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이사벨라 (4)
“델리카.”
밖에서 멍하니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콰앙….”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쪽으로 사람들이다가오고 있어요.”
델리카의 눈이 터질 듯이 커지더니, 곧 좌우로 마구 움직였다. 주변을 훑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황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상황을 설명할 최소한의 시간은 있었다.
“상인이랑 이사벨라 깨워서 상황 설명해주고 주변 경계하고 있어요. 알겠죠? 습격해오면 당황하지 말고. 최대한 상인을 지키면서 버티는 형식으로만 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놓아주자, 바로 텐트 안으로 호다닥 들어갔다.
나는 모닥불 근처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산적인가? 그게 아니면 도적?’
사실, 그게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우리를 습격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고. 죽여야 할 상대였다.
신분이 뭐든, 목적이 뭐든,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상황으로 모두 몰려갈 뿐이었다.
꽈아악-
석궁이 제대로 장전됐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바람을 보냈다.
도적 다섯 명은 한 방향에서 거리를 떨어뜨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신중한 녀석들인지, 거리가 많이 좁혀지진 않았다. 이쪽이 눈치챘다는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잠시만, 이거 기회 아닌가?’
솔직히, 내가 아무리 능력치가 많이 올랐다고 해도 다굴에는 장사 없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다가오고 있다면.
‘암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자세를 바짝 숙여 몸을 은신한 채, 놈들의 뒤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정령의 힘을 빌리자, 상당히 쉽게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맨 뒤에 있는 놈의 머리를 조준했다. 일발에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귀찮아진다.
투웅-!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정령의 힘을 이용해, 주변의 바람을 통제했다. 퍼져 나가야하는 파공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콱-!
하지만, 화살만은 정확하게 날아가 맨 뒤에 서 있던 여자의 뒤통수에 박혔다. 그녀는 단말마조차 뱉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후.”
숨을 내쉬고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진짜로 가능하네.’
정령 궁수들은 바람의 힘을 이용해 소리를 차단해, 어디서 화살이 날아갈지 아예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고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막고 피하는 일은 어려운 일. 특히나, 이런 숲속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궁수 중 일부는 암살자로서 활동한다지.’
그 이유를, 사용해보니 알겠다. 마력 소모가 심하긴 했으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웅-!
“시발, 들켰잖아! 그냥 빨리 쳐!”
그렇게 두 명을 더 처리했을 때쯤, 뚱뚱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를 질렀다.
“가, 이 새끼들아. 빨리 가서 족쳐!”
칼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지만, 단 한 명만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뭐야? 니들 대체 뭐하고 있는….”
콱!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미간을 조준해 화살을 박아넣었다. 뚱뚱한 여자는 검을 든 채로 가만히 서 있더니,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채앵-!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텐트 쪽을 보니, 도적과 델리카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단검으로 용케도 막았네.’
단검을 교차시켜 긴 검을 막은 건, 꽤나 높은 기술을 요구했을 텐데. 대단했다.
“이 썅년아!”
도적이 발로 델리카의 복부를 밀 듯이 차버렸다. 검에 온 힘을 쏟고 있던 그녀가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커헉!”
“넌 뒤졌어!”
도적이 검을 고쳐 잡고 델리카한테 달려드는 순간.
촤악-!
“컥!”
갑자기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곧 바닥에 쓰러졌다.
도적의 등뒤에는 단검 하나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특성을 이용해, 등을 찌른 것이다.
‘대단한데?’
나는 인기척을 내며 텐트를 향해 걸었다. 델리카가 단검을 꼬나들며 몸을 휙 돌렸다.
“저에요. 저.”
하지만, 이내 나라는 걸 깨닫자 무기를 내렸다.
“저, 적들은요?”
“전부 처리했어요.”
내 대답에 델리카가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허억….”
기껏해봐야, 검은 한두 번 주고 받았을 뿐인데. 그녀는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괘, 괜찮아?”
이사벨라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녀는 델리카의 몸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어린 양에게 휴식을.”
그 말과 함께 손에서 빛이 나와, 델리카의 몸에스며들었다. 시퍼랬던 그녀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이게 사제의 힘인가.’
