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전쟁
“살아서 돌아와야 해!”
이사벨라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와 리오테르는 똑같이 화답하고는 길을 나섰다.
“회의장 들어가셔서 무슨 얘기 들으셨어요?”
출전하기 전, 각 파티의 파티장들을 모아 회의장으로 불러들였었다. 아마, 거기서 계획에 대해 얘기했겠지.
“오늘의 목표는 최전선에 방어선을 짓는 거라고 들었다.”
“방어선이요?”
“그래. 어제 우리에게 말했던대로, 다른 길드에다가 지원 요청을 했다고 하더군. 아마, 길드장은 지원이 올 때까지 전선을 고착화 시킬 모양이다.”
“그걸 위해서는 방어선이 필수다?”
“그래. 역시 길드에 오래 있었던 만큼, 군사학에 조예가 있는 거 같다.”
“과연, 오크들이 그걸 그대로 둘까요?”
“저항이엄청날 거다. 하지만, 지원대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걸 생각해보면, 방어선은 최대한 앞에 만드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렇긴 하겠네요.”
“그리고, 아마 오크들도 아직 완전히 준비는 안 됐을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건 없다.”
거의 반나절을 꼬박 걸었을까. 해가 거의 저물어갈 때쯤, 모험가들은 목표로 했던 언덕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크 군락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장소였다.
“바로, 건설을 시작해라!”
모험가들이 운반한 자재가 놓여지더니, 곧 벽과 함께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마법과 정령술 덕분인지, 방어선은 빠르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마법사들과 함께 자재를 운반하고 짓는 데에 도움을주었다.
“이야, 남자가 그 나이에 벌써 정령 두 마리랑 계약했다고? 대단한데? 재능이 있나 봐.”
주변에 여자 마법사들이 나를 귀여워 해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에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사실은 그냥 신의도움을 받았을 뿐이지만.
‘뭔가 치트키를 쓰는 느낌이긴 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내 주변에 엘프 정령사가 꽤 있는데, 걔들도 100년은 지내야지, 두 정령이랑 간신히 계약한다고 하던데?”
“그래요?”
나 말고 다른 정령사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애초부터, 마법사보다 더 귀한 존재였으니까.
“어어. 그거 생각해보면, 너는 벌써 두마리랑 계약한 거니… 어쩌면, 인간 최초로 4대 정령이랑 전부 계약할 수도 있겠다.”
대화를 나누며 일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새,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힘들다, 힘들어.”
하루종일 일한 탓인지 마법사들의 마력이 모두 고갈됐다.
그래도, 모두가 열심히 한 덕분에 엉성하지만 바리케이드는 모두 세워졌고, 사람들이 잘 만한 건물도 건설을 마쳤다.
“배식 받아가!”
저녁 시간. 모험가들이 막사 안에 모여,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진짜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는 줄 알았어.”
“그래도, 이거 하루 이틀만 더 하면 된다니까. 그건 다행이네.”
“구경하지 말고, 빨리 먹도록 해라.”
막사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리오테르가 말했다.
“네, 누나.”
숟가락으로 스튜와 빵을 먹었다. 마법사의 음식이라 그런지, 맛은 제법 괜찮았다.
“함께 먹어도 괜찮겠나?”
그렇게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옆자리에누군가 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머리칼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눈에 상처가 있는 날카로운 아가씨, 길드장 칼리였다.
“아, 네네.”
나는 살짝 옆으로 비키며,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고맙다.”
칼리는 자리에 앉더니, 남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길드장이라고 색다른 음식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나 보다.
“오늘 보니까, 아주 열심히 일하더군.”
칼리가 스튜를 삼키더니 말했다.
“빨리 건설해야지 저희가 안전해지잖아요. 그리고, 자재 옮기는데 마력이나, 모험가분들 힘 소모 시키는 것보다는 제가 옮기는 게 낫죠.”
“좋은 마인드다. 그것보다 며칠 동안 너를 보며 상당히 놀랐다.
