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전직
“깃들어라.”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화살에다가 바람의 힘을 담았다.
“후우.”
석궁을 들어 조준기 안에다가 오크 족장의 모습을 담았다. 그 커다란 오크가 아주 작게 보일 정도의 간격. 이렇게 먼 거리를 상대로 저격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잠시 떠올랐다가 머리저편으로 사라졌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만 해.’
그래야지, 승리할 수 있다.
“후.”
숨을 내뱉은 다음 길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흡하고 참았다. 석궁의 떨림이 점점잦아들더니, 호수 위의 물처럼 고요해졌다.
투웅-
방아쇠를 당기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
화살은 바람을 타고 유유하게 날아갔다. 그렇게 첫 번째 화살이 오크 족장 근처에 다다른 순간.
“쿠흐악!”
맨 앞에 있던 하이 오크가 소리를 질렀다. 놈의 반응에 가장 뒤에 있던 오크의 고개가 뒤로 확하고 돌아갔다. 그 순간.
콰악-!
놈의 미간에 화살이 정확하게 박혀들었다. 하이 오크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쿵-
“쿠르아아악!”
하이 오크들이 혼란에빠지기도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번째 화살이 곧 그들의 주변에 당도했다.
오른쪽을 맡고 있던오크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휘둘렀다.
후웅-
화살의 궤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니, 분명히 이번 공격은 막혀져야만 했다. 하지만.
콰악-!
화살이 아래에서 위로 확하고 솟구치더니, 두 번째 오크의 턱에 적중했다. 화살은 더욱더 나아가더니, 입과 코를 지나 뇌마저 꿰뚫어버렸다.
쿵-!
두 번째 오크마저 당했다.
쿵쿵-
이때까지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북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또다른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오크들에게 주술을 걸어주는 게 아닌,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도움의 북소리였다.
“쿠르악!”
하이 오크가 다시 북을 두드리며 말했지만, 이미 겁을 먹은 오크 족장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도 않았다.
“쿠륵, 쿠르윽!”
결국, 맨 앞에 있던 골드급의 하이 오크가 뒤로 와, 족장의 몸을 가렸다. 마치, 자신은 절대 뚫을 수 없다는 듯한 움직임.
쿵쿵쿵쿵쿵-
그 벽과 같은 덩치때문일까, 족장의 북소리가 다시 주술을 걸기 시작했다.
후웅-!
이어서, 세 번째 화살이 지척에 다다렀다. 정확하게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 오크가 무기를 들어올리는 순간.
후우웅-!
강렬한 바람이 일더니, 화살의 궤도가 오른쪽으로 휘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 놈의 도끼 역시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쿠르악!”
하이 오크는 단언했다. 이건 무조건 막았다고. 놈의 무기에 화살이 막히려는 순간.
화아아악-!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공기가 아예 화살을 하늘을 향해 날려버렸다. 화살은 계속해서 올라가더니,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쿠르륵.”
남은 또 다른 오크 한 마리가 이제는 괜찮겠다며 안심하는 웃음을 지었다. 언덕을 보니, 다른 오크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중간에 주술이 끊겨서인지 이전처럼 인간들을 학살하진 못했지만, 방어선 곳곳이 박살이 나 있는 걸 보니 이번에도 승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르륵.”
하이 오크를 둘을 잃은 건 큰 손실이지만, 그래도 족장이 살아 있으니 이번 전쟁은 오크들의 승리였다.
후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갑자기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만 아니었다면.
“쿠륵, 쿠르르악! 쿠르루룩!”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화살의 모습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연속적인 전투로 인한 피로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착잡해서인 걸까?
“쿠르윽….”
그렇다면, 지금 몸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정령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마저도 착각인 걸까?
계속 느껴지는 불안감에 하이 오크의 시선을 주변을 향하다가 끝끝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후웅-!
오크의 불안함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콰악-!
다만, 너무 늦게 봤을 뿐.
###
쿵쿵-
심장 소리처럼 격렬하던 울려퍼지던 북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어들었다. 정면을 보니, 하이 오크 사이에서 우뚝 서 있던 족장이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게 보였다.
“죽었어….”
리데우나의 목소리.
“죽었어!!!”
이어서, 소피아의 목소리까지. 별동대 인원들 모두가 놀랐다. 물론, 나 역시도 놀랐다.
[여신 : 어케 했노, 씨발년아!]
[사신 : 어?]
‘와, 이게 되네?’
설마했는데, 정말로 잡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신 :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도배하지 마요!”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에 사신이 찡찡거리며 채팅을 쳤지만, 전부 무시해버렸다.
우리가 기뻐하기도 잠시. 족장의 주변에 있던 하이 오크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확하고 돌아가는 게 보였다.
해일과도 같은, 강렬한 살기가 우리를 덮쳤다. 그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닌지, 모두가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족장을 잃은 오크들의 원한은 상상을 초월한단 말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서로 얼싸안고 있던 압도적인 힘의 파티원들이 재빨리 재정비를 했다.
쿠구구궁-
모두가 다시 후퇴 할 준비를 마친 순간.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다.
“어?”
뒤를 돌아보니, 하이 오크 기수를 선두로 수십 마리의 오크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봅됐다! 존나 째!”
우리는 재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폭발해라.”
뛰어가면서 석궁을 쏘는데, 놈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이전과 같이 맞아주질 않았다. 오크의 눈을 자세히 보니,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광폭화?’