사제가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 봤는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다른 도적들은요?”
델리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전부 처리했어요. 전부 다섯 명이더군요. 아마, 숲에 퍼진 불빛을 보고 처리하러 온 거겠죠. 이런 어둠 속에선, 빛이 엄청나게 멀리 뻗어나가니까요.”
“그럼, 네 명을 네가 처리했다고? 그 짧은 사이에?”
이사벨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 대단한데….”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한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콰앙님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상인이 끼어들더니 말했다.
“아닙니다.”
“기습을 무사히 넘긴 건 다행입니다만,혹시 전리품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마차에 자리만 있다면, 장비를모두 회수해서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리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사벨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도적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장비. 그걸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모험가마다 처리 방식이 다르거든요.”
“어떤 게 있는데?”
“죽은 자의 것은 산 자의 것이니, 전부 챙기는 사람도 있고. 돈만 챙기거나, 아예 두고가는 모험가도 있습니다.”
옆에서 상인이 설명해주었다.
“저게 돈이 돼?”
“네. 장비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다가, 수가 다섯 명이니 아마 최소 30실버 이상은 나올 겁니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거였다.
“그, 그래? 꽤 크네….”
“뭐, 사람을 죽이고서 얻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니죠.”
내 말에 델리카가 몸을 움찔거렸다.
“처, 처리는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먼저 들어가볼게요….”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도망치듯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델리카의 안색은 시퍼랬다.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 충격 받은 거 같네요.”
나는 생각보다 담담했는데. 역시, 단검과 같은 냉병기로 사람을 죽이는 건, 충격이 큰가 보다.
‘사람의 죄책감은 거리감에 비례된다고 하니까.’
돌로 사람을 죽일 때와 검으로 죽일 때의 충격은 비슷하다. 하지만,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활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거리감부터가 틀렸다.
당장, 사람의 피부를 찢고 검을 찔렀을 때와. 그냥 방아쇠나 시위를 당겨죽이는 건 차이가 크니까.
어쩌면, 내가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석궁으로 죽여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위로해주러 가볼게.”
난 텐트로 들어가려는 이사벨라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녀가 짜증이 난 듯 바라봤다.
“위로해서 어쩔 건데요? 매번, 사람을 죽일 때마다 달래줄 겁니까?”
“야, 너는 어떻게 말을….”
“모험가 생활을 하면서 사람과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특히나, 이런 호위 퀘스트의 경우 도적을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냥 두세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추스릴 수 있게요. 그러다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때서야 도와주면 되는 겁니다. 익숙해지고 강해지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추스르지 못하면?”
“그럼, 모험가 생활은 못하는 거죠. 마을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게, 그녀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야!!!”
이사벨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녀의 호통에 상인이 몸을 움찔거렸다.
“숲 한복판이에요, 이사벨라. 들짐승과 괴물을 자극하는짓은 하지 마세요.”
“델리카가 어떤 마음으로 도시에 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임하지 말라고요.”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조금은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네.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남자일 줄이야!”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라는 자신의 텐트로 들어갔다.
상인과 나. 둘만 남은 모닥불 앞. 간간이 불똥 튀기는 소리만이 우리 둘 사이를 채웠다.
그녀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슬며시 입을 열었다.
“마차에는 자리가 있습니다만, 혹시 회수해서 처리하실 생각이시면 부디 저에게 파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넌 시발 눈치도 없냐? 그런 눈빛으로상인을 바라봤다. 그녀도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아니. 싸, 싸운 건 싸운 거고. 그냥 두고 가면 돈이 아깝잖습니까….”
난 모닥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는 시체는 상인님께서 회수해주시죠. 남은 것들의 위치는 저만 아니까. 제가 갔다오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방긋하고 밝았다.
“알겠습니다.”
난 다시 칠흑과 같은 숲으로 들어갔다.
“악역은 익숙하니까….”
[여신 : ㅈㄹ 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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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후끈해진 날의 공기와는 다르게, 마차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델리카는 아직 우울해보였고. 이사벨라는 나를 노려봤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녀는 델리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았다.
