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종막 (3)
때 아닌 인기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몸서리치도록 괴로운 악몽 때문이었을까.
아슌푸틀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옆에 휘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뒷모습이 침대 바로 앞에 있는 집무용 책상에 있다는 것을 본 아슌푸틀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휘진…”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휘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구리와 등 사이로 자신이 써내려갔던 검은 일기가 보인다.
그녀가 저질렀던 죄악을 결코 잊지 않고 평생을 속죄하기 위해 기록해 두었던 치부(恥部)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에 의해 낱낱이 들여다보여지고 있다.
서늘한 달빛아래서 마주친 휘진의 두 눈은 울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감키며 끅끅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간신히 아슌푸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 순간 아슌푸틀은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전부 보았다.
아슌푸틀은 알 수 있었다.
“누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이런 헛짓거리를 한 모양이야. 내가 이딴 걸 믿을 리가 없는데. 하하하.”
별안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휘진은 책을 힘껏 찻장에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며 나뒹구는 큰 소리에 아슌푸틀의 두 어깨가 흠칫 떨린다.
휘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아슌푸틀에게 다가왔다.
“네가 아리스를 죽였을 리가 없잖아. 날 이용하려고 접근해서 죽이려 들었을 리가 없잖아.”
“….”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휘진에게 아슌푸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잠시간의 틈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휘진이 소리친다.
“대답해!”
“…..”
“네 물건이 아니지? 루블 왕국 잔존 세력의 소행이잖아? 빨리 대답하라고.”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아슌푸틀은 까마득한 절망을 느꼈다.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는 평생의 비밀로 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단 한번 자기 자신을 위한 거짓말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그를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그가 수명을 다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죽을 때까지, 줄곧 옆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며…
그것이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이 살면서 처음으로 갖게 된 이기심.
“내가 쓴 것이 맞네.”
조용히 시인하는 아슌푸틀과 그보다 고요한 침묵으로 화답하는 휘진.
“정말 미안하네.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
“닥쳐!”
“한 번만…”
“나한테 사과하지 마.”
매달리려는 아슌푸틀의 가슴을 거칠게 밀쳐 자신에게 떨어뜨린 휘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찾아 꺼냈다.
“왜 그랬어? 왜 그래야 했어? 대답해봐.”
“흘려야할 피를 줄이기 위해서였네.”
이제껏 본적 없는 간절함으로 필사적으로 자신을 항변하려드는 아슌푸틀의 모습에 휘진은 불쑥 살의를 느꼈다.
흘려야할 피?
아리스가 죽어간 것도,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자신을 사지로 내몬 것도 고작 그것들을 위해서?
“이번 전쟁으로만 1452명의 전사자가 나왔네. 완벽한 타이밍에 신중을 기한 기책으로도 이만한 출혈이네. 만약 토프키센이 좀 더 제대로 된 방비를 하고 정면에서 맞서야 했다면 수 배, 수십 배의 전사자가 나왔을 것이야.”
휘진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자신간의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 격차가 이정도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부하인 아리스를 죽게 만들다니.
“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어떻게…”
“아리스 역시 이에 동의했네.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수백 배의 인민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고.”
“아리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어갔어. 이제 와서 거짓말하지 마.”
“뭐?!”
휘진이 보았던 아리스의 최후는, 영문도 모른 채 죽음에 던져져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내세웠던 각오와 예견되었던 미래가 토프키센에 의해 모조리 지워졌기 때문이지만, 휘진도 아슌푸틀도 그것을 알 도리는 없었다.
당황해 되묻는 아슌푸틀의 얼굴에서 가증스러움을 느낀 휘진.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일을 벌이고도 나한테 용서 받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내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지 않나…”
부서질 듯이 몸을 떠는 아슌푸틀의 뺨에서 똑똑 투명한 눈물이 떨어진다.
할 말을 잃고 담배를 구겨버린 휘진은 의자에 걸려있던 양복을 걸쳤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휘진의 반응에 다급하게 아슌푸틀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놔!”
손등으로 얼굴을 두드려 맞은 그녀의 뺨이 풀썩 꺾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꽉 잡은 휘진을 놓지 않았다.
언제나 즐거운 얘기를 속삭였던 물기어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얼굴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가냘픈 몸짓으로 아슌푸틀은 그저 매달렸다.
“놓으라고.”
“제발…제발…”
버려지는 아이처럼 필사적으로 휘진을 붙잡는 아슌푸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다.
그녀의 그런 얼굴에서 휘진은 문득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베로니카의 타는 듯이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단단히 손을 마주잡고 걸었던 그 때를.
꽃다발에서 추려낸 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은 채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던 그녀의 얼굴이 겹친다.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네.. 함께하고 싶어. 내 곁에만 남아주게, 나를 모욕하고, 멸시하고, 증오해도 상관없으니까.”
“놔.”
“혼자 남겨두지 말아주게나…”
마지막에는 울음 때문에 엉망이 된 목소리로 애원하는 아슌푸틀.
옷의 소매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배신감, 후회, 분노와 증오, 아직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찰랑이고 있는 체 증발하지 못한 애정까지.