원한이 상상을 초월 할 정도라고 하더니, 죽을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는데 광폭화가 발동됐다.
‘미친 새끼들 아니야!’
그 뒤에도 갖가지 화살을 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크아아아악-!
뒤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짐승 소리. 하이 오크 기수가 지척까지 다가온 거다.
“이거 절대 못 도망쳐! 그냥 싸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소피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조했다.
“그럼, 저기 앞까지만 가서 싸워요!”
앞에 보이는 작은 언덕. 그다지 큰 영향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해야 했다.
그야 그럴 게, 우리는 지금 다섯 명이서 수십 마리의 오크와 싸워야 할 처지였으니까.
“아오, 내가 이래서 별동대에 안 오려고 했던 건데! 칼리 그 씨발년!”
리데우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죽을 위기에 처해서인지 말에 거침이 없었다.
계속 달려가고 있을때, 뒤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는 감각에 곧장 앞으로 굴렀다.
후웅-!
아주 찰나의 차이로 도끼가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콰앙!”
“계속 달려요!”
내가 공격당하는 걸 보고 멈추려고 하는 리오테르를 말렸다. 어차피, 도와줘봐야 벗어나는 건 틀렸다.
“불어라!”
나는 곧장 흙바닥에서 일어나, 정령술을 사용했다. 몸이 확하고 가벼워지더니 바람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크르아아아악!
짐승과도 같은 하이 오크의 소리.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
‘이거 이대로라면 절대 못 이겨.’
광폭화가 아니어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지금 이 상태면 무조건 진다.
‘전직밖에 없어.’
사신이 죽음의 시련을 대가로 내 건 보상. 그것밖에 살 길이 없었다.
“사신, 보상 내놔! 씹년아!”
급한 마음에 외쳤다.
[사신 : 뭐, 뭐? 야, 너 신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닥치고, 급하니까 빨리 달라고!”
[여신 : 아 ㅋㅋ 싸가지고 뭐고 빨리 내놓으라고 ㅋㅋ]
[성신 : ㄹㅇ ㅋㅋ]
신들의 동조에 사신도 더 이상 불만을 뱉지 못하고 보상을 지급했다.
[죽음의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하셨습니다!]
[대리자가 전직할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두 가지 길을 찾았습니다!]
[영웅, 정령 궁사로 전직 할 기회를 획득하셨습니다!]
[영웅, 카사노바로 전직 할 기회를 획득하셨습니다!]
전직이라는 게 이런 걸 의미했나 보다.
‘정령 궁사는 지금도 불리고 있는데.’
뭔가 다른 게 있나 보다. 카사노바가 뜬 이유는 이리저리 문란하게 즐겼기 때문이겠지.
‘마음 같아서는 카사노바가 하고 싶지만….’
지금 저걸 골랐다가는 섹스는커녕 바로 죽을 것이다. 나는 달리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여, 정령 궁사를 클릭했다.
[정령 궁사를 선택함에 따라, 민첩 스탯을 ‘5’를추가로 획득합니다!]
[민첩 : 26]
[정령 궁사를 선택함에 따라, 정령 친화력과 감응력. 마력이 모두 상승합니다!]
[정령 궁사를 선택함에 따라, 새로운 특성이 생성됩니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을 획득하였습니다!]
[정령의 가호를 획득하였습니다!]
[정령 궁사를 선택함에 따라, 무기가 변경됩니다!]
뭐가 이리저리 많이 뜨는데, 일단 몸이 확실히 엄청나게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정말로 쏜살처럼 확하고앞으로 튀어나가더니, 어느새 언덕에다다렀다.
“뭐, 뭐야? 너 뭐가 그리 빨라?”
어찌나 빠른지 리데우나도 화들짝 놀랐다. 나는 대답 할 틈도 없이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활?’
이때까지 석궁만 썼는데, 갑자기 활이라니? 하지만, 당황하기도 잠시. 활을 어떻게 쏘아야할지 머릿속에 곧바로 떠올랐다.
기다란 마력 화살을 뽑아, 활에다가 건 다음 시위를 당겼다.
“몰아쳐라.”
처음 써보는 거였지만, 이거면 가능하다고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력이 모두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틀-
현기증이 일었으나,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후우우웅-
화살에 담긴 마력이 거대해서인지, 활을 든 내 주변에서 바람이 솟구쳤다. 앞머리가 계속 휘날리는 게 거슬렸다.
쿠르아아악-!
그렇게 빨리 도착했는데 어느새 하이 오크 기수가 턱밑까지 쫓아왔다. 지긋지긋한 녀석.나는 놈에게정확하게 화살을 조준했다.
쿠르르르륵-
하이 오크 기수들은 그런 나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듯, 늑대를 옆으로 틀었다. 지금 시위를 놓아도, 놈들은 공격을 피할 것이다.
투웅-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활을 돌리지 않고 화살을 발사했다. 그리고.
화악!
바람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하이 오크 기수는 물론이고, 뒤에서 달려오던 오크 워리어와 오크들의 부대의 중앙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길고 깊게 파인 원기둥 형태의 땅만이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대변해주는 듯했다.
후우우우웅!
“어?”
갑자기 솟구치는 바람에 멍하니 보고 있던 파티원들도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이게 대체 무슨….”
그들의 눈동자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이 정체불명의 현상을 일으켰다고 추정되는 인물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네 명의 여인이 괴물 바라보듯하는 시선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뭐해요? 안 가요? 남은 오크들 죽여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