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북해로(2)
좁아터진 지하통로.
유사시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상통로는 100년 넘게 사용도 관리도 되지 않아서인지 낡은 거미줄투성이였다.
바닥에는 썩은 빗물이 흐르고 시궁쥐들이 눈을 빛내며 인기척에 흩어진다.
토프키센은 몸을 반쯤 숙인 채 산책하듯이 그 통로를 누볐다.
왕국의 남단에는 아직도 여러 척의 공군함들이 있다.
목숨만 건진다면 베아트레아에게 다시 한 번 역공을 가하는 것도 요원한 일은 아니리라.
왕좌에 자신의 모습으로 위장한 신하와 엘프들의 시체로 만들어놓았던 함정은 아쉽게도 불발로 그쳤다.
지금은 토렌스와 합류해 후일을 도모해야 할 때.
통로의 끝에 다다라 기관 장치를 돌리자 거대한 바위로 위장되어있던 출입구가 천천히 열렸다.
“이런…”
그런 그의 앞에 서있는 것은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이제는 슐레스비의 여황이 되어버린 최고의 숙적.
솔직히 토프키센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베아트레아가 이토록 빠르게 내정을 진정시키고 전쟁을 벌이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도약한 함대에 대공 포탑이 저리 쉽게 제압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그녀가 이토록 많은 함대를 단숨에 옮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아신의 삼계 마법이라 하더라도 저 정도 규모의 일이 되면 응당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다.
가령 토렌스가 던지는 뇌정의 창이 차차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갉아먹게 되고, 피닉스의 부활이 80년 치의 기억을 앗아가는 것처럼.
“설마 토렌스까지 당할 줄이야. 낭패로군.”
두 번째로 마주한 두 사람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이제는 아슌푸틀의 손끝이 조금만 움직여도 목숨이 위태롭게 된 토프키센은 천천히 왜곡을 펼치려했다.
그러나,
“발버둥 친들 무의미하네.”
아슌푸틀에게서 퍼져 나온 마력의 물결에 토프키센은 자신의 왜곡이 덧없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모습을 아리스로 바꾸거나, 아슌푸틀의 인지능력을 저하시켜 모습을 숨기려 했던 토프키센은 발목까지 잠긴 마력의 파동에 헛웃음을 지었다.
“순 사기잖아.”
그녀의 물결에 젖어든 공간은 이미 그녀의 통제 하에 있는 아공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섭리마저 지배하는 기계장치의 신.
그 어떤 능력도 세계에서 도려내진 이 공간에서는 그 힘을 잃었다.
도대체 이 힘은 무엇을 대가로 얻은 것일까?
급박한 상황에도 호기심을 생긴 토프키센은 아슌푸틀에게 눈길을 던졌다.
“설마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욕심내지 않고 그때 숨통을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냉엄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이미 망설임이 없었다.
마음을 굳힌 것이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을 내려 보는 아슌푸틀의 시선에 토프키센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가슴을 맴도는 것을 깨달았다.
“네 부하였던 아가씨 있지? 쉬펜 아리스.”
냉혹한 가면을 쓰고 그의 최후를 준비하던 아슌푸틀의 얼굴에 금이 간다.
저런 반응을 원했다.
적대할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한 굴욕보다는 분노의 시선을 받는 것.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상대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참 귀여운 여자여서 많이 예뻐해 줬지. 말끔한 얼굴을 하고는 엄청나게 밝히더라고.”
“아리스를 어떻게 했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방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듣게 되더라도 남는 것은 죄책감뿐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 묻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약에 푹 절인 다음에 두 구멍을 하루 종일 쑤셔줬어. 종국에는 네 이름을 부르짖으며 고통스러워하더라고. 불쌍해서 어쩌나? 못난 주군을 둔 부하는 고생하는 법이지.”
물론 거짓도 섞여 있는 말이지만 어차피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그녀의 동요를 이끌어 내는 것만으로 소소한 승리감에 젖으니까.
아슌푸틀의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왕이 돼서 가장 기뻤던 일은 그녀를 망가뜨릴 수 있었던 거였어. 특별한 선물 아주 감사히 받아들이지. 자, 뭐해? 이제 죽이면 되잖아?”
양팔을 벌려 빈정대는 토프키센에도 아슌푸틀은 미동조차하지 않았다.
아슌푸틀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를 악문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쓰러진 토프키센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그녀가 겪은 고통의 백배 천배를 네놈에게 되돌려주마. 고통에 겨워 죽을 때까지 네놈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속죄해라.”
양자의 몸에 가려져 사각이 되어있는 공간에서 토프키센은 단검을 쥐어들었다.
빛살같이 날아 들어오는 단검에 아슌푸틀은 그의 가슴을 밀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뭣…?”
토프키센은 자신의 단도로 스스로의 목을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인체의 급소를 파괴당한 토프키센의 눈이 뒤집어지며 피거품을 물고 사지가 늘어졌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할 틈도 없이 안식을 찾은 것이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순간까지 베아트레아를 욕보인 것에 만족하는 듯이 보였다.
허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아슌푸틀의 몸이 천천히 떨리며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왕성이 거대한 폭발에 의해 무너질 정도의 폭발.
