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종막 (4)
5년이 흘렀다.
시간이라는 건 참 빨리도 가고 금방 금방 사람을 바꿔놓는다.
그렇게나 미웠던 감정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안개 낀 풍경 뿌옇게 흩어지고, 그토록 선명했던 기억들도 이제는 잘 머릿속에 남질 않으니.
황제가 바뀌어도 얼핏 보기에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굶주린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 남을 핍박하는 자들도 여전히 번성했다.
그래도 대륙 곳곳의 전쟁도 완전히 종결되었고, 부조리하게 핍박받던 백성들에게 소통의 창을 열었다고 하니까.
잘하고 있는 거겠지, 뭐.
“여보, 리제랑 리나랑 같이 두부 좀 사와요. 찌개에 넣어야 하니까. 으이구, 굼뱅이처럼 뒹굴거리지만 말고요!”
“아, 10분만 응? 주말이잖아.”
느긋한 주말의 햇살을 즐기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소파에서 또 다시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중국인지, 한국인지, 일본인지 알 수 없는 마구잡이로 섞인 동양식 복장에 귀를 삐쭉거리며 말하는 리리엘.
처음 만났을 때 철부지 아가씨였던 그녀는 이제 아내가 되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지.
이렇게 몹쓸 남자에게 물려서 키스엘 가문의 차기 당주자리도 내려놓은 채 야반도주를 했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그녀가 이런 말을 들으면 길길이 날뛰지만.
베아트레아와 결별한 이후 나는 슈슈와 슈슈의 남동생, 그리고 리리엘과 함께 리리엘의 고향보다 동쪽에 있는 동부 제도(諸島)로 도망쳤다.
섬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이 세계 동양판타지 풍 중립국.
각종 수인종들과 동양인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뛰어난 연금술사였던 리리엘 덕택에 자리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과 1년 만에 수도에서 가장 뛰어난 제약사로 자리 잡은 리리엘은 2년도 되지 않아 수도에 가게하나를 소유한 건물주가 되었다.
기둥서방도 이런 기둥서방이 없지.
“애들아! 너희 아빠 좀 깨워라.”
“아, 제발.”
오도도도 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끼 귀를 한 소년과 소녀가 폴짝폴짝 달려들었다.
리리엘의 유전자가 굉장히 강력한 모양인지 이렇게 하프인 자식을 낳아도 귀여운 토끼귀가 매달려있다.
“아빠! 일어나!”
“에뷰, 에뷰.”
날 흔들어 깨우는 리제. 당차고 씩씩한 우리 아들, 금년 4세.
조그마한 이로 오물오물 날 깨물고 있는 건 문자 그대로 토끼 같은 딸내미 리제와 쌍둥이 누나인 리나이다.
“으허헝..!!”
“꺄아!!”
“아빠가 화낸다!!”
큰 소리를 내며 겁을 주자 삭삭 흩어지는 리나와 리제.
넓은 집안이 온통 시끌벅적한 아이들 웃음소리로 북적거렸다.
“어휴, 왜 애들을 겁주고 그래요.”
“에이, 장난이야 장난. 그치 우리 꼬맹이들?”
“아빠, 아빠! 나 목마 태워줘.”
“내가 먼저야! 내가 누나잖아!”
“리나! 동생한테 드롭킥 날리면 안 돼!”
토인족 특유의 날렵함으로 동생에게 전신 드롭킥을 날리는 리나와 그걸 황급히 말리는 리리엘.
약간씩 세는 발음으로 투닥 거리는 두 꼬맹이들을 한 명씩 어깨에 짊어졌다.
간지러운지 꺄르륵 대며 자지러지는 애기들.
두 명이나 되니 제법 무게가 된다. 이게 가장의 무게라는 건가.
“다녀올게. 여기 뽀뽀.”
“애들 보는데.”
“뭐 어때?”
“엄마가 또 아빠한테 뽀뽀한다!”
국자를 들고 있던 리리엘은 주춤주춤 다가와서 쪽 뽀뽀를 했다.
“오늘 애들 저녁에 아루 매제 집에 맡기기로 했으니까. 빨리 돌아와요.”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리리엘.
결혼한지는 4년 정도나 지났는데 아직도 신혼 같은 모습이다.
“알겠어. 가자! 애들아! 아 맞아, 슈슈는?”
“저…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오더니 황급히 슈슈가 뛰어나왔다.
리리엘과 마찬가지로 날 따라온 슈슈는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두 번째라고 하기에도 뭐한데.
정실이 둘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리리엘의 선처에도, 신분제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박혀있는 슈슈는 나이와 신분을 들먹이며 기어코 두 번째 아내를 자처했다.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두른 슈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머리가 훨씬 길어있고 몸매도 좀 더 여성스러운 곡선을 띠게 되었다.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다 다음 달이 산달인데 그렇게 무리해도 괜찮겠어?”
