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델리카 눈나
“날이 저물어 가니, 일단 오늘은 여기서 머물러주세요.”
그다지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으나, 최소한의 예의는 있었는지 혼자서 잘 만한 장소를 제공해줬다.
‘남자라서 배려해준 거겠지.’
“필요하신 물건들은 대부분 다 있을 거에요. 없으면,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제가 드릴게요.”
집은 한국에서 살던 원룸 크기였다.
‘옛날 생각나네.’
향수에 빠지려고 할 때, 그녀가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밤에 잔치가 있는데, 참여하실 건가요?”
“잔치요?”
“네. 이렇게 대도시에 갔다 오는 날은 식재료도, 술도 넘쳐 나서 잔치를 벌이거든요.”
술은 좀 그랬다. 여기 와서 딱 두 번 마셨는데, 두 번 다 필름이 끊겼으니까. 게다가, 내일 토벌도 해야 했고.
“그냥 가볍게 참가만 할게요. 외지인인 제가 거기에 끼면 괜히 어색해질 테니까요.”
“어색해지긴요. 아마, 참가하시기만 해도 아주 좋아 죽을 걸요.”
“하하….”
“그러면,꼭 오시는 거에요?”
“네네.”
여자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삐걱-
갑작스러운 무게에 낡은 침대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 피곤해 죽겠네.”
진짜 마차는 두 번 다시는 타기 싫었다.
[여신 : 너 리벨룸으로 돌아갈 때도 마차 타야하는데?]
“어흑, 마이깟!”
[여신 : ㅋㅋㅋㅋㅋ ㅅㄱㅇ]
“여신님, 그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마차를 안 탈 수 있다면 악마한테 영혼까지 팔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마차는 내게 최악이었다.
[여신 : 응, 안 돼~]
“허허.”
쒸불 년. 그럴 줄 알았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잔치에 참여해야겠….’
그렇게 나는 바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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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 기요….”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멤돌았다.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지, 뭔가마음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기요…?”
작은 손이 내 몸을 약하게 흔들었다. 팔에서 나는 은은하면서 포근한 향기.
‘향 좋다….’
본능적으로 팔을 잡아 당겼다.
“꺅–”
작은 비명과 함께 품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향도 더 진해졌다.
“5분만 더 잘게요….”
“아, 아, 저기, 그, 그게, 아, 네….”
작게 대답이 들려오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
처음 보는 여자가 얼굴을 붉힌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입을 계속 열었다가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어? 아니, 그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뇌 정지가 왔다. 진짜, 사고가 제대로 안 돌아갔다.
“그게 깨우러 왔는데, 갑자기 저를 안으셔서….”
“아.”
얼핏, 기억이 났다.
“그래서, 제가잠시 허벅지를 빌려…드리고 있었어요….”
유독, 머리 뒤로 말캉하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했는데, 그게 앞에 있는 여인의 허벅지였던 것이다.
“아, 그, 죄송해요. 제가 원래는 안 이러는데….”
오늘, 유독 피곤해서 그런지 정신줄을 놓은 거 같다.
“아, 아니에요.”
“저기, 그러면 일단 몸 좀 일으켜도 될까요?”
뭔가 연인끼리나 할 법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눈과 눈끼리 마주치는 자세.
얼굴이 워낙 귀여워서 상관은 없었는데, 부담스러웠다.
“아, 죄송해요….”
그녀가 급히 얼굴을 뺐다. 그제야,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니요. 제 탓인데요, 뭐. 그것보다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아. 그게, 언니가 모험가님을 모셔오라고 해서….”
“아, 혹시. 잔치 때문에 오셨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나가서 뭐 먹으면서라도 이야기 나눌까요? 늦게 가면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까.”
“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와.”
어떻게 몸매가 저러지? 허리는 얇은데 골반과 엉덩이는 넓으면서 컸다. 게다가, 허벅지는 어찌나 탄탄해 보이는지. 각선미도 엄청나고 종아리도 예뻤다.
[여신 : 스타킹 입히면, 개 예쁘겠다.]
[여신: ㅇㅈ?]
