은 존재들은 성좌라고 불리고, 화면 너머에서 우리에게 선택받는 사람들은 화신이라 불린다는 것.
도넛 모양의 땅은 게임의 맵처럼 밖으로 나갈수록 위험하다.
대륙 중앙의 호수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선택받은 화신들은 그곳으로 끌려가 교육을 받고 대륙 곳곳으로 파견된다는 점.
처음부터 포인트를 두둑하게 벌어서 시작하는 성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반대로 화신을 여러 명 거느린 성좌는 포인트가 풍족한지 시작부터 크게 지원을 하는 경우도 가끔 있고.
그래도 대부분은 물건 하나 못 받고 대륙 중앙으로 끌려가기만 할 뿐.
성좌가 화신과 대화를 하는 데에도 포인트가 들어가니
나 같은 가난한 성좌는 사실상 화신의 네비게이션이 될 뿐이다.
뭐, 계약 가능한 녀석들은 그 안내인의 말대로
재능을 피우지 못한 천재들의 영혼이란 게 사실인지 첫 전투부터 알아서 뚝딱뚝딱 해내는 게 대부분이고.
‘누구로 고르지?’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놀고먹으며 매달 주는 1,000pt를 차곡차곡 모아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런 꼼수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무료 계약권의 구매 기간과 유통기한이 딱 1달이었다.
유료로 구매하려면 10만 포인트나 소모해야 하니 100달을 날려 먹는 셈.
그래도 새로운 인생의 처음으로 기억될 계약자인데 대충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외모는 익숙한 쪽으로 하고 싶어 대륙의 동쪽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선택 장애라도 생겼는지 고르기 너무 힘든 상황.
누구 하나 눈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 비슷한데 선택지가 너무 많아 배부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할까.
일단 전투에 익숙하고 성좌의 말에 따라 전쟁터에 더 많이 나가는 여성을 골랐다.
거기에 전투 훈련을 받아야 하니 어리거나 늙은 사람을 빼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나이를 생각하고,
당연히 비만이나 저체중, 신체에 장애가 있거나 눈이 나쁘거나 하는 사소한 흠이 있는 사람들도 걸렀다.
그래도 너무 선택지가 많아 사심을 듬뿍 담아 아름다운 여성들만 골랐는데-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세상인지 그렇게 깐깐하게 골라도 마우스로 표시를 해 둔 선택지가 천 명을 넘어간다.
대부분의 영혼이 선택받은 천재들의 영혼인지 미남과 미녀의 비율이 말이 안 되는 수준.
심혈을 기울여 단 한 명을 골라야 하는데 전부 빼어나게 보이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만큼 걸러냈으면 꽝은 없을 것 같은데 슬슬 모니터를 보던 눈도 너무 피곤해 한 명 랜덤하게 고를까 하는 고민을 하던 찰나.
마우스를 옮겨둔 동네에서 꼬물거리는 한 명이 보인다.
낡은 아파트에서 후다닥 달려나가는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어째서인지 눈에 밟힌다.
남들보다 훨씬 빼어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눈길이 간다.
다큐멘터리를 보듯 계속해서 관찰하니 왜 관심이 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내가 지하실 골방에 틀어박히기 전 동료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부모가 다 죽고 여동생 손 꼭 잡고 생존자 무리에 합류한 녀석이 있었다.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책들을 뒤져 몇 장씩 찢어진 소설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녀석.
자기방어기재인지 정말 긍정적인 건지 원래 소설 주인공은 아픈 여동생이 있어서 시련을 이겨낸다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도 극진하게 여동생을 보살폈다.
결국, 오염된 식수 때문에 체력이 약하던 여동생이 죽었다.
녀석은 조금씩 변이해 가는 육체를 보면서도 인간성이 남아 있는 최초의 크리쳐가 되겠다고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떠벌거리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다.
부질없는 노력이었지만.
결국, 공동체의 중심을 잡아주던 남매가 덧없이 죽고 그로 인해 붕괴한 집단에서 나는 홀로 빠져 나왔다.
남자와 여자,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와 평범한 고등학생.
공통점이라고는 몸이 약한 동생과 단둘이서 살아간다는 점밖에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를 내려다볼수록 그 녀석이 떠올랐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녀석의 웃음이.
상황이 어려운 사람으로 화신 삼으면 좀 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내게 극진히 대할 것이다.
어차피 첫 화신인데 마음 가는 대로 골라야 하는 게 맞지.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핑계를 대며 나는 그녀를 선택했다.
