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북해로 (4)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슈슈와 뜨거운 아침을 보낸 뒤.
극심한 피로로 잠에 빠진 슈슈를 내버려둔 휘진은 손수 차를 가지러가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매일같이 자신에게 차를 타주었던 슈슈인 만큼 오늘 하루 정도는 그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이도저도 싫어져 방에 틀어박혀 있던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어이없어질 정도로 가벼운 심경 변화였다.
뭐, 그 정도로 슈슈의 이벤트가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
방문을 열자 타타라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오늘의 복장은 타타라 특유의 메이드 복.
사실 메이드 복이라기엔 과도하게 소재가 좋고 재봉선도 깔끔하다.
“으아, 깜짝이야. 거기서 뭐해?”
“뭐하긴. 두 환자의 컨디션을 밖에서 체크 중이었지.”
“두 환자? 난 멀쩡한데?”
“아무리 피닉스의 힘으로 재생해놨다지만 당신 다리가 부서졌던 거야. 향후에도 제대로 관리 해줘야 하는데. 당신이 들여보내주질 않잖아. 너무해.”
첫 만남 때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로 변한 타타라는 최근 들어 원래의 모습을 다시 찾았다.
나름대로 고민하던 것에 대해 문제가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퇴폐적인 표정을 지으며 담배 피는 타타라보다는 말끝마다 느낌표가 붙으며 통통 튀는 타타라의 편이 더 귀엽고 보기 좋다.
손목을 잡고 마력을 흘려 넣은 타타라는 휘진의 몸을 대충 점검하고는 손을 놨다.
“저 아이한테 잘해줘. 처음 일어났을 땐 제 손으로 밥도 못 넘기던 애가 당신이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어코 삼일 만에 체력을 회복했다니까.”
“슈슈 착하지. 못돼먹은 주인님이 아까울 정도로.”
“그럼~ 매일 아랫도리 휘두를 생각에 정신 팔린 남자에겐 아깝지.”
타타라에 의해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듣게 된 휘진은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 보니 타타라와 피닉스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다.
둘 다 목숨을 빚진 은인인데도 말이다.
“타타라 고마워. 역시 내 혼신을 담은 무릎 꿇기가 네 마음을 움직였구나.”
새삼 진지하게 감사를 표하자니 겸연쩍어 살짝 오버하며 말했다.
이런 건 나쁜 습관인데 부끄러운 걸 어떻게 하라고.
“뭐래~ 리리엘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안 갔을 거야.”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그래도 친구라고 했으면서.”
“친구 먹으려면 나이나 더 먹고 오셔.”
오랜만에 주고받는 실없는 농담에 마음이 놓인다.
참고로 타타라를 나이로 놀리면 굉장히 험한 꼴을 보게 되니 저런 농담은 그냥 듣고 넘기는 것이 속편하다.
차를 가지러 가는 김에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
“기왕이 머물게 된 김에 조금만 더 있다 가려고. 어차피 리리엘에게 가르쳐 줄 것도 좀 남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을 매만지며 별 생각 없이 답하는 타타라.
단호히 떠나겠다고 선언할 때의 말투로 봐서는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말이다.
원래 변덕이 심한 건 알았지만 그 변덕 덕분에 목숨을 건진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해줌직하다.
“아슌푸틀은 만나봤어?”
“아니, 그 얘기는 하지 말자.”
타타라의 질문에 급체라도 한 듯 속이 불편해졌다.
아슌푸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예전에 자신이었더라면 뻔질나게 집무실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일전 타타라와의 대화를 통해 아슌푸틀이 아리스를 방치한 것을 알고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아슌푸틀이 아리스를 우선시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죽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아슌푸틀이 어떤 연유로 아리스를 구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히 그녀를 믿고 신뢰하던 마음에 커다란 금이 생겼다는 것을 휘진은 느낄 수 있었다.
연인들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그녀를 똑같은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리리엘은?”
“아마 서고에서 공부 중일거야. 좀 만나주지 그랬어. 그렇게나 노심초사하던데.”
회복 직후 깨어난 휘진이 방에 틀어박히기 전, 리리엘이 한 번 찾아왔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던 탓에 그녀에게 퇴실을 부탁했고 리리엘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갔었다.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없고 마냥 혼자 있고 싶어 그녀를 홀대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안됐다.
“아, 맞다. 어떻게 사과해야 되지?”
사과라는 말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타타라.
그녀는 리리엘과 휘진의 관계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철면피에 뻔뻔하고 특히 리리엘에게는 철저히 막 대하는 휘진이 선뜻 입에 올린 그 말은 타타라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왜, 뭐. 나도 사과 잘하는 사람이야.”
“친구의 성장을 보는 것 뿌듯한 일이지. 착해, 착해~”
머리를 쓰다듬는 타타라 커다란 가슴이 출렁거리면서 흔들린다.
큰 가슴 너무 좋아. 안에서 살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도 모르겠니? 리리엘도 네 심정을 이해해서 자리를 비켜준 거야. 네가 할 건 사과가 아니라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다는 거짓말이지.”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꽤 기분이 나아졌어. 어차피 내가 이렇게 침울하게 있는다고 바뀌는 것도 없잖아? 아리스도 나한테 베아트레아를 잘 부탁한다고 했었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걱정을 하지 않았다.