“왜요?”
“몇 주 전만 해도, 브론즈 승급을 겨우하던 모험가가, 갑자기 이렇게나 강해졌을 줄은 몰랐으니까. 리데우나에게 들어 보니,오크들에게 도망칠 때도 너의 사격술과 정령술이 빛을 발했다고 하더군.”
“에이, 뭘요.”
“빈말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때까지 수많은 모험가를 봐왔지만, 너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내는 처음 봤다.”
사내. 이 세상에선 거의 처음으로 들어본 단어 같다.
“아마, 이번 토벌전만 무사히 마무리 한다면. 실버 승급전을 무시하고, 바로 실버급 모험가에 다다를 수도 있을 거 같다.”
“저, 정말요?”
벌써, 실버급이라니?
“농담이다.”
“아.”
칼리가 피식 웃으며말하는데, 이때까지 무표정만 봐서인지 그 미소가 새로워 보였다.
“그래도, 실버급에 엄청난 속도로 다가가고 있음에는 부정할 수 없겠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는지, 그녀는 별 말 없이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있잖아요. 길드장님.”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모험가의 길드장이랑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냥 칼리라고 불러라.”
“그건 제가 부담스러워서요.”
천천히 스며들 듯이 가까워져야 하지, 한 번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불러라. 그것보다 질문이 뭔가?”
“원래, 이렇게 조용해요?”
“뭐가 말인가?”
“아니, 여기까지 오면서 리오테르 누나가 말했거든요. 분명, 저항이 거셀 거라고. 근데, 그런 거치고는 오크들 동태에도 변함이 없잖아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자신을 언급해서인지, 리오테르가 몸을 움찔거렸다.
“흠. 그건 나도 의외라고 생각한다만, 우리와 사고방식부터가 다른 종족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가요…?”
“그래. 그럴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방어선을 짓고 있는데, 그걸 저지하지 않는다? 오크처럼 전투에 능숙한 종족이?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적이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럴 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빵을 뜯다말고 말했다.
“길드장님. 어쩌면. 이게 사실은 작전인 거 아닐까요?”
“작전? 무슨 작전말인가?”
“오크들 입장에서는 신체 능력에 자신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걔들 입장에서 가장 큰 골칫덩어리는 뭘까요?”
“정령사와 마법사일 거다. 특히나, 정찰대를 추격하다가 너에게 큰 피해를 입었으니, 더욱 경계하고 있겠지.”
“그러면, 사실 오크들은 마법사들의 마력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게 아닐까요?”
“마력이?”
“네. 척 봐도, 저희가 마법을 이용해서 공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게다가, 오크 군락과 저희 기지는 아슬아슬하게 눈에 닿을 정도로 가까우니….”
“그러고 보니, 감시를 하던 모험가들에게 듣기로는 가끔 오크들이 중간까지 나와, 우리 기지를 관찰하고 돌아갔다고 하긴 했….”
그녀의 말에 우리 셋은 먹던 손을 멈칫했다.
“그럼, 설마….”
삐이이이이이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방어선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야?”
“경고 마법?”
막사 안이 횡설수설할 때, 모험가 하나가 들어와 외쳤다.
“적습이다!”
“씨발!”
칼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안에 있는 모험가들 역시 먹던 것들을 던지 듯이 내려놓고는 뛰쳐 나갔다.
쿠구구구궁-
땅이 울릴 정도의 소리. 방어선 근처로 다가가자, 수십 마리의 오크가 전투 늑대를 탄 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엄청난 수의 오크가 보였다.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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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제자리로 가라!”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당황하기도 잠시. 모험가들은 능숙하게 무기를 들고, 바리케이드 근처로 달려갔다.
“전부 이거 받아!”
그렇게 하나둘 준비가 되고 있을 때, 마법사가 회복 포션과 함께 물약 하나를 내밀었다. 보라색 액체가 담긴 병.
“이건?”