솔직히, 이번 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상체도 날씬하고 가슴도 적당히 커서, 하체와의 균형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이런 걸 보고 호리병 몸매,순산형 몸매라고 하는 걸까?
“왜 그러세요…?”
그녀가 뒤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얼굴은 완전 귀여운데, 그 아래로 보이는 하체는 이러니, 진짜 미친 듯이 꼴렸다.
“아,그냥 하품 한 거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네….”
나는 이 귀여운 여자와 함께 집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광장에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저기엔 죽어도 끼기 싫네.’
이쪽 세계의 남자는, 길드의접수원을 제외하면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저쪽 세계에서의 여자들처럼 이야기하는 걸까?
‘보면 좀 화가 날지도….’
“언니, 모험가님 데려왔어요….”
“어, 왔어? 모험가님도 오셨어요?”
“네. 이거 귀찮게 깨우러 오게 해서 죄송해요. 오늘 유독 피곤해서, 모르고 잠들어버렸네요.”
“괜찮아요. 저희가 괜히 깨워서 잠을 방해한 게 아닌가 싶네요.”
그건 아니었다.
‘술 조금만 마시고, 다시 누우면 바로 푹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서서이야기하기도 그러니까, 일단앉으시죠.”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그러면, 저는 가볼게요….”
나를 데리고 온 여인이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델리카! 너도 옆에 앉아야지, 어디 가!”
여자의 이름이 델리카인가 보다.
“저, 저는 이런 자리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그냥 집에 가서 잘게요….”
“너, 내일 모험가님이랑 같이 일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친목을 쌓아야지. 그래야지, 서로가 서로를 믿고 등을 맡길 거 아니야.”
“같이 일해요?”
나는 전해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아, 모험가 님이 자는 사이에 저희 마을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요. 아무래도, 모험가님만 혼자 보내기엔 조금 마음에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흠.”
기분이 나쁘긴 했으나, 뭐. 맞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델리카 씨를. 아, 이름 불러도 괜찮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카 씨를 저와 함께 보내겠다는겁니까?”
“네. 앞을 든든하게 책임질 수 있는 전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근접 전투가 가능한 도적이거든요.”
“도적이요.”
“도, 도적이 아니라, 암살자에요. 언니….”
“이 작은 마을에 암살자가 뭐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뭐, 크게 차이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흠.”
전열이 한 명 생긴다는 건 분명히 좋은일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사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니까.
슬쩍, 여신의 눈치를 봤다.
[여신 : 의뢰 자체를 같이 받아서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여신 : 그녀는 마을을 위해서 함께 하려는 거니까.]
그러면 오케이였다. 이제 따질 건, 그녀의 실력.
“근데. 델리카 씨는 실력이 괜찮은 편인가요?”
시골에서만 자라온 그녀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도적이라니?
‘단검이라는 게 보기엔 화려해보여도, 다루기는 많이 힘들 텐데.’
검의 길이가 짧다는 건, 그만큼 더 날렵하고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는 소리였다.그렇지 않으면, 사거리가 긴 상대와는 붙어보지도 못하니까.
그런데, 시골 토박이인 델리카에게, 그런 신체 능력이라는 게 존재할까?
“네. 델리카는 저희 마을에서 신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아이에요. 특히, 속도에 있어선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죠.”
“하긴….”
저런 무지막지한 하체가 있는데, 느릴 리가 없긴 했다.
“게다가. 그 마차 탈 때,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세요?”
“했던 이야기… 아,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다고요?”
“네.”
“그게 혹시 델리카 씨인가요?”
“맞아요. 델리카한테는 특이한 능력이 있거든요. 델리카, 빨리 보여드려 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자신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얼굴이 붉은 걸 보니, 남에게 능력을 보여준다는 게 부끄러운 듯했다.
“……보고 놀라시면 안 돼요?”
“안 놀라요.”
판타지 세계인데. 놀랄 게 뭐가 있겠는가.
델리카는 자신의 양손을 몸 뒤로 숨기더니 말했다.
“사, 사용했어요.”
“네?”
뭐가 바뀐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무언가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누구세….”
