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북해로(1)
루블 왕국의 노브고로드 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왕성의 절반을 덮은 그림자들은 모두 공군함의 것.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나타난 함대에도 루블 왕국측의 대응은 침착했다.
하늘을 겨눈 20여개의 대공포탑으로부터 일제히 백색의 광선이 치솟는다.
토프키센의 명에 의해 항시 교전대기 중이었던 함대가 반대편 하늘에서 모습을 들이밀었다.
전후좌우에서 쇄도하는 맹공, 차원도약이후 함대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시작된 공격은 제국 제 1함대의 측면을 깎아냈다.
공간도약 직후의 함정(艦艇)들은 배치 밀도가 높다.
마포의 적중률이 3할을 밑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뭉쳐있어서야 모양 좋은 연습표적밖에 되지 않는다.
“아군 함 8척 격침. 적의 다음 예상 사격까지의 시간은 3분입니다.”
“산개 이후 포탑에 집중포격을 가하게. 적 함대를 상대하는 것은 나중일세. 전위의 일부만을 운용해 시간을 벌도록.”
지휘석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천리안의 구슬을 바라보는 아슌푸틀.
아리스나 휘진, 둘 중에 누가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소중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뇌는 타버릴 것 같은 마음을 외면한 채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전장의 전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높은 고도에서 아래를 촬영하는 관측함(觀測艦)에서의 부감이 고스란히 아슌푸틀의 앞에 떠 있었다.
“구축함대 전방으로 출격하는 척하다 좌우로 빠져라. 산개를 위한 양동이다. 1급함 들은 적의 마포를 최우선 타겟으로 화력을 분담해 일제 사격하도록.”
그녀가 대략적인 개요를 말해주면 그 옆에 있는 펠릭스가 통신망을 통해 상세한 전술을 전달했다.
펠릭스 자체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무지렁이였지만, 그의 몸을 빼앗게 된 바티스텡은 수백 번의 함대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선공을 내어줬다면 다음엔 돌려줄 차례이다.
무사히 함포의 사격준비와 동시에 흩어지는 거미새끼처럼 함선간의 거리를 확보한 제국 함대는 재장전을 끝내지 못한 포탑에 무시무시한 포격을 선물해주었다.
하늘을 두 쪽 내려는 양 소리를 지르는 굉음과 함께 마포를 발사한 공군함들이 반동에 의해 일제히 들썩인다.
집채만 한 돌덩어리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솟구친다.
마포의 포격에 휩쓸린 병사들은 뼛조각도 추스르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공활강포가 함대와 3대 1의 교환 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두 상대가 천천히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개시할 때이다.
지금처럼 머리 위에 바로 나타나, 비거리에 따른 마포의 마력손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선 대공 포탑에 장치되어있는 마력장도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통상 세 네 번 정도는 공군함의 포격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마력장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긴 열선은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포탑을 무력화 시켰다.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방패막이가 한순간에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보며 루블 왕국의 함대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적이었기 때문에 만반의 대처라고 준비한 것이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조롭군요.”
“아직 아닐세, 그 남자가 나타나질 않았으니.”
[전방의 적 함대 후퇴중입니다!]
통신으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보고에도 아슌푸틀은 전혀 미소 짓지 않았다.
함수를 돌려 퇴각하는 적의 꽁무니를 쫓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마포의 유효사거리 밖이니 추적을 위해서는 전속 접근해야한다.
그럴 경우 아직 정리되지 못한 대공 포탑에게 후미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조급할 필요 없네. 적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이 왕성. 천천히 부숴가며 그들이 조급해지는 것을 기다리세나.”
어차피 여기에 함대가 배치된 것은 이 왕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본진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포격을 가하고 있다면 오히려 저쪽에서 찾아와야 할 것이다.
대공포탑의 두 번째 사격은 예상시간인 3분보다 훨씬 늦었다.
대지를 뒤흔든 압도적인 무력과 공포 속에 공병(工兵)들의 대응이 훨씬 늦어진 것이다.
그중엔 몇 명이나 전장을 이탈하고 제 목숨을 살기 위해 도주 중이었기에 2차 사격의 화력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적 포탑 모두 무력화 했습니다]
관측함의 보고를 받은 아슌푸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신이 된 지금 그녀만 간신히 감지할 수 있는 힘.
마력을 불러일으킨 아슌푸틀의 고운 발을 그녀의 신기인 유리구두가 감싼다.
[3시 방향! 알 수 없는 마력의 움직임이 집결되고 있습니다! 빠릅니다! 너무나도…!!!]
-콰아앙!!!!
귀를 먹먹하게 하는 전장 속에서도 특히나 거센 굉음이 하늘을 뒤흔든다.
온갖 마력장과 수호장으로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관측함이 고작 일격에 하늘에서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마력 노심조차 한 번에 폭발해버린 관측함의 잔해가 마치 유성우처럼 지상으로 쇄도한다.
◈ ◈ ◈
전신에 눈부신 뇌전을 두른 토렌스는 무덤덤한 눈으로 불바다가 되어가는 왕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던진 뇌정의 일격은 수 킬로미터의 하늘을 꿰뚫고 적의 눈이나 다름없는 관측함을 격침시켰다.
지상에 발을 딛고 고고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토렌스.
백 척이 넘어가는 함대가 고작 한 명의 사내에게 위압감을 느끼며 위축되고 있다.
이 비현실적인 관경을 가능케 하는 것은 토렌스라는 남자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알려주었다.