[최초의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성좌의 근원을 탐색합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당신에게 계약서를 제시합니다]
무기력한 악몽이라니, 저게 내 이름인 걸까?
그와 동시에 포인트 상점 목록이 우르르 늘어나며 눈 아프게 N 표시를 띄운다.
“어, 계, 계약!”
마지막 문장은 내게만 보이는 게 아니라 화면 속에 있는 여성에게도 보이는지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던 여성이 화들짝 놀라 물건을 떨어트린다.
캔 커피가 바닥을 구르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만 손님이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요? 와! 지금 성좌한테 컨택 받은 거에요?”
“예, 예? 네, 일단 눈앞에 그런 메시지가 나오긴 하는데...”
“성좌님 이름이 뭔데요?”
편의점 안에 있던 손님 둘과 카운터에 있던 한 명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히려 호들갑을 떨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무기력한 악몽?
멸망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아 ‘무기력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 ‘악몽’
어째 칭호가 나를 타박하는 느낌이 드는데...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휴대폰으로 이것 저것 검색을 하는 동안 나도 화면에 떠오른 성좌의 이름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검색 기능은 없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가끔 정보를 띄워 준단 말이지.
판타지 왕국에서 괴물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죽은 기사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인류를 멸망시킨 바이러스를 끝까지 연구하다 죽은 과학자에겐 ‘넘어지지 않는 탐구자’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 외에도 예시가 잔뜩 있지만 직접 표현된 성좌는 거의 없었다.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는 게 규칙인가?’
조금 특이한 점을 꼽자면 화신처럼 성좌들 대부분도 내가 생각하는 남성/여성의 기준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었다.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왕자에게는 ‘시들지 않는 꽃’ 같은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니까.
“에, 무기력한 악몽... 검색 결과는 없네요. 첫 화신이라니 나쁘지 않은데요?”
“그런가요?”
“예, 그렇죠. 지원이 엄청나게 빵빵한 유명 성좌가 아니라면 오히려 처음을 같이 하는 게 나아요. 어중간하게 4번째, 10번째 화신 같은 게 되면 지원이 빵빵한 것도 아닌데 관심은 나뉘니까. 왜, 베스트 원보단 온리 원이 좋다는 말도 있고.”
성좌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있는 건가, 그리고 그런 말도 있었나? 하며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편의점 알바생과 다크 서클 가득한 회사원과 교복을 줄여 입은 양아치 남성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기묘한 모습.
“아 맞다, 빨리 승낙이나 해. 미쳤다고 거절할 건 아니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남학생이 등짝을 짝짝 두드리자 아프다고 울상을 지으면서도 허공에 손가락을 허우적댄다.
나는 마우스라도 있지, 그녀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글자를 맨손으로 건드리는 거니 어색할 만하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과 화신, 한예지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문장이 화면에 떠오름과 동시에 글자 너머에서 한예지의 몸이 빛으로 휘감긴다.
“와, 대박, 대박. 이걸 진짜 눈앞에서 보네.”
호들갑스러운 반응은 제쳐주고 나는 다시 목록을 쭉 읽어 보았다.
N은 당연히 New의 약자인 것 같고, 못 보던 녀석들이 깨알같이 잔뜩 생겨난 상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성좌의 권능이라는 문구였다.
화신에게 단순히 물건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내 포인트를 소모해서 영향력을 끼치는 건가.
그래서 그런지 확실하게 비쌌다. 이름이 삐까뻔쩍한 무기들보다 0 하나는 더 붙어 있는 가격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성좌님, 열심히 할게요!”
허공에 넙죽 고개를 숙여 보이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간이고 쓸개고 다 바칠 것 같은 모습에 약간 우월감도 느껴지고
정상적으로 웃고 떠드는 사람과 대화를 할 생각에 기대감도 느껴진다.
깜빡깜빡, 포인트 상점 목록만 띄워져 있던 컴퓨터 모니터 아래에 채팅 입력창이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화신과 의사소통을 하는 건가?
그래도 마이크에 직접 대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십여 년간 혼잣말밖에 안 해서 다른 사람과 육성으로 대화하는 게 어색해.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잘 부탁한다고만 적고 엔터를 눌렀다.
이래서 마우스만 있는 게 아니라 키보드도 있었구나.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첫 번째 화신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뭐야, 이 짧은 문장도 필터링을 해?
이래서 직접 소통하는 걸 포인트 받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