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노예
칼리는 막막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내다봤다. 콰앙이 어슴푸레해진 거리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
‘노예라니….’
반면,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처음에는 그가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는 꽤나 짓궂은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진심이었어.’
정말로 칼리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야성이 그의 눈빛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진한 소유욕과 욕심이 깃들어 있는 눈빛.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심장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이제 나이도 거의 서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남자에게 두근거려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니.
“풋, 나도 참 주책이군….”
어이없는 상황에 칼리는 그녀답지 않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앞에 있는 잔을 들어, 천천히 들이마셨다.
호로록-
쓰디쓴 커피가 혀에 닿자, 흔들렸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꿀꺽하고 목구멍으로 삼킨 다음,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팬을 들어 종이에다가 천천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을 나선 건, 밤이 깊어 어둠이 완전히 거리를 집어삼킬 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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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들었어?”
이사벨라가 앞에 있는 베이컨을 잘라 먹으며 말했다.
“입에 있는 거 다 삼키고 말해. 음식물 전부 다 튀잖아!”
“씨, 더럽게 쪼잔하게 구네.”
“더러운 건 너고, 이 년아. 그래서, 뭘 들어?”
“길드장 있잖아.”
“어.”
“길드장 자리 내려놓고 이제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고 하던데?”
“그래?”
“별로 안 놀라네?”
내 반응에 그녀가 불만족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뭐,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진짜? 어떻게? 길드장이랑 그리 친한 거 같지도 않던데.”
“짧지만, 함께 전쟁을 치룬 사이니까.”
전쟁은 인간의 추악함을 보게 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고귀함마저 보게 해준다. 그래서, 전쟁은 축복이자 저주라고 불린다.
‘적어도, 그때 본 칼리는 추악함보다는 고귀함에 가까웠으니까.’
물론, 자기 살려고 나를 갑자기 별동대에 넣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양반이었다. 죄책감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리고. 있잖아?”
“또, 뭔데?”
“그 길드장이 다른 사람 아래로 들어간다고 하던데?”
“길드장이?”
“응. 그 어린 나이에 골드급에 승급하고 이후에 무려 길드장까지 올라 간 그 대단한 사람이!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간다는 거야!”
“놀랍네.”
사실, 별로 안 놀랍다. 나는 시큰둥해하며 앞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
“기대되지 않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그 길드장이 아래로 들어가는 건지?”
딸랑딸랑-
뒤에서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어어, 길드장이다. 여긴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지?”
이사벨라가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칼리는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어, 왜 이쪽으로?”
곧, 옆에 선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미천 한 노예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어어어?”
당황해하는 이사벨라를 무시하고는 나는 말했다.
“일은 전부 처리했어요?”
“예. 모든 인수인계를 마쳤으며, 길드장 자리도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퇴임 연설도 한다고 하더니, 일찍 끝났네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주인님을 보필하는 게 더 알맞은 일이니까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식사는 했어요?”
“아침부터 일을 처리하느라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옆에 앉아서 같이 먹어요.”
“저는 지금 노예의 신분인데 괜찮겠습니까?”
“오히려, 바닥에 놓고 식사하게 하면 제가 길가다가 칼 맞을 걸요.”
그녀 자신은 자기자신의 평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리벨룸 안에서 그녀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좋았다.
그야, 이때까지 쌓아 온 행보와 커리어도 그렇고. 가장 결정적인 건 안토니 백작을 정말로 고발해 사지로 몰아넣고, 그에 더해 모험가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하게 한 것.
이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자신이 한 말은 모두 지키는 유능한 여자. 무릇, 여성이라면 동경할 만한 대상이지 않는가?
“그런 여자를 노예를 만드셨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시면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닌지.”
칼리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길드장에서 내려왔다고, 이제는 말투나 행동이 조금은 편해진 게 보였다.
“가지고 싶었으니까.”
내가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남자에 익숙한 줄알았는데, 의외로 쑥맥이었다.
‘나야 환영이지만.’
“에에에?”
이사벨라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이긴, 칼리가 내 노예가 된 거지.”
“아니, 그러니까. 왜, 길드장이 네 노예가 된 거냐고!”
“이젠 길드장이 아닙니다.”
칼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왜, 네 노예가 된 건데?”
“뭐, 네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그녀가 내게 큰 신세를 졌고, 그녀는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간에 들어주는 약속을 했지.”
“그 대가가 이거란 말이야?”
“응.”
“아니, 무슨… 이게… 와….”