뒤를 돌아봤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손 하나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워메, 시벌!”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몸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려는 순간, 무언가가 내 다리와 등을 바쳤다. 아래로 팔을 뻗어 보니, 작고 아담한 손이 만져졌다.
“가, 감사합니다.”
손은 천천히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더니, 다시 사라졌다. 델리카를 보니,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어때요? 깜짝 놀랐죠?”
“네. 와, 진짜. 이건 상상도 못했네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에요?”
“저희도 잘 몰라요. 그냥 하니까 된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초능력이랑 비슷한 걸까?
‘마법도 있는 세상이니까, 초능력이라고 없을 건 없지.’
아니면, 특성일 수도 있겠다. 아마, 나중에 검사를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면 도움 될 거 같아요?”
“음. 대답하기 전에 델리카 씨한테 몇 가지 질문 좀 해도 될까요?”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거 손만 보내실 수 있는 거에요?”
델리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어떤 신체든 간에 마음대로?”
“…네. 대신에 신체의 부피가 크면 클수록 부담이 커져요.”
“그거 신체를 보내는 건 얼마나 멀리까지 가능한가요?”
“시야가 닿는 곳까지는 가능해요… 대신,부피와 같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부담이 커요….”
이리저리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더라도 충분히 쓸모 있는 능력이었다.
‘아까 전에 내몸 받을 때도 그렇고.’
상당히 가벼워 보였다.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하더니, 아마 여자 평균 스탯보다 더 높을 듯했다.
“같이 가도, 괜찮을 거 같네요.”
바닥을 보고 있던 델리카의 고개가 올라오더니, 나를 살며시 쳐다봤다.
‘귀엽네.’
뭔가 눈치를 보는 아기 고양이, 아니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
“지, 진짜요…?”
“네. 이 정도신체에 그 정도 능력이라면, 오히려, 제가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아, 아니에요… 저는 경험이 거의 없어서… 경험이 풍부하신 모험가 님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허허.”
이쪽도 경험은 없는데? 이게 두 번째 의뢰다. 심지어, 첫 번째 의뢰는 약초 채집이었고.
‘이건 말하면 안 되겠지?’
괜히, 사기를 떨어뜨려서 좋을 건 없으니, 조용히 있어야겠다.
“와, 잘 됐다. 델리카! 너 모험가 님한테 꼭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어, 언니!”
“저한테 도움이 되고 싶다 했다고요?”
델리카가 부끄러워했지만, 이건 내가 궁금했다.
“네. 우리 델리카 보면 아시겠지만, 귀엽고 또 몸매도 좋잖아요.”
“그렇죠.”
내 대답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저희 마을에서는 남자한테든 여자한테든 인기가 많은 편이거든요. 근데, 이 계집애가 눈은 또 어찌나 높은지. 전부 거절했단 말이에요.”
‘저쪽 세계에서도 잘 생긴 남자는 오히려 여자들이 달라 붙었으니….’
그거랑 비슷한 듯했다.
“근데, 얘가 모험가 님이 마차에 딱 내리는 거 보면서….”
“언니!”
더 말하려고 하자, 그녀가 손을 빼액 질렀다. 저렇게 큰목소리로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내가 놀랐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델리카는 몸을휙 돌리더니, 광장에서 벗어났다. 떠나기 전,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고. 저거 또 삐졌겠네.”
그녀는 술잔에 남은 것들을 모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원래는 모험가 님이랑 술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긴장도 풀어드릴려고 했는데. 술이 들어가니까, 놀리는 걸 참질 못했네요.”
“괜찮아요.”
“저는 저거 풀어줘러 가야 할 거같은데. 모험가 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광장 주변을 둘러봤다.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 딱히, 저 사이에 끼어도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저도, 그냥 다시 자러가야겠어요.”
“아,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러면, 푹 주무시고. 델리카는 제가 내일 책임지고 보낼게요. 내일, 마을 입구에서 뵈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광장에서 벗어났다.
“허허.”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다시 자러 가야겠다….”
역시, 찐따는 잔치 같은 게 끼지 못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