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리오테르 (1)
“리오테르 누나!”
레이나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콰, 콰앙.”
리오테르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곧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부드러운 손이 아닌, 굳은 살이 박힌 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는 가슴팍에서 고개만 든 채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앉도록 하지. 보아 하니, 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아, 네. 누나 몫까지 만들어 올까요?”
“나는 괜찮….”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다.
“……부탁하지.”
“네.”
재료를 좀 더 추가해서 넣고는 음식을 차려 식탁 위에 올렸다.
“맛있게 드세요.”
그녀는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는다는 듯, 밥을 먹어치웠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딱히, 한 일은 없다. 그냥, 매일 연무장에 박혀서 온종일 수련만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말이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아마, 나라면 30분하고 때려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매일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오더군.”
“깨달음…이요?”
“그래. 말해주는 것보단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스릉-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검 바꾸셨네요?”
외관이 아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전에는 거칠면서 좀 뻑뻑한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아주 매끄럽게 뽑혔다.
“깨달음을 얻었으니, 무기도 바꾸는 게 옳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일단 보여주마.”
그녀의 몸에 마력과 비슷한 기운이 생겨나더니, 곧 검신 전체에 은은하게나마 푸른빛이 맺혔다.
“이건….”
“오러다. 마법사들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듯, 검사들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지.”
오러,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보던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이게 있으면, 바위도 물처럼 자를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최상급 익스퍼트 유저가 된다면 모를까. 지금, 내 수준에 그런 묘기는 불가능하다.”
“아….”
역시, 소설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검사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움직일 것이며, 같은 검이어도 오러가 들어가면 절삭력부터가 다르다. 아마, 앞으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겠지.”
“대단하시네요… 저도, 그런 걸 써보고싶은데. 불가능하겠죠….”
“너도 사용할 수 있다.”
“저도요?”
“그래. 엘프들 중에는 오러를 활과 화살에 씌어서 발사하는 놈들도 있다. 검에 비해 들어가는 오러의 양도 많고, 현저히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긴 하나, 불가능은 아니다.”
“마력과 오러는 함께 사용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적어도,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들은 상식은 그러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만, 정령사니까 가능할 거다. 마법사들의 마력과, 정령사의마력은 성질이 다르다고 들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나도 나중에 화살이 바위를 꿰뚫고 그럴까?
‘그러면, 엄청 무서울 거 같긴 하네.’
엄폐물이 소용없는 궁수라니, 생각만 해도 위협적이긴 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오러를 얻고나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수련을 새로이 시작했지. 그렇게, 오러가 몸에 익숙해지고 검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 때쯤, 실버 승급전을 치뤘다.
”승급전 내용은 뭐였어요?“
”트롤을 잡는 거였다.
“트롤!”
전형적인 판타지 괴물이었다.
“다치신 곳은 없어요? 트롤은 엄청 강하다고 들었는데.”
무려, 실버급 괴물이었다. 개체마다 하급에서 최상급으로 나뉘지만, 아마 승급전 퀘스트이니최소 중급이상일 것이다.
“그래 봐야, 괴물일 뿐이다. 오른손에 커다란 통나무를 들고 있어, 고전하긴 했다만. 그래도, 그런 느려터진 놈에게 공격을 허용 할 정도로 느린 몸은 아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는데, 뭔가 엄청 멋있어 보였다. 이게 기사라는 걸까?
“내 이야기는이게 끝이다. 그럼, 이제 콰앙, 너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는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델리카를 다시 만난 것과 그들을 이끌어 호위 퀘스트를 한 것, 그리고 지명 의뢰까지 모두.
“내가 없어서 어떻게 될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 명의 브론즈 모험가로서 열심히 활동했군. 잘했다.”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지명 의뢰는 의외군. 나조차도 받지 못한 건데 말이야.”
“이제, 실버급 모험가니까. 조금은 받게 되지 않을까요?”
“글쎄다. 이제 막 승급한 초짜 실버한테 지명 의뢰를 넣을 머저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받게 되는 건 한참 뒤의 일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역시,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여인이었다.
“아, 이거 돌려드릴게요.”
품을 뒤져, 안에 있는 긴급탈출 스크롤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결국, 사용하지 않았군.”
“네. 딱히, 위험한 상황이 없었거든요.”
“지인인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선배 모험가로서는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이군.”
“어디가요?”
“모험가는 모험을 하며 업을 쌓아 강해진다. 그런데, 위험한 상황이 오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안정적인 일만 했다는 내용이 될 테니….”
“모험가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긴, 이때까지 워낙 위험한 일만 해왔으니, 조금은 널널한 일도 하고 싶을 법하지.”
그건 그랬다. 이렇게 빨리 브론즈 모험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위험한 일만 해왔기 때문이니까.
“그래도, 절대 안주하지 마라. 위험을 마주해라, 그리고 끝없이 성장해라. 알겠나?”
“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다시 위험한 일만 하게 될 거다. 역설적이게도, 모험가는 등급이 높을수록 사망률이 높은 직업이니까. 너는 각오가 되어 있나?”
“당연하죠!”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섹스도 좋지만, 그것만큼이나 모험이 좋았다.
“좋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의뢰를 시작하도록 하지. 쉴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니, 충분히 즐겨둬라.”
리오테르는 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은 잘 먹었다. 그럼, 피곤하니 먼저 올라가보도록 하겠다.”
“네, 푹 쉬세요.”
손을 흔들어주고는 식탁 위에 올려진 식기를 모두 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레이나가 일어나고 직원들까지 모두 출근하자.
“갔다올 게.”