갑자기 작렬하는 폭발 속에 이제는 죽었구나 싶었던 휘진은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이구, 하여튼 사람 말은 더럽게 안 들어요.”
이명에 귀가 멍하다.
하지만 이 찰랑거리는 보랏빛 머리카락과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푸근한 미드의 감촉을 잊을 리가 없다.
“타타라?”
“내가 그렇게나 루블 왕국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 했잖아? 왜 굳이 기어 들어와서 이 사단이냐구.”
목숨은 건졌다.
그런 생각에 휘진은 천천히 주위 상황을 살폈다.
죄다 붕괴되어 공군함이 떠 있는 하늘이 보인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에서 오른쪽다리가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져 있었다.
“내가 0.1초만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 피닉스도 곧 온다고 했으니까 좀만 참아 일단은 통각 차단을 해놨어.”
“고추는 무사해?”
“하… 진짜 너 찾으려고 왕성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참 보람 없게 하네.”
한숨을 내쉰 타타라는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듯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근데 그렇게 떠나버렸던 타타라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나도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귀여운 제자가 눈물 흘리면서 애원을 하는데 모른 척 할 순 없잖아. 스승의 마지막 도리라는 거야.”
당분간은 속세와 연을 끊기로 작정했던 타타라를 리리엘이 어떡해서인지 찾아내 밤낮으로 빌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 완고했던 타타라도 단 한번만 휘진을 도와주기로 했다던 모양이다.
“뭐 도와줄 여지가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리리엘을 볼 면목은 생겼네.”
“무슨 소리야?”
“시끄럽고 잠이나 자.”
진통제의 영향으로 몽롱한 상태가 된 휘진은 타타라의 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루블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 토렌스.
사실상 루블 왕국군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그가 목숨을 잃고 왕성을 제압당했다는 소식이 돌자 왕국군의 잔존 병력은 빠르게 베아트레아에게 투항해왔다.
토렌스를 향한 존경으로 그나마 뭉쳐있던 왕국군이 토프키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백기를 든 것이다.
토프키센이 귀족들에게 행해왔던 잔혹한 통치는 반감을 사기 충분해, 도리어 몇몇에게 베아트레아는 구원자 대접을 받으며 루블 왕국의 문벌 귀족들을 흡수했다.
엘프들에게 향하던 잔혹한 법령은 폐지되었으며 아직 반항을 계속해오던 군벌들도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힘에 대항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자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슐레스비 제국의 여황제가 된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루블 왕국까지 정복해버린 그녀는 각종문제를 빠르게 해결한 뒤 슈펜하우져로 돌아왔다.
국가 간의 통합은 규모가 남다른 사업이기에 아직까지 많은 보완이 필요했고 루블 왕국과 슐레스비 제국의 중간 지점인 슈펜하우져에 머물며 그것을 지시하기 위함이었다.
아슌푸틀과 재회 이후 슈펜하우져에 따라 들어온 휘진은 방에 틀어박혀 아리스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충격은 아무리 무신경한 휘진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조금 더 올바르게 처신했다면, 재빨리 움직였다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들이 가슴을 굽이친다.
아슌푸틀에게 묻고 싶은 것들도,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것들도 많았지만 휘진은 그녀를 따로 찾아가지 않았다.
지금은 주어진 감정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벅차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의 충신을 잃고도 업무에 전념해야하는 아슌푸틀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지쳐 다른 누군가를 돌볼 여유가 없던 휘진은 오늘도 술을 마시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 시발…”
환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식사를 들여올 때 이외에는 누가 찾아와도 축객령을 내렸던 휘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의 방은 노숙자들의 쉼터 정도로 어지럽혀져 방 한가득 무릉도원처럼 담배연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휘진은 반쯤 풀린 정신을 다잡고 답했다.
“문 앞에 내려놓고 가!”
방구석폐인처럼 이불로 몸을 돌돌만 휘진은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도 머리가 징징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놈의 숙취.
-철컥
하지만 휘진의 답에도 열쇠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강렬한 빛에 눈을 찡그린 휘진.
“아유 참, 주인님. 제가 없더라도 환기 정도는 하셔야죠.”
처음엔 술에 많이 취했다고만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쯤 그녀는 누워서 투병을 하고 있을 테니까.
트레이를 끌고 툴툴거릴 여력 따위는 없을 테니까.
휘진은 흐릿한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욱, 담배 냄새 너무나요. 담배 끊으셨다면서 다시 피시는 건가요? 그러면 안돼요. 오래오래 사셔야 슈슈가 일자리를 잃지 않는다구요.”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라는 이세계에선 다소 수수한 칼라.
신체의 선이 얇다.
두툼하고 투박한 메이드 복을 입었음에도 가련해 보이는 모습.
엷게 눈매를 강조하는 쌍꺼풀, 경계가 희미한 입술.
색정이라는 말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도 청순하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아름다움을 품은 소녀.
첫 만남의 모습 그대로인 슈슈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혼내고 있다.
“슈슈.”
“주인님. 보고 싶었어요.”
슈슈는 도도도 달려와 이불에 둘둘 쌓인 휘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감정이 받쳐 올라와 눈물을 흘리는 그를 작은 소녀는 한참 동안이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