이사벨라는 어버버하다가 결국 앞에 있는 수프를 다시 떠먹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생각을 포기한 듯했다.
“여기 엘프의 여관 점심 특선 나왔습니다!”
곧, 레이나가 준비 한 음식이 나오더니 테이블 위에 얹어졌다.
“고맙, 아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우아한 자세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모험가의 식사 방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마치, 책에서나 볼법한 귀족의 예법을 보는 느낌이었다.
‘길드장 특성상 귀족과 식사 할 상황이 많아서, 이런 예법이 몸에 베인 거겠지.’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여타, 다른 모험가에선 느껴지지 않는 고급스러움이 그녀에겐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으니까.
새삼스럽지만, 저렇게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그녀를 보고 나니, 자신이 어떤 여자를 노예로 만들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됐다.
앞에 있는, 모든 여자 모험가들의 선망 대상인 그녀가 지금 내 노예인 것이다.
“식사하고 나면, 간단한 의뢰라도 하러 가볼까요? 얼마나 강한지 솔직히 궁금하거든요.”
이전의 전쟁에서 그녀는 전투보다는 주로 지휘에 주력하다 보니, 무력을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노예는 그저 주인님의 의사에 따를 뿐입니다.”
마음에 드는대답이었다.
“그럼, 가보죠.”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모험기 길드로 갔다. 그런데, 역시나.
“저것 봐, 폭풍의 활이야. 옆에는 길드장인 거 같은데?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지?”
“바보야, 오늘 올라 온 공지 못 봤어?”
“글을 못 읽는데, 어떻게 봐. 씹년아.”
모험가 길드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었는데.
“흐흥~”
칼리는 익숙한 듯 그것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이건 어떨까요, 주인님?”
“주, 주인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인지, 모험가 길드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어제, 분명히 되도록이면 주종 관계인 걸 외부에 최대한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걸 하루도 안 돼서 어겨버렸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니 싱긋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일부러 했다는 게 딱 봐도 보였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예전에 봤을 때는 냉정하면서도 조용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짓궂은 여자애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 봐요.”
[난도 : 실버-중급]
[적정 인원 : 2인 이상]
[종류 : 잔당 소탕]
[대상 : 오크 부족]
오크랑 싸운지 얼마나 됐다고, 또 오크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이게 하고 싶어요?”
“예. 오크들은번식력이 엄청 나, 3년이면 그 정도의 수가 다시 불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똑같은 비극이 3년 뒤에 또다시 벌어지게 되겠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강화 된 감각으로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직도 토벌전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칼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다음 말했다.
“주인 된 도리로서, 노예가 힘들어하는 걸 그냥 넘길 수 없겠죠. 그래요, 이걸로 해요.”
“주제 넘은 발언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칼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웃으며 의뢰지를 떼어, 창구 앞에 가져갔다. 역시나, 놀라는 접수원의 반응은 덤.
이런저런 절차를 모두 마치고는 밖으로 나와, 바로 마차에탑승했다. 별다른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칼리의 개인 마차인가요?”
이전에 타던 것과는 달리 탑승감이 엄청나게 편안한마차였다. 앞을 보니, 다른 마부들과 달리 뭔가 전문적인 여자가 보였다.
“예, 그렇습니다.길드장으로서 출장을 가야하는 일이 많아,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래요? 편하네요.”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저의 것은, 모두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마차가 달리기를 한참, 밤이 깊어갈 때쯤. 우리는 그 지긋지긋했던 대평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남아 있네요.”
시간이 쫓기듯이후퇴해서인지, 임시 본부가 있던 자리에는 여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잠깐 눈을 붙이고는 새벽부터 일어나, 사냥에 나섰다. 오크들이 대평야를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쿠르아악-!
정면에서 대놓고 부락에 접근하자, 오크 기수들이 곧바로 출전하는 게 보였다.
“상대할 수 있겠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칼리는 허리춤에 착용한 검을 빼어들더니, 지면을 박차며 달려갔다. 늑대를 탄 기수보다도 빠른 속도.
곧, 푸른 기운이 그녀의 몸과 검에 스며들더니.
화악-!
기수들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쿠르륵-?
의문이 담긴 오크의 목소리. 하지만, 그 의문은 그리오래가지 못했다.
쿵-
놈들의상체와 하체가 그대로 분리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미친.’
나도 아주 잠깐이지만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어떻습니까, 주인님?”
그녀의 검은 처음과 같이 여전히 찬란한 은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쳤네.’
이거 생각보다 엄청 대단한 노예를 얻은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