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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1화 : 밀실 (1/169)



〈 1화 〉1화 : 밀실

습기에 젖어 들어가는 쿰쿰한 시멘트 천장의 누런 얼룩. 수명이 다 되어가서 껌뻑거리는 낡은 전구.
세탁은커녕 관리도 제대로   헐어버린 낡은 담요와 푹신함이라고는 없는 폐자재 침대.
발도 제대로 뻗기 힘들지만 안전한, 그곳이 나의 세상이었다.


“참 좆같은 꿈인데.”


이런 포근한 곳이 아니라.


엉덩이가 쑥 들어간다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푹신푹신한 매트리스가 보인다.
세탁도 잘 되어 있는지 쿰쿰한 곰팡이 내음 섞인 축축한 감촉이 아니라, 뽀송뽀송한 극세사 이불이 잘 덮혀 있는 상태로.


솜 베개도 관리가  되어 있는지 푹신하기 그지없는 상태.
바닥과 벽지, 천장은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한 흑백의 모던풍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으며
새하얀 전등이 방을 화사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벽면에 있는 커다란 TV와 최신형 게임기, 컴퓨터, 작은 냉장고-

핵전쟁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문명의 흔적.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희망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인데, 어째서 이런 꿈 따위를 꾸고 있는 걸까.
차라리 깨어났을 때 이 상황을 기억조차 못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나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웅크렸다.

배가 고파서 강제로 깨어나게 될 때까지.


꿈에서 깨어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익숙해질  없는 허기짐이 나를 방해한다.
위장이 벌벌 떨리고 속살이 쓰라린  끔찍한 감각.
원래대로라면 바깥에서 긁어모은 통조림이라도 하나 뜯었겠지만
꿈에서 깨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자그마한 소형 냉장고로 향한다.

“씨발, 존나 디테일하네.”


대답해 줄 사람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꿈에서 깨어나질 않는다.
아니, 이게 꿈은 맞을까?
어쩌면 나 또한 방사능에 찌들어 뮤턴트로 조금씩 변이해 가며 인생 마지막으로 보는 주마등일지도.

물기 맺혀 있는 깨끗하고 시원한 캔 콜라와 냉동 볶음밥을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거대한 TV 반대편 방구석에 작은 전자레인지와 오물을 버릴 쓰레기통이 준비되어 있었다.


10년 만에 맛보는 멀쩡한 음식.

캔을 따니 치익- 하는 청량감 넘치는 소리와 함께 달짝지근한 냄새가 훅 올라온다.
기포 하나라도 놓칠세라 허겁지겁 캔에 입을 대니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탄산이 목구멍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이미 혀끝에 닿아버린 달콤한 맛 때문에 꿈이니 뭐니 궁상떠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그대로 냉장고를 비웠다.
탄산부터 과일 주스, 냉동 볶음밥과 냉동 치킨과 스파게티 종류까지.
이렇게 먹다가는 배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이빨 사이로 으스러지는 기름 잔뜩 먹은 야채와 밥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갑고 달콤한 탄산.
핵전쟁이 터지고 인류가 멸망한 지 수  년, 멀쩡한 음식은 단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차가운 탄산과 뜨거운 기름기의 자극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여전히 침대와 음식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녹슬고 낡은 콘크리트 대신 깔끔하게 유지되는 벽지들이 전등 불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을 뿐.
오히려 게걸스럽게 먹다 흘린 음식물 찌꺼기들이 전부 사라져서 처음처럼 정갈한 방이 눈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갈라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해 봐야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대충 15년 전쯤부터.


나름 공동체 생활을 하다 떼 몰살당하고 혼자 지하 쪽방에 틀어박힌 게 그쯤이니까.


배가 불러서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 뻐근한 등허리를 쭉 펴며 방의 벽면을 쭉 훑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TV와 컴퓨터가, 전등과 새하얀 벽지가, 냉장고와 침대가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아니, 변한 점이 있다면 벽에 걸린 커다란 TV와 컴퓨터의 화면이 깜빡거리고 있다는 점일까.


아무리 혼잣말을  봐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하나 만큼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깜빡거리는 화면을 향해 다가갔다.

웅웅거리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니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멸망한 세계에서 기계음이 들린다면 좋은 일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저 멀리 거대 쉘터에는 발전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내가 그곳까지  적은 없다.

TV와 컴퓨터 모니터 둘 다 같은 속도로 하얀 화면이깜빡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다가가니 화면 위에 드르륵 글자가 올라오며 내게 말을 건다.

[안녕하십니까, 마지막 생존자님]


“넌 누구야?”

[저는 안내인입니다]

“안내?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주겠다는 뜻이야?”


오래간만에 주고받는 인간적인 문답에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것도 잊고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이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내가 TV 화면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비웃겠지.
통조림도 멀쩡하지 않은 멸망한 세상에 카메라가 있다면 말이야.


사실 차가운 탄산 한 캔만으로도 나는 나를 납치해 이곳으로 불러온 사람의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패해서 가스가 빵빵하게 차오른 통조림 하나로 패싸움이 일어나 사람이 죽는 세상에서
신선하고 차가운 탄산음료는 말 그대로 목숨값보다 비싸니까.