‘적어도, 내 말을 신경쓰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파티의 분위기가 그렇든 말든.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따금, 고블린이나 들개가 습격해오긴 했으나, 가까이 오기 전에 내 화살에 죽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고.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을 때쯤.
“저기 보입니다!”
항구 도시, 마레아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길이 험악해, 도착에 하루가 더 소요됐다.
“일단 이거 먼저 받으시죠.”
창고에다가 마차를 넣은 상인이 주머니 세 개를 내게 내밀었다. 잘그락 소리가 나는 걸 보아, 돈이 들어있는 듯했다.
“4일 간 호위를 해주신 것에 대한 보수금입니다. 제일 무거운 게, 콰앙님의 것입니다.”
주머니를 받으니, 제법 묵직했다.
“하루 길어진 것에 대한 보수금 역시 포함 돼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그녀는 품에서 주머니를 두 개 더 내밀었다.
“이쪽은 장비를 처리한 비용이고. 이쪽은 보상금입니다. 콰앙 님이 파티장이실 테니, 알아서 잘 분배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3일 뒤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상인은 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하루 늦어졌으니 일이 촉박할 것이다.
“자, 여기.”
나는 내 주머니를 품에 넣고는, 둘에게 나머지 것들을 내밀었다.
델리카는 떨리는 손으로 받았고. 이사벨라는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확실히, 모험가가 돈을 많이 벌긴 하네.”
둘은 주머니 안에 있는 은화를 모두 꺼내더니,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기쁜 듯했다.
“장비 처리 비용이랑 보상금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콰앙님이 전부 가져주세요.”
“제가요?”
“어. 장비도 전부 네가 잡은 도적들의 것이고. 고블린이나 짐승들을 막아낸 것도 전부 너잖아.”
“델리카 씨도 한 명 잡았잖아요.”
“그러면, 얘랑 같이 얘기해. 나는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염치로받겠어.”
역시, 아직 모험가 생활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는 게 딱티가 났다.
“아니요. 이사벨라 씨도 받으셔야 해요. 애초부터, 받을 자격도 있고요.”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래도 돼?”
“음, 예를 들어. 상인이 저희를 호위로 고용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상인은 우리에게 아무런 보수금도 주지 않아도 되나요?”
“그건… 아니지.”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해서. 저희가 일을 안 한 건 아니에요. 애초부터, 호위는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데려가는 거니까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제도, 다칠 상황을 대비해 데려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제는 도움을 준 것과 다름이 없다는 소리였다. 아예, 나설 여지가 없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최고다.
다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니까.
‘마법사나 다른 모험가가 그랬다면, 직무유기지만.’
사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데.”
“저도요. 고작, 한 명 잡은 거 가지고… 그 이후에 집중도 못해서, 파티에 민폐를 끼쳐버렸잖아요.”
둘다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 그렇다면, 일단 제가 전부 받는 걸로 할게요. 대신, 숙소랑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그 정도면 괜찮죠?”
“그렇다면야, 뭐….”
“저도 괜찮아요.”
둘의 확답을 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제가 근사한 곳으로 준비해볼게요.”
나는 말하면서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분홍빛의 긴 머리에 매혹적인 보랏빛의 눈동자. 사제복으로 애써 가리려고 했지만,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는 어김없이 그 라인을 드러냈다.
아무리 봐도, 사제 같지 않은 몸매였다. 오히려, 서큐버스라고 한다면 믿을 정도의 미모와 외모. 또 웃긴 건, 거친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역시, 여기서 무너뜨리는 게 맞아.’
마차 안에서의 싸늘한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이사벨라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은 이곳. 마레아에서 그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거였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여관에서, 둘은 돈을 아끼기 위해 2인실을 함께 썼다. 덕분에, 수작을 부릴 기회 자체가 없었다.
‘근데, 이번에 숙소를 잡는 건. 내가 되었어.’
게다가, 저녁까지 사기로 했으니. 이리저리 상황을 통제하는 게 비교적, 저쪽보단 간단할 것이다.
3일 안에, 마레이에서 이사벨라를 무너뜨린다. 어떻게?
‘쾌락으로.’
“기대할 게.”
“기대할게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기대하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