온갖 감정의 혼합물들이 꾸역꾸역 가슴을 밀고 들어온다.
휘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목을 손에 쥐었다.
온힘을 짜내어 목을 조르자 아슌푸틀은 반항하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그의 손을 감쌌다.
“그대가… 이것으로 좋다면.. 죽이게…날 죽여주게.”
가쁜 숨 속에서 입을 뻐끔거리며 말하는 아슌푸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 질 때쯤.
휘진은 정신을 차리고 아슌푸틀을 다시 밀쳤다.
“콜록! 콜록!”
“그렇게 옆에 둔 뒤에, 아리스처럼 죽게 하려고?”
비릿한 헛웃음과 함께 돌아온 그의 목소리에 흐느끼던 아슌푸틀의 몸이 흠칫 굳었다.
너무나도 잔혹하게 내던져진 자신의 업보는, 북해의 바람보다 날카롭게 심장을 저몄다.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게 변한 아슌푸틀을 휘진은 툭 떼어냈다.
“나는 이제 널 믿지 못하겠어. 네 정의도 이해할 수가 없어. 아리스는 네가 죽인거야. 이게 가장 용서가 안 돼.”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했던 배신감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생산적인 활동이란 거의하지도 않는 폐기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아슌푸틀이 눈물로 애원하며 솔직히 말해주었더라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희생을 고민해 볼 법도 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다르다.
그녀는 누구보다 올곧고, 정의로웠으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그 지경에 몰아넣은 베아트레아를 걱정했다.
그렇게 죽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동안 고마웠어. 진심으로 좋아하기도 했었고 뭐, 중요한 이야긴 아니네. 잘 지내라.”
“안…”
허공을 더듬는 아슌푸틀의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휘진은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 ◈ ◈
슈펜하우져에 자그마한 소동이 일었다.
휘진을 비롯해 그의 전담메이드인 슈슈와 그녀의 남동생, 그리고 손님으로 머물던 리리엘이 밤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수색대를 파견해 그들의 행방을 찾으려던 와중 타타라의 전언에 의해 이 사건은 조용히 종결되었다.
아슌푸틀은 루블 왕국건의 일들이 대체로 해결된 뒤에도 한참이나 북해에서 머물렀다.
조용한 유리 정원에 홀로 앉아, 와인을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있었고.
그녀가 제국의 중앙에 있는 동안 향수병에 시달려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는 성내의 사람들은 행여 그녀가 머무는 동안 불편이 있을까, 정원 관리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오늘도 아슌푸틀은 쓸쓸히 유리정원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별을 바라보았다.
문득 한 사람이 다가오자 그녀는 술잔을 내렸다.
“그대도 가는 겐가?”
“응. 약속은 약속이니까.”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어 겨울이 된 슈펜하우져의 유리정원 밖에는 소복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정원의 유리문이 열리며 들어온 차가운 바람에도 아슌푸틀은 몸 하나 움츠리지 않았다.
이젠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 조차 않는다.
그녀가 아신으로서 집행하는 힘은 그 대가로 그녀의 감각을 빼앗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가 이젠 어엿한 여황제에 아신이라니 나도 꽤나 감개무량한 걸?”
“후후, 지독한 말이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아슌푸틀은 와인을 따라 타타라에게 건넸다.
“어디로 갈 셈인가?”
“발걸음 닿는 대로 가는 거지.”
황제가 된 아슌푸틀은 타타라에게 제국 중앙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예상대로 타타라는 거절했다.
그녀가 한 곳에 10년 이상 머무른 것은 역사적으로도 손꼽았으니 충분히 오래 제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루지 못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제는 모두가 내 옆을 떠나가는 군.”
자신의 계획으로 아리스와 바티스텡을 잃었고 휘진역시 그 모습에 질려 떠나갔다.
“후회해?”
“한탄스럽지. 그러나 몇 번의 기회가 나에게 다시 온 다 한들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런 그녀이기에 타타라 역시 마음을 놓고 전적으로 그녀를 서포터한 것이다.
그녀라면 혁명가들이 혁명을 성공한 뒤에 타락하는 뻔한 클리셰에서 벗어나리라 믿었으니까.
“가끔 연락할게.”
“휘진은… 잘 지내는가?”
휘진과 리리엘, 그리고 슈슈의 야반도주를 도운 것이 타타라라는 것을 아슌푸틀은 알고 있었다.
지금껏 염치가 없어 한 마디도 묻지 못했던 그에 관한 소식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타타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럼 다행이로군.”
더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슌푸틀은 타타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고생 많았네.”
“이 정도야 제법 즐거운 유희였지.”
고뇌하고 갈등하는 그녀의 모습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타타라 역시 아슌푸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영겁이 그대를 집어 삼키지 않기를.”
“그대다운 작별 인사로군.”
짧은 고별과 함께 타타라는 떠나갔다.
또 다시 혼자 유리 정원에 남겨진 아슌푸틀은 꽃 같은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한 검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침묵 속에 쌓여가며 빛나는 눈송이를 눈으로 쫓던 아슌푸틀은 조그마한 눈물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