“아직은 괜찮아요. 언니에게만 일을 맡기기에도 죄송한걸요.”
앞치마를 걷어 올리고 슈슈의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와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녀의 배에 차분히 귀를 댔다.
“하랑아 아빠 다녀올게. 엄마랑 열심히 일하고 있어.”
태명을 부르자 정말 신기하게도 하랑이가 발 구르는 소리가 난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인데도 이렇게나 신기할 줄이야.
가족을 갖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구나 싶다.
“하랑이도 아빠 다녀오라고 인사하나보네요.”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는 슈슈에게도 가벼운 키스를 해준 뒤 이번에야 말로 길을 나섰다.
◈ ◈ ◈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하고,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된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황제가 된 뒤 자신을 적대하는 귀족들에게 철혈의 통치를 펼치며 또 한 번 피의 역사를 써내려간 그녀는 모두의 두려움을 사는 군주가 되었다.
백성을 쥐어 짜내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을 당연시하던 귀족들의 재산은 압수되고 그 작위는 박탈당했다.
죄목이 과도한 영지민의 착취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나 중세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에 행보에도 어느덧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영생을 얻고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얻은 그녀가 자신의 힘을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대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흠모하는 인재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것이다.
그녀의 파격적인 인사는 뜻은 있으나 힘이 없는 젊은 귀족들에게 황금 같은 기회였고, 고여 썩어가던 슐레스비 제국의 거대한 몸뚱이는 서서히 신선한 혈액을 수혈 받아 활기를 띠었다.
중립을 표하던 대륙 남부의 법황국(法皇國)까지도 세력권에 넣는데 성공한 아슌푸틀은 그 시선을 동부 제도로 그 시선을 돌렸다.
오랫동안 총통(總統)에 의해 다스려지던 제도까지 휘하에 넣는다면 동 서 대륙을 비롯한 모든 영토는 그녀의 통치 아래 들어오게 된다.
동부 제도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도는 훨씬 안정적인 통치 체계를 갖고 있었다.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본토에 비하면 이곳은 파라다이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평화롭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손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고 총통과의 만남을 가졌던 아슌푸틀은 예복을 갈아입고 왕관을 벗은 채 홀로 수도의 길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암살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신인 그녀를 위협할만한 암살자는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담벼락 밑으로 그늘진 골목, 눈을 피해 밟으며 아슌푸틀은 조용한 적막을 즐겼다.
◈ ◈ ◈
“오~ 쌍둥이 아빠랑 심부름 왔니?”
““네에~!””
동양풍의 판타지답게 된장, 고추장 등의 한식까지 발달한 이곳에서 휘진은 지구를 향한 향수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이 두부 집 주인장도 두부를 맨 처음 발견한 휘진이 허겁지겁 먹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게 된 뒤로는 가끔 술잔을 같이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아저씨, 두부 두 모 주세요.”
“아저씨는 무슨, 지도 애 아빠면서.”
“저는 머리 안 벗겨졌잖아요.”
“오늘 두부 다 팔렸네…”
매대를 두드리며 부들거리는 아저씨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아이들, 주인장이 휘진에게 몸을 낮춰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색시는 어떻게 얻었나?”
“매일 물어보시면서 무슨 ‘전부터 궁금했는데’에요. 착한 마음과 넓은 아량을 가지고 하루에 착한일 3개씩 하시면 됩니다.”
“염~병.”
“애들 앞에서 험한 말 쓰시면 안 되죠.”
“어이쿠, 미안하네. 이건 비지인데 조금 나눠줄테니 봐주게.”
“술안주로 좋겠는데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엄살을 떨며 이미 주려고 준비했던 비지를 꺼내드는 주인장.
거기에 반가운 제안까지 해온다.
“우리 집에 매실주가 아주 잘 숙성됐으니까 내일 저녁이나 한번 들르라고.”
“네, 저도 음식하나 준비해 갈게요.”
“슈슈 아가씨의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가?”
“안사람이 요리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죠.”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끝낸 휘진은 리제와 리나를 다시 들춰 엎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귀갓길에 많은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진 씨! 오늘 부인이 좋아하는 파란 수국 들어왔는데 안 사가?”
“아, 옙. 사야죠.”
일단은 꽃집 아주머니.
“예쁜 원단도 들어왔어요. 부인들 모시고 한 번 오세요~”
“음, 오늘은 바쁘고. 모레 쯤 들를게요.”
옷가게 아가씨도.
“쌍둥이들! 꿀떡 하나씩 안 먹으련? 아빠한테 졸라봐.”
“아빠! 나 저거 사줘!”
“난 두 개 사줘!”
“애들 충치 생긴다니까. 유혹 좀 하지 마소.”