[예, 화면을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삐익, 하는 짧은 소음과 함께 새하얗던 화면에 지도가 등장한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것처럼 푸른 대지를 보여주던 화면이 구름을 뚫고 점점 내려간다.
오염되지 않은 푸른 숲, 새파란 바다와 새하얀 눈, 사람의 살갗을 녹이지 않는 빗방울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중독시키지 않는 사막까지.


 가지 확실한 것은 땅 모양이 지구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세계 지도의 대략적인 모습과 너무 다르니까.

적어도 지구의 대륙은 도넛 모양이 아니다.

자그마한 섬들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대륙이 도넛 모양이었다.
내륙 중심에 바다처럼 커다란 호수가 있고, 둥그런 땅이 그 호수를 감싼 모양새.
심지어 화면이 조금 돌아가더니 둥근 행성이 아니라 평평한 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가, 내가 있는 곳이라고?”


핵전쟁 이후 방사능으로 인간이 괴물로 변이하는 꼴까지 봤지만, 내가 눈을 뜬 곳이 이세계이며 평평한 행성이라는 것은 상상도  했는데.


[이곳은 미처 피어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위한 정원입니다]


“너무 추상적인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없나?”

지성을 가진 존재와 대화를 하는 게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별 것 없는 대화지만 어째서인지 입꼬리가 실실 올라간다.
미소를 지어본  얼마 만인지 뺨 근육이 벌벌 떨린다.

[말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주민들, 화면 너머의 저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미처 꽃피우기 전에 명을 달리한 불운한 천재들이죠]
[그리고 이쪽에 계신 분들은 반대로 별다른 재능이 없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들입니다]


“그래, 나 같은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거네?”

[사람들이 아니라 존재들이 많죠]
[이곳은 모든 가능성들을 위한 정원이니까]
[당신이 앞으로 할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삐익 소리가 다시 울리고, 이번에는 TV  컴퓨터 모니터에 글씨가 빼곡한 목록이 주우욱 갱신되었다.
어색하게 책상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살살 굴려본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매끈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 화신 선택권 [0pt]
- 무구 소환권 [0pt]
- 호밀  [1pt]
- 우유 500mL [1pt]

가격순으로 정렬된 무수히 많은 목록.
공짜는 딱 두 개밖에 없었고  밑으로는 잡다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그 밑으로 내리면 식료품 말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다양하게 있었다.
힘의 비약처럼 단순명료한 이름부터 그믐 달빛 그림자처럼 추상적이라 이해할  없는 것까지.

[채 피어나지 못한 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TV 화면과 컴퓨터를 이용해서 저기 있는 사람  아무나 골라 도와주라는 거야? 게임 캐릭터 키우듯이?”


목록을 아래로 쭉쭉 내리다 보면 경험치 1.5배 쿠폰 같은 기묘한 것도 포인트를 받고 파니 이해를 하기는 쉬웠다.


재능이 있었지만 살아남지 못해 가능성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들과 재능은 없지만 아무튼 살아남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여 살아남지 못한 재능 있는 영혼들의 오랜 생존을 원하는  같은데.


생존 멘토,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마침 화면에서는 기묘한 공간 일그러짐과 함께 그 안에서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 기어 나온다.
허공의 아지랑이 속에서 살덩어리 괴물이 튀어나와 자동차를 들이박고 자빠지자, 건물  너머에서 옥상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검과 창을 들고 돌격하는 여자들,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는 남자들, 기묘하게 생긴 방패를 들고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는 여자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괴물들을 무찌른다.

거기서 조금,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기, 성별에 따라 재능이 달라지기도 해?”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힘쓰는 역할은 전부 여성들이 하고 있길래... 여자는 마법을  쓰는 거야?”

총 대신 냉병기를 들고 돌진하는 사람들의 90% 이상이 여자였다.
반대로 지팡이를 들고 후방에서 지원하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사람들의 80% 이상은 남자였고.
차원 이동을 했으니 판타지 세상이라 총과 폭탄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더라도 저것은 명백히 이상하다.


전투의 현장에서 화면을 조금만 돌려도 마찬가지다.
무너진 건물 잔해 위에서 헐렁한 나시티를 입은 추레한 여자들이 철거를 진행한다.
옆의 멀쩡한 건물의 전광판에서 양복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뉴스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정원에 모인 대부분의 존재는 모계 사회를 기반으로 여성 중심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통념에 따라 발전된 것이 화면 속 세상입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냐, 별거 아냐...”


모계 사회를 기반으로 발전한 여성 중심의 문명.
모계 사회는 우리 세상도 원시인 때 그랬다고 들었던  같은데 아닌가?
사냥을 남자가 나서고 채집을 여자가 맡으며 힘쓰는 걸 남자가 하는 방향으로... 이쪽 세상은 다른가.

하기야, 멸망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를 차원 이동시켜서 이런  없는 쪽방에 가둬두는 외계인들이다.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게 대수일까, 목소리 너머에는 촉수 수십 개가 달린 해파리 닮은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매달, 기본적인 포인트가 지급될 것입니다]
[포인트의 지급량은 당신이 성장시킨 저들의 가능성만큼 증가 할 것입니다]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원하신다면 노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문구를 끝으로, 지직거리는 글자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괴물의 시체를 치우는 사람들과 대피소에서 나오는 시민들을 비추는 화면뿐.

...일단, 음료수를 마시고 한숨 더 자고 싶다. 누군가에게 위협받지 않고 편안하게 자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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