“밤의 시야라는 물약이다. 밤을 대낮처럼 볼 수 있게 해주는 물약이지.”
리오테르가 친절히 설명해주며 뚜껑을 따 마셨다. 나도 함께 마시자, 어두웠던 주변이 환하게 보였다.
‘와, 시발.’
정면을 쳐다보자, 이때까지 어둠에 가려졌던 오크들의 모습이 대놓고 보였다.
대부분의 오크가 모두 출전했는지, 언덕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곧, 전장에 울리기 시작하는 북소리. 오크들 몸 주변에 초록 문양이 떠오르더니 곧, 그들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졌다.
“쏠 수 있는 건, 전부 쏴!”
전선곳곳에서 간헐적으로 화살이 날아가, 오크들을 맞췄다.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워낙, 급하게 출전하기도 했고. 잘 훈련된 모험가 부대도 아닌지라, 일제 사격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개인의 기량에 맡겨서 하나라도 더 죽이길 바랄 뿐.
“마법사들 마력은!?”
“없어, 없어!”
“마나 포션도!?”
“그런 고급품이 있겠냐고!”
들려오는 마법사들의 목소리에 아까 했던 얘기가 맞았음을 직감했다.
‘첫 날부터 총력전이라니….’
오크들도 어지간히 미친 놈들인가 보다.
“깃들고, 폭발해라.”
화살에 마력을 부여한 다음 그냥 보지도 않고 바로 쏴버렸다.
퍼버벙-!
언덕 아래에서 폭발이 발생하며, 오크들이 이리저리 날아갔다. 폭발에 의해 만들어진 구덩이가 그들의 기동력을 저하시켰다.
“아직, 마력이 남아 있는정령사가 있다!”
심각하던 모험가들의 낯빛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쿠르르륵!”
반대로, 오크들은 잔뜩 화가난 듯 나를 노려봤다. 뭐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르는 걸 보아, 나를 최우선 타겟으로 설정한듯했다.
다시 폭발 화살을 장전하고는 놈들을 향해 쐈다. 바람의 힘이 없으니, 늑대 기수들에게 맞추는 건 불가능했다.
퍼버벙-!
쿠르으윽-!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반 오크와 워리어들에겐 커다란 피해였다. 그렇게, 30마리가 좀 넘는 수를 죽였을까.
쿠구구궁-
어느새, 오크 기수들이 바짝 다가온 게 보였다.
“바리케이드가 있으니, 쉽게 공격은….”
어느 모험가가 그리 말했지만, 그 말은 끝맺지 못했다.
쿵쿵쿵쿵-!
다시 한 번 북소리가 울리며 놈들의 몸에 녹빛 문양이 떠오르더니, 바리케이드를 점프로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콰악-!
맨 앞에 서 있던 모험가들이 늑대의 이빨에 물어뜯겼다.
“씨발, 찔러!”
하지만, 이쪽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창과 같은 장병기를 든 모험가들의 무기를 크게 내찔렀다.
푸욱-!
대부분의 늑대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죽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진짜 전력은 그 위에 타고 있던 하이 오크와 오크 워리어들. 놈들이 바닥을 구르더니, 일어나며 커다란 대검을 휘둘렀다.
촤악-!
무기마저 통째로 박살내고는 그 너머의 인간마저 베어버리는 괴력. 가히, 인간은 대적하지도 못할 힘이었다.
“크륵, 죽여주마!”
하이 오크 중 하나가 눈을 빛내더니, 나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 팀 뭐하냐고! 원딜 지켜달라고!”
라고 말하기엔, 주변의 상황도 여의치 않은 상황. 대부분의 모험가가 하이 오크에 달라붙어 싸우고 있었다.
“와악!”
놈의 검이내게 닿으려는 순간. 코 끝에 붉은 머리칼이 휘날리며,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 섰다. 매혹적인 장미의 향기.
검이 사납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누나!”
나를 지켜준 사람의 정체는 리오테르였다. 그녀는 얼굴만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넌 내가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