떡집 청년까지.
결혼과 정착 이후 영문 모를 인싸력을 발휘해 애처가이자 마을 인기스타로 자리 잡은 휘진은 다방에서 걸려오는 말에 일일이 답했다.
꿀떡을 못 먹게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는 쌍둥이가 목을 마구잡이로 흔들긴 했지만.
그리고 골목 어귀에 들어섰을 때 휘진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춰 섰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그려놓은 듯이 골목에 멈춰선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삼킨다.
“아빠?”
목에 매달리다시피 안겨있던 리제가 고개를 쏙 내밀어 우두커니 멈춰선 휘진에게 의문을 표했다.
한 때 가장 사랑했었던 사람.
그리고 가장 미워했었던 사람.
세월이란 참 신기해서 영원할 것 같았던 감정들조차 그럴듯한 추억으로 포장해준다.
이따금 상자를 열어 확인하는 어린 시절의 보물상자처럼.
“어이쿠, 우리 아들. 그렇게 아빠 목 조르면 아빠가 죽어버려요.”
“괜찮아! 죽이면 엄마가 약으로 살려 줄 거야!”
“에고, 내 새끼들 귀엽다 귀여워.”
품안을 파고드는 리제와 리나에게 뺨을 비빈 휘진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제각기 다른 감정을 머금은 채 스쳐지나간 두 사람.
휘진은 아이들의 장난을 받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예전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그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골목을 바라보던 아슌푸틀은 자신의 목에 건 금빛의 로켓 펜던트를 끌렀다.
경첩으로 개폐할 수 있는 펜던트의 내부에는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진 조그마한 꽃 한 송이가 담겨 있었다.
베로니카에 들렀을 때 그가 귀에 꽂아 주었던 꽃 한 송이를 책 사이에 껴 말려 놓은 것이었다.
아슌푸틀은 꽃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 인지 그것을 돌바닥에 내려놓았다.
“작별이구나…”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이다.
모두 버린다.
그와 함께하며 얻었던 마음, 추억, 기억….
그리고 사랑.
잠시 붙잡으려 해도 그것들은 한 줄기 꿈처럼 멋진 오후 햇살에 녹아드는 붉음이 되었다.
“미안하네…”
그녀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간다.
일말의 후회도, 미련도 여분의 마음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걸 털어버린 그녀에게는,
구할 수 없는 이상에 절망한 구도자의 모습도,
사랑하고 사랑했던 소녀의 모습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뒤를 돌아 꿋꿋이 걸어가는 아슌푸틀의 입가에는 겨울바람이 조그마한 미소를 수놓았다.
◈ ◈ ◈
화목한 저녁시간.
목제 테이블에 둥글게 둘러앉은 가족들은 일제히 젓가락을 들었다.
“우와, 반찬 엄청 많아. 잘 먹겠습니다”
“우왓, 뭐야 이거.”
슈슈와 리리엘이 하나씩 나르다보니 그야말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식탁 위에는 온갖 요리가 다 있었다.
장어구이에 곁들여진 생강 절임에, 부추 전, 두부 김치, 흑염소 탕 거기에 복분자로 만든 술까지.
90대 노인도 발딱 발딱 서게 만들 정도의 상차림은 슈슈와 리리엘의 합작품이었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일하셔야 하잖아요.”
입가를 가리며 부끄러운 듯이 웃는 슈슈.
이런 능글능글한 개그도 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배가 터질 만큼 풍족한 식사이후.
해질 무렵이 되자 건장한 성인이 된 아루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언덕너머로지는 석양이 보이는 창가에서 식후로 가벼운 커피를 마시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렸다.
이세계에 넘어와 시간정지 능력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분에 넘치는 능력을 얻어 온갖 몹쓸 짓을 하고 다니며 방탕하게 살았다.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에게 속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슈슈와 리리엘, 이 두 사람에게는 남은 생을 바쳐 봉사할 생각이다.
지구에서는 있을 수 없었을 사치를 부리고 무려 작위까지 얻으며 역사의 바로 지척에서 거대한 흐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
다시 그녀의 옆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으리라.
오늘 그녀를 다시 마주한 뒤.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미련을 씁쓸한 커피 한 모금으로 씻어낸 휘진은 아슌푸틀을 용서했다.
아니, 이미 용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리 와요~”
“빨리 오세요. 다 씻었어요.”
안방에서 리리엘과 슈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우같은 아내들은 제각기 꽃단장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까부터 뭔가 둘이서 사부작대던데 마음을 먹어도 단단히 먹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야한 란제리라던가 말이지.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손에 얻었다한들 모두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 정지 능력을 뺀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인 나지만.
이 작은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일상물의 주인공이라면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을까?
“갑니다, 가요.”
천둥벌거숭이 같던 예전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전혀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역시 섹스는 개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