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고블린 킹
“허허.”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저 거대한 덩치를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할까.
‘애초부터, 우리 둘이서 잡을 수 있는 놈이긴 한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여신 : 정보, 고블린 킹은 브론즈급 파티원 두 명은 있어야지, 토벌이 가능하다.]
꼭, 이럴 때만 기를 죽이고 그런다.
저 놈을 잡기엔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해서 도망치기엔 여태까지 고블린을 죽인 게 의미가 없어진다.
‘게다가, 옆에서 이렇게 바라보는데 어떻게 도망쳐.’
델리카는 내가 고블린 킹을 죽여줄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난 아이언급 모험가일 뿐인데!
‘머리를 굴려야 해.’
정면 승부는 절대 안 된다. 저 몽둥이를 맞는 순간, 다진 고기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저 거대한덩치를 어떻게 이겨야 할까?
“암살.”
“네?”
“델리카 씨는 암살자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죠?”
“ㄴ, 네….”
“그러면, 저 고블린 킹을 한 번 암살해봅시다.”
“네?”
작전은 이러했다. 내가 화살을 쏴, 주의를 돌린 다음, 그녀가 뒤에서 단검으로 암살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블린 킹이라고 해도, 급소까지 단단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때요. 가능하시겠어요?”
내가 묻자, 그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렇게 먼 거리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서… 될 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해볼게요….”
그녀로서도 이건 도전인 듯했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저쪽으로 가서 화살을 쏠게요. 델리카 씨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등이 보이는 순간. 암살해버려요. 알겠죠?”
델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쪽으로 가서 신호 드릴게요.”
몸을 숙여, 고블린 킹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크아아아아아!
놈은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었다. 슬픔보다는, 다시 부하를 모아야 한다는 귀찮음에서 오는 듯했다.
쾅-!
몽둥이가 벽면을 후려치자, 동굴이 크게 흔들렸다. 지면을 때리자, 흙과 함께 구덩이가 파였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좀 있으면 저 거대한 힘이 나에게 향하게 될 것이다.
‘진짜 존나 도망치고 싶다.’
솔직히, 미션이고 나발이고 도망치고 싶었다. 근데, 델리카를 보면 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나….’
정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이러고 있다니. 참 묘한 일이었다.
쫘아악-
석궁을 최대로 당긴 다음 줄을 걸었다. 그리고는 마력 화살을 장전했다.
“후.”
숨을 내쉬고, 천천히 고블린 킹을 조준했다. 놈과의 거리는 300m남짓. 달려오는 데에는 꽤시간이 걸릴 거다.
‘그 안에 델리카가처리해주길 빌어야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다시 쇠뇌를 잡은 다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퉁-!
방아쇠를 당겼다.
화살이 나무 사이를 스치듯 지나갔다. 고블린 킹의 뒤로 손이 생겨나는 게 보였다. 아마, 놈이 반응하는 순간, 처리하려는 듯했다.
‘제발!’
마력 화살이 깔끔한 궤적을 타고 날아갔다. 델리카의 손이 천천히 목 뒤로 다가갔다.
쐐애액-
키게게겍?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 그걸 들었는지, 고블린 킹이 반응했다. 놈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콱-!
화살이 딱 놈의 미간에 적중했다. 피가 주르륵 나와, 놈의 코와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 뚜둑-
“어?”
몽둥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블린 킹은 앞뒤로 비틀거리더니, 곧.
푹-!
뒤에서 찔러오는 단검의 힘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땅의 울림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어…?”
고블린 킹이,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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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거리에서 고블린 킹의 미간을 정확히 맞추시다니! 역시 콰앙님이세요!”
“허허.”
“저한테 암살을 맡기신 것도, 저격이 실패했을 때의 위험을 최소화 하시기 위해 시키신 거죠? 저격도 암살의 한 종류잖아요!”
“허허.”
“제게 저격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저한테 모든 게 달렸다는 압박감과 집중력을 요구하기 위해서고요, 맞죠?”
“허허.”
델리카가 신나서 말하는데, 난 대답 대신 계속 웃기만 했다.
[여신 : 병신.]
그래,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저격도 암살에 포함되는 걸 까먹고 있었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근데, 원래 당연한 건당연하기에, 그래서 당연하다고 못 느끼는 게 아닐까?
‘어쨌든, 일만 잘 풀렸다면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고블린의 시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마을로 걸어갔다. 고블린에게 얻을 수있는 건 없었다. 모두 쓰레기.
‘해충 같은 놈들이지.’
그나마죽었을 때,들짐승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 썩으면, 비료가 된다는 것. 딱, 그것뿐이었다.
나는 마을로 돌아가, 장로에게 모든 일을 보고했다. 고블린 킹을 잡고, 소굴을 소탕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저, 정말입니까? 소굴을 소탕하는데 성공하셨다고요?”
“예.”
장로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 델리카가 옆에서 증언을 하고 나서야, 그제야믿었다.
소굴 소탕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고. 그 결과.
“잔치다, 잔치!”
“마셔, 마셔!”
또 다시 잔치를 벌이게 됐다.
“허허.”
어제 잔치를 벌였는데, 오늘도 잔치라니. 마을에 돈이 남아도는 걸까? 돈 없어서 브론즈급 의뢰를 아이언급으로 낮춰서 낸 마을이 맞는 걸까?
