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던전 (1)
“어렵군.”
피의 계약을 맺고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서류를 살펴보았다.
“많이 어려워요?”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뜻의 어렵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난이도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아아….”
리오테르는 앞에 있는 맥주를 홀짝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던전을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전력 파악이다. 어떤 형태의 던전이며, 어떤 종류의 괴물이 나오고 또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관하여. 모두 알아야 하지.”
“근데,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알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알아두는 편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을 달리하면, 어떤 방식으로라든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무섭네요.”
“뭐, 말을 좀 강하게 하긴했지만, 생각보다 그리 위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던전이니까 주의해야겠지.”
“그래서, 서류에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음, 던전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에 탁한 기운이 섞여 있다고 하니, 아마 언데드가 나올 가능성이 높을 거다.”
“언데드….”
딱 한 번이지만 언데드를 만나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걔들은 햇빛에 노출된 데다가, 성당에 자리하고 있어, 엄청 약한 놈들이었다.
‘던전에서 나오는 녀석들은,그 정도로 만만하지 않겠지.’
예전이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화살로 뼈를 박살 낼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불의 정령을 얻었으니, 어쨌든 간에 도움이될 것이다.
“사제는 안 데려가도 되나요?”
“데려가면 좋긴 하지만, 실버급 수준의 사제를 모험가 사이에서 구하는 건, 트롤의 재생을 막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니, 그냥 가는 게 좋을 거다.”
아마, 불가능하다는 뜻인 듯했다.
리오테르는 남은 술을 모두 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새벽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산 다음, 곧바로 출발할 거니 이쯤에서 자는 게 좋겠다.”
그녀의 말에 나도 술을 비우고는 따라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새벽에 봐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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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네요.”
여름임에도, 리벨룸의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북부에서부터 불어온 칼바람이 도시를 지나치는 시간이니 추운 건 당연하다.”
“북부요?”
생각해보면, 북쪽으로는 거의 가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아, 콰앙 너는 자연인이라서 모르겠군.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지.”
그녀를 따라 길을 따라 나섰다.
“북부에는 야만인이 산다는 거, 알고 있었나?”
“야만인이요?”
“그래. 피부를 찢을 정도로 서늘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 북부. 서식하는 짐승과 괴물 하나하나가 네임드급에 가깝다는 북부,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우리 중부와 남부 사람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지.”
“그런 곳에서 살아남을 정도니, 엄청 강하겠네요?”
“그래. 북부인 중에서는 오러 유저가 아닌 여자가 없다고 하더군. 그러지 못한 야만인은 모두 죽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일로 넘어와서, 모험가를 하면 엄청나게 성공하겠네요.”
“뭐, 그렇긴 하지만. 야만인 중에서 모험가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왜요?”
“드워프의 장인들과 엘프 마법사, 그리고 인간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북부를 가둬버리는 장벽을 설치했기 때문이지. 설치에 진행 된 시간만 해도 자그만치 100년이 넘는다더군.”
“장벽을요? 그게 가능해요?”
“뭐, 나도 기… 아니, 동료에게서 말만 들은 거라서 모른다.”
“대체, 왜 설치했데요?”
“뭐, 북부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지. 모두 오러유저인 북부인들이 대륙을 침략하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서, 북부의 몬스터들이 모두 이쪽으로넘어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설치한 이유가 다 있었네요.”
“그래. 하지만, 뭐. 이게 사실일지, 아니면 거짓일지는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상업 구역에 도착했다. 새벽임에도, 이곳은 장사의 열기로 가득했다.
“던전의 규모를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은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
그 탓에 우리는 맛대가리 없는 육포만 수십 장을 사야만 했다.
텐트와 마법등. 그리고, 알람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까지 모두 사자, 우리는 대략적인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것 외에는 내 가방에 모두 챙긴 상태이니, 바로 출발하면 될 거 같다.”
“그럼, 갈까요?”
“지인들에겐 의뢰를 하고 온다고 말했나? 던전이니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델리카와 이사벨라는 같은 여관이라서 말했고. 레이나 역시, 노예이니 말했다.
‘실바나랑 루시가 문제이긴 한데.’
아마, 별 신경은 쓰지 않을 거다.
“네. 모두 말했어요.”
“그럼, 가도록 하지.”
던전의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어, 마차는 섭외하지 못했다. 리오테르와 나는 물품이 든 가방을 하나씩 매고,리벨룸 밖으로 나왔다.
“우와….”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불태울 듯이 떠올랐다. 주황빛으로 물든 벌판은 꽤 운치가 있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생각나네.’
그때도 이러한 장면을 보며 이세계에 왔다는 걸 체념했었다. 고작, 한 달밖에 안 됐을 뿐인데 감상에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
“콰앙, 빨리 와라!”
일출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졌는지, 저 앞에서 리오테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혼자였지만.
‘이젠 혼자가 아니야.’
나는 가방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힘껏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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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태양도 완전히 떠올라 강렬한 열기를 뿜어낼 때쯤, 우리는 숲에 진입했다.
“언제쯤 도착할 거 같아요?”
숲의 한복판 도로에서, 리오테르에게 물었다.
“음, 6시간은 더 걸어야 할 거 같다.”
“6시간이나요?”
진짜 돌아버리겠다.