홀로 남겨져 슬퍼할 사람을 위해 억지로 만든 미소로 웃었고, 홀로 남겨질 아슌푸틀을 위해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당부를 했다.
그 탓에 마지막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요령 없고, 융통성도 없지만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자신은 뒷전이었다.
“….”
골똘히 생각에 잠긴 휘진의 옆얼굴을 보며 타타라는 침묵했다.
모든 진실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상냥한 거짓이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일도 있다.
“타타라 술이나 마실래?”
“그럴래? 무사 귀환 기념으로 내가 쏠게.”
휘진의 가벼운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 타타라는 연구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여기에 오기 전에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응응, 완전 그래 보여.”
“아 좀, 걍 들어봐.”
타타라의 픽은 화사한 포도의 풍미와 중후한 바디감을 자랑하는 EXTRA 클래스의 브랜디였다.
온 더 락으로 희석해서 마심에도 혀끝을 알싸하게 감싸는 캐러멜의 향이 일품이다.
정신없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타타라도 휘진도 거하게 취해 소파에 눕듯이 기대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휘진은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진심을 털어놓았다.
술에 취해 텐션이 높아지자 깝죽거리는 타타라에게 꿀밤을 먹인 휘진과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경청을 시작한 타타라.
“그래서 시간정지 능력을 얻었을 때 엄청 기뻤지. 솔직히 사기 같은 능력이잖아. 원하면 여자도 맘대로 대하고. 무력한 현대인이 여기 와서는 근위대장 완장도 차니까 신났어. 나는 딱히 권력욕도 없고 예쁜 여자랑 섹스만 할 수 있으면 오케이였으니까 진짜 허송세월하면서 살았지.”
술잔을 홀짝이는 타타라는 휘진과 제법 가까이 달라붙어 술김에 더워진 가운을 벗었다.
“막상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보잘 것 없는 것들뿐이더라고. 무엇하나 나 스스로 해낸 게 없어 그냥 반칙 같은 능력에 기대서 할 수 있는 최소한만 보였을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능력을 얻었다 한들.
다른 모든 면에서는 여전히 일반인에 불과한 휘진에게는 선택지가 너무나도 좁다.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차이라는 것이 이토록 아득한 것일 줄은 몰랐다.
“구도자, 그걸 나아가서 아신이 되어버린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처량해져. 까놓고 말해서 아신 두 명이랑 동침을 한 남자는 이 세상에 너 밖에 없을 걸? 그 정도면 훌륭한 업적 아니야?”
“아니 그런 거 말고. 막, 정치, 외교, 음모. 이런 거 있잖아.”
성희롱하는 술 취한 부장님처럼 실실거리던 타타라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휘진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그가 고민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타타라가 진정으로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존재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명석한 두뇌로 언제나 선두를 달리며 고스란히 아신이 된 구도자였기에.
최근에 들어 자신의 한심함에 대해 개탄하게 된 휘진은 나름 진지하게 상담하던 내용이 농담거리로 놀림 당하자 살짝 기분이 상했다.
“네가 아슌푸틀에 대해서 고민하는 거라면 한 가지는 확언해줄 수 있어.”
“뭔데?”
“그녀는 정의로워. 하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의가 아니야. 신이 내리는 지엄한 심판은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땐 더 없는 가혹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 아슌푸틀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균형’이야.”
보통의 인간은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손쉽게 타협하고 만다.
제 아무리 올곧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족의 목숨과 무고한 사람 100명의 목숨이 저울에 놓였다면 고뇌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중한 가족의 목숨과 맞바꿔 무고한 다수를 포기하겠지.
이것이 감정에 휘둘리고 관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아슌푸틀은 다르다.
그녀는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도 스스로 내린 준엄한 철칙에 따라 눈물을 머금으며 수하와 연인의 목숨마저 제물로 바친다.
타인을 그저 도구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것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내뱉는 타타라의 말을 휘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슌푸틀이 아리스를 방치한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일까?
타타라가 자신더러 루블 왕국에 가지 말고 도망치라 말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에게 캐묻는다 해도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아슌푸틀과 계약을 끝낸 그녀이니까.
거기에 계획과는 다르게 너무 취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왜이래.”
술에 취한 탓인지 타타라는 매혹적인 연두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휘진에게 들러붙었다.
육감적인 몸매로 시행하는 육탄공세에 행복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된 휘진이었지만 일단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싫은 척을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 몸을 섞은 지도 꽤 됐잖아?”
“이제는 나랑 안한다며.”
“싫음 말고.”
“누가 싫데?”
아나스타샤가 가슴이 장점인 육덕캐릭터라면, 타타라는 골반이 장점인 육덕캐릭터이다.
그녀의 훌륭한 애널 조임과 파이즈리를 기억하고 있는 휘진은 단숨에 마음이 동해 타타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이러니까 이 좋은 능력을 갖고도 뻘짓거리를 많이 했지 병신아’ 라고 말하는 천사와 ‘뭐 어때 섹스가 제일 좋은 거지 걍 넣어’ 이라며 속삭이는 악마의 싸움은 너무나도 손쉽게 악마의 승리로 끝났다.
옆구리사이로 잡히는 살결은 여전히 충분히 부드러우면서도 손을 튕기는 탄력을 지니고 있다.
“원래 여자를 잊는 데는 다른 여자가 최고라잖아?”
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타타라는 윗옷을 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