[여신 : 난 잘 모르겠다~]
“허허.”
나도 진짜 모르겠다. 어쨌든, 나야 보수 받고 보고서 올려서 공적치 얻고, 그리고 특성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타오르는 화톳불,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찐따처럼 구석에 앉아, 혼자서 술을홀짝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긴 했으나, 뭐.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여, 옆에 앉아도 될까요…?”
혼자 앉아,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 델리카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접시와 함께 음식이 담겨있었다.
“아, 네네.”
나는 옆으로 살짝 비켜주자,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이, 이거 드세요….”
“감사합니다.”
접시 위에는 감자와 함께 고기가 얹어져 있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압.”
델리카는 작은 입을 크게 벌려, 감자와 고기를 한입에 넣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햄스터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음식을 모두 삼킨 그녀가 잠시 눈치를 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오늘 하루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죠.”
숲을 가로지르고, 고블린도 암살하고 거기에 고블린 킹까지. 짧은 하루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저, 저한테는 오늘이 굉장히 특별한 날인데, 콰앙 님께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네요….”
“왜요?”
“모험가시잖아요. 오늘 같은 일이 매일매일 있으실 텐데, 별 대수는 아니시겠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겐 특별하게 느껴졌던 순간이, 남에게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라면. 그래서, 그걸 쉽게 잊어버린다면, 아마 나라도 슬플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아니요. 저에게도 오늘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어요.”
“저, 정말요…?”
“네. 여태까지 경험이 많은 듯이 말했지만, 사실 저도 이번이 두 번째 의뢰였거든요.”
그녀의 푸른빛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지, 진짜요?”
“네. 그래서, 오늘 고블린 소굴로 향할 때, 많이 불안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저를 믿어주고 있고. 델리카 씨도 저를 믿어주고 있는데, 정작 저는 아이언급의 초짜 모험가일 뿐이니까요.”
티는 안 냈지만, 실제로 그랬다.
“죄, 죄송해요… 제가 괜히 부담감을 드려서….”
“아니에요. 결국, 델리카 씨가 저를 믿어줬기 때문에, 다시 용기를 얻었고. 덕분에, 이렇게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었다.
만약, 델리카가 없었다면, 나는 고블린 킹을 보자마자 도망쳤을 거다. 고블린 소굴을 소탕했다고 거짓 보고를 한 다음에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뒤의 일은 비극이겠지. 진짜로 전부 델리카 덕분이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저도. 콰앙 님이 없으셨다면, 이렇게 용기를 내진 못했을 거예요….”
“정말요?”
“네….”
“의지가 됐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네요. 어쨌든, 정말.”
나는 델리카를 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
술 때문에 붉어졌던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것이, 화톳불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고, 난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망함 때문이었다.
타닥- 타다닥-
이따금, 들려오는 불똥 튀기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만이적막함을 잠깐 깰 뿐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콰, 콰앙님….”
“네?”
델리카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읍!”
그녀가 내 입에 입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긴 했으나, 곧 부드러운 감촉에 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녀린 손이 내 머리를 잡는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더 먹고 싶다는 듯, 더욱 엉겨 붙는다. 그녀의 포근한 향기가, 스며들 듯 내게 들어온다.
“하….”
숨이 찰 정도로 키스를 하고 나서야, 델리카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혀를 넣고 하는 진한 키스가 아님에도, 우리 둘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이번엔 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저기 죄송해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델리카.”
“네?”
이번엔 내가 못 참겠다. 그녀의 머리를 잡은 다음, 다시 입을 맞췄다.
“츄, 쪼옥, 쪽, 쪽. 응….”
델리카는 놀라는 기색 없이, 내 키스를 받아 주었다. 내가 혀로 이빨을 두드리자, 그녀의 혀가 수줍게 마중을 나왔다.
“으브응… 읍. 쪼옥, 응… 쪼옥, 쮸우, 쪼오옥….”
아까 전에는 수줍은 듯한 키스였다면, 이번엔 서로가 서로를 탐하는, 그런 키스였다. 그리고, 주로 탐하는 쪽은 나였다.
“우움, 쭈웁, 츄웁! 하응, 쭙, 쭈읍. 푸하아…♥”
입술을 떼자, 은색 실이 우리 둘 사이에서 생겨나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내가 이렇게 주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척 부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네헤….”
그녀의 혀는 이미 풀려있었다. 처음 하는데자극이 너무 심한 듯했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등과 다리를 잡은 다음 들어 올렸다.
“내, 내려주세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무거운데요, 뭐.”
“여, 여자가 이렇게 남자한테 안기다니… 진짜 앞으로 시집 못 가….”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한테 오면 되죠.”
“ㄴ, 네?”
그녀의 눈이 사슴처럼 커졌다.
‘귀엽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소음이 희미해질 듯 작아졌다.
끼기긱-
그녀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주자, 침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할게요?”
“그, 그래도. 제가….”
델리카는 자신이 리드하고 싶다는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정조가 역전된 세상이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니요.”
나는 일어나려는 그녀를 잡아 다시 눕혔다. 이번만큼은 내가 주도하고 싶었다.
“이번엔 저한테 맡겨요. 알겠죠?”
그녀는 나를 멍하니 보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럼, 시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