“네, 다녀오세요.”
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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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앙-! 까앙-!
문을 열자, 귀가 얼얼할 정도로 커다란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내부에는 여전히 검은 속옷만 입은 채, 작업하고 있는 실바나의 모습이 보였다.
“실바나!”
이름을 외쳤으나, 그녀는 못 들은 듯 망치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작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까앙-! 까앙-!
리드미컬한 망치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더니, 곧.
깡-!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망치를 내려놓았다. 곧, 완성 된 검을 그대로 기름에다가 넣었다.
치이이익-!
식는 소리와 함께 검날을 밖으로 빼자, 상당히 깔끔한 검이 나왔다.
“후우….”
실바나는 이마에 난 땀을 팔로 훑더니, 의자에 주저앉았다.
“끝났어요?”
“꺅!”
내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어어? 콰앙!”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달려왔다. 그녀는 몸에 안기려다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뭐야? 언제 온 거야?”
“방금 전에 들어왔어요. 집중하고 계시는 거 같아서, 그냥 내버려뒀죠.”
“그래?일단 이리로 와서, 앉아!”
자리에 앉자, 그녀는 차를 한 잔 내왔다. 민트 향이 나는 상쾌한 차였다. 차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니 공방이 꽤 발전해 있었다.
“돌아오면,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러지는 않네요?”
“응. 네가 내가 만든 경갑을 입고 다녀서 그런지, 사람이 조금 찾아오더라고. 그래서, 최근에 좀 바쁘게 살고 있어.”
“잘 됐네요.”
이젠 1인분은 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네가 한동안 안 찾아오길래, 죽었거나, 아니면 모험가 생활을 은퇴한 줄 알았어….”
“다른 공방에 갔다고는 생각 안 하네요?”
“그러면, 네가 나무로 변해서 존재감이 느껴졌을 테니까. 그건 생각 안 했지.”
“아….”
맞다, 그런 맹세를 했었다.
‘마레아에서 다른 공방에 들리려고 했는데, 진짜 나무가 될 뻔했네….’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정말로 네가 나를 버린 줄 알고, 돈도 아끼고 있었거든!”
“그럼, 제가 평소처럼 방문했으면…?”
“아마, 또 쓰러져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도 괘씸한 마음에 손을 뻗어, 커다란 가슴을 잡고 주물렀다.
“헤읏… 읏!”
실바나가 몸을 비비 꼬았다.
“그게 할 소리에요? 예? 제가 무슨 실바나의 돈줄이냐고요.”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읏…미안, 미안해! 그냥 농담이었어!”
커다란 외침에 손을 놓았다.
“으으… 가슴으로 이렇게까지 느끼다니… 진짜 여자로서 수치야, 수치….”
“자업자득이죠, 뭐.”
“그래서, 요즘에 방문하지 않은 이유가 뭐야?”
“호위 퀘스트 때문에 마레아까지 출장을 다녀왔거든요.”
“진짜? 그럼, 바다도 봤겠네?”
“봤죠.”
“진짜로 세계수 아래에 있는 호수보다 더커?”
“제가 그 호수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훨씬 크겠죠.”
바다는 행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진짜? 와, 그럼 엄청 크겠네… 부럽다… 나는 너 없는 동안, 맨날 여기 박혀서 망치만 두드렸는데….”
“이제 막 공방에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면서요, 지금 이 기세를 살려, 돈 벌어야죠.”
“그, 그렇지! 몇 년 동안 외면받다가, 드디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데, 여기서 쉬면 안 되겠지! 근데… 그래도, 그냥 놀고 싶어….”
역시, 글러먹은 엘프였다.
“그래서, 왜 온 거야?”
“아, 이제 슬슬 갑옷을 바꿔야 할거 같아서요. 내일부터, 실버급 모험가랑 같이 의뢰를 하기로 했거든요.”
“쉐엣… 그러면, 엄청 위험한 곳에 가겠네.”
“그건모르지만, 아마 그렇겠죠?”
“예산은 얼마정도인데?”
“2골드까지는 가능할 거 같아요.”
이리저리 받은돈이 많았다. 이전에 벌어둔 돈도 있었고 말이다.
“위아래로 전부 맞출 거지?”
“네. 기왕이면, 글러브까지 맞추고 싶긴 한데… 가능하세요?”
“하면 하지.”
“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불안한 말이었다.
“그 눈빛 뭐야! 이래 보여도, 무려 너보다 훨씬 오래 산 엘프라고, 엘프!”
“아, 예.”
나는 품에서 2골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러면, 어련히 잘 만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전적으로 모두 맡길게요.”
그녀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2골드를 잡았다.
“아, 알겠어! 내가 아주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줄 게! 아마, 만드는 데에는 2주 정도 걸릴 거야.”
“알겠어요. 그럼, 가볼게요.”
“어어, 잘 가!”
문을 닫고, 나오자 온도가 확 바뀌는 게 느껴졌다.
‘공방 안이 덥긴 하구나.’
아마, 나도 불의 정령이 아니었다면 땀이 뻘뻘 났을 것이다.
‘실바나한테도 들렸으니까…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인가.’
뒷골목을 빠져 나와, 광장으로 가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금빛 상회의 건물은 이전보다 더 커진 거 같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준비한 듯한 느낌.
“회장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올라가시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직원이 말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따라갔다.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자, 기사가 보였다.
“들어가시죠.”
그녀는 날 잠시 보더니, 길을 비켜주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집무실의 모습이 보였다.
창문 너머에서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금발과 만나 부서져 반짝이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정말, 오랜만의 루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