“말이나 마차를 탔다면 1시간 정도의 거리지만. 우리는 걸어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내 표정이 안 좋자, 그녀가 말을 더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나게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거다.”
“그래요…?”
“그래. 내가 전에 던전 공략을 진행했을 때는 자그만치 3일을 걸어가야 했다.”
그건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처음에 나는 리오테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어갔지만, 나중에 가서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여섯 시간이나 떠들 정도로, 내가 활발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가 떨어지기도 했고.’
다행인 점이라면, 걸어가는 길에 산적이나 괴물을 만나지 않았다는 거다. 포레스트 울프를 마주치긴 했으나, 이젠 우스운 녀석들이었다.
“와….”
정확하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비로소 던전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별로네요….”
개고생해서 걸어온 거치고는 던전의 모습은 싱거웠다. 동굴 같은 벽에다가 조잡한 철문 하나가 끝.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진짜 존나 성의 없네.’
던전 찾아오는 사람 생각해서, 좀 웅장하게 만들 수는 없었던 걸까? 던전 제작자들은 배려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마다 다르지만, 마족이 직접 만든 던전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이런 형태다. 던전의 외형을 꾸며봐야, 좋은 점은 없으니까.”
듣고보니맞는 말이긴 했다.
“뭐, 그래도. 내부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테니,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알겠어요.”
“그럼, 무기를 꺼내라.”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석궁을 꺼내 손에 들었다.
“던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절대 긴장을 놓지 마라. 어떤 것이든 의심하고, 어떤 것이든 조심해라. 알겠나?”
리오테르의진지한 말에, 내 몸에도 바짝 긴장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이제부터 실버급의 던전에 들어가는 거였다. 리오테르는 그렇다 쳐도, 나는 브론즈급. 까딱했다가는 변사체로 발견될 것이다.
“알겠어요.”
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하자, 그녀가 만족한 듯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들어간다.”
힘을 줘 밀자. 경첩의 낡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래로 쭉 이어지는 계단. 하지만, 그마저도 어둠에 가려져, 다섯 계단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륵-
곧, 리오테르가 횃불에 불을 붙이며 계단 앞에 섰다.
“가자.”
듬직한 모습. 그녀와 함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얼마나 내려갔을까, 곧 또 다른 문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기서부턴 조심해라.”
“네.”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돌로 만들어진, 기다란 통로가 드러났다. 그리고.
따닥- 따다닥-
뼈로만 이루어진 괴물. 스켈레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전에 만난 건 아무 것도 없는, 정말로 깨끗한 백골이었다면, 이번에는 탁한 회색의 뼈에 얇은 갑옷과 함께 낡은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나설 필요 없다.”
리오테르는 외침과 함께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치잉!
금속음과 함께 둘의 검이 부딪혔다. 리오테르의 힘이 더 강했는지, 스켈레톤 병사가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놈이 무기를 들려는 순간.
콰직-!
리오테르의 검면이 그대로 놈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렸다. 단 일합 만에 싸움이끝난 것이다.
“와… 진짜 엄청 잘 싸우시네요.”
그 단기간 사이에 정말 엄청난 성장을해버렸다.
“검사에게 한 달이란 시간은 일취월장할 수 있는 시간이니, 당연하다.”
“이건 안 챙겨가도 되나요?”
“언데드한테서는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 거의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체력을 생각해야 하니, 모두 놓고 가야 한다.”
“아쉽네요.”
“던전에서 나오는 유물의 가치가 그 모든 것을 상회하니, 그렇게 아쉬워할 거 없다. 그럼, 다시 가지.”
우리는 스켈레톤 병사를 계속해서 상대하며 통로를 나아갔다.
‘내가 딱히 할 게 없네.’
리오테르가 나오는 족족 모두 잡아버리니,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달달하게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캬르르르륵-!
앞에서 무언가 끔찍한 소리가 났다. 횃불을 앞으로 던지자, 살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괴물 두 마리가 길을 막아섰다.
“구울이다.”
“구울!”
스켈레톤과는 달리, 확실하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놈들이었다.
“뒤에서 지원하도록!”
구울이 달려들자, 그녀 역시 함께 지면을 박찼다.
콰앙-!
구울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방패에 부딪혔다. 제법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 단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았다.
석궁을 들어, 구울을 조준했다.
“타올라라.”
화르륵-!
불의 기운이 화살에 담겼다.
“물러 서세요!”
리오테르는 방패를 물고 있는 구울들을 후려치더니, 뒤로 몸을 날렸다.
방아쇠를 당기자, 놈의 머리에 꽂히더니 곧 몸 전체에 불이 옮겨 붙었다. 곧 바로 옆에 있는 놈에게 화살을 쐈다.
화르륵-!
키르아아아악!
살점이 타오르는 냄새와 함께 구울이 마구 날뛰었다. 언데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던데, 구울은 느끼는 것일까?
놈들은 바닥에 구르며 불을 끄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끄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콰앙, 방금 그건…?”
“불의 정령이라도 계약했거든요.”
“두 개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건가?”
“네. 왜요?”
“아니. 인간 중에서 동시에 두 정령과 계약했다는 건, 처음 들어봐서 말이야. 일단, 가도록 하지.”
그녀의 놀란 얼굴을 뒤로하고 우리는 더 깊은 던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