붉은 돌 왕국을 진압하던 중 변란을 보고 받고 전속력으로 하늘을 날아온 그는 선두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얼마 전 아신이 된 슐레스비 제국의 여황제.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공군함 앞에선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럼에도 ‘신을 죽이는 자’라 불리며 경외의 대상이 되는 토렌스 앞에 모습을 들이민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아신이 된 직후 자신의 힘에 취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맹약에 의해 수백 년 간 이 왕조를 지켜오던 자신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다만 이것만을 직감한다.
원통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토프키센이 오른손을 뻗자 그의 주변의 마력들이 그 부름에 응한다.
그 마력들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인간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폭사해 죽을 정도의 밀도를 띠게 되었을 때.
그것은 새파란 뇌전을 머금은 천벌의 창이 되었다.
구불거리며 사방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새파란 뇌격이 토렌스의 손을 벗어나 빛의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한 창의 뒤를 비행운처럼 쫓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중간한 공격이 아니다.
과거 일격으로 성 하나를 함락해왔던, 공군함의 출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뇌격의 창은.
“걷어라.”
허무하리만치 쉽게 투명한 물결에 가로막혀 그 힘을 다했다.
하얀색 드레스를 너울거리며, 계단을 걷듯이 하늘을 내려오는 아슌푸틀의 발걸음마다 물결치듯 마력의 파동이 떨려온다.
그 아름다운 자태엔 제 아무리 토렌스라 하더라도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같은 껍데기가 맞이할 사신이라기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가?
토렌스가 발을 움츠렸다.
마력을 역 분출함과 동시에 로켓처럼 하늘로 치솟은 토렌스의 주변에는 8개의 창이 떠있었다.
만약 지금 아슌푸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맹렬히 상공으로 치솟던 토렌스.
그러나 그의 몸이 희미한 물결에 닿자마자 마치 심해에 가라앉기라도 한 듯 무겁게 멈춰 섰다.
토렌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물결은 고작 마력의 파동 따위가 아니다.
차원을 분리하고 그 격(格)을 나누는 삼계 마법의 정수.
그 어떤 마력과 공격도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어느새 그 범위를 넓힌 그녀의 마법은 토렌스를 둥글게 감싸 가뒀다.
“맹약에 묶여 영생의 삶을 도구로서 살아온 가련한 자여.”
아슌푸틀의 나긋한 목소리에도 토렌스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핀다.
뇌전의 출력을 이용한 탈출에 실패했다.
8개의 창 중 그 어느 것도 이 물결을 걷어내지 못했다.
아신의 강인한 육체를 이용해 발버둥 쳐도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듯이 여기서는 그 어떤 힘을 써도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를 동정하네. 이제는 안식을 맞이하게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투로 말하는 아슌푸틀의 말에 토렌스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 눈동자에 맺힌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 토렌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의 최후를 기다렸다.
마력의 작용으로 화려한 은발을 너울거리며 하늘색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의 뒤에,
수 백 개의 포신에서 작렬하는 마력의 스파크가 그 규모를 더해가고 있다.
이윽고 전 함대의 일제사격이 토렌스의 육신을 불사른다.
최강의 아신이라고 칭송받던 이가 맞기에는 허무하리만치 가벼운 최후였다.
◈ ◈ ◈
“아리스… 아리스…”
눈앞에서 아리스가 사라진 직후 휘진은 허우적거리며 왕성을 거닐고 있었다.
이미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병사들은 다들 분주하다. 혼란의 도가니가 된 왕성의 내부에는, 더 이상 휘진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상 밖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휘진은 몽유병환자처럼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긴다.
아리스를 찾기 위해서.
고작 이렇게 끝나버린 다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이미 끝이 났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그것을 거부한다.
유독 커다란 문을 비틀어 열어 들어섰을 때 휘진은 볼 수 있었다.
오염된 바닷가에 폐사한 물고기처럼 홀을 전부 채우고 있는 것들은 죄다 옷가지가 벗겨진 엘프의 시신이었다.
어느 곳으로 걸음을 떼어도 형편없이 나부라진 시체들이 발에 차인다.
그 어느 것에도 깊게 잠겨있을 것 같던 휘진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다시금 빛을 발한다.
격렬한 감정에 불타오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옥좌에 앉은 토프키센을 비추었다.
그는 한 마지막 한명의 엘프의 숨통을 끊으며 피에 젖어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스에게 일어난 것은 이 녀석이 한 짓이다.
그렇다면 아리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당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밀어내고 헛된 희망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 휘진이 물었다.
“아리스는 어디 있지?”
하지만 그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보며 허탈하게 기침을 내뱉는 그는 이미 약에 취해있다.
지금 휘진이 말하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하필이면 잔챙이인가?”
휘진은 검을 뽑은 채 토프키센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깊숙이 쑤셨다.
제대로 답할 생각이 없다면 뽑아낼 뿐이다.
한 박자 느리게 그것을 시선으로 쫓은 토프키센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만연의 미소를 띠웠다.
“네 주인을 데려와. 답해주지.”
“지금 묻고 있잖아. 어디 있냐고.”
칼날을 비틀어보아도 토프키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저주 받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원래라면 왕좌에 앉아 자신을 찾아올 아슌푸틀과 함께 폭사할 예정이었다.
제 아무리 아신이더라도 그 어떤 마법에도 속하지 않는‘왜곡’을 간파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이 뻔한 함정에 운 좋게 아슌푸틀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여의치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다음 기회라면 있다.
지금은 아슌푸틀의 심복을 데려가는 것으로 만족하자.
토프키센의 조그마한 읊조림과 동시에 장기가 대량의 폭약으로 왜곡되어있던 엘프들의 시체가 일제히 격발했다.
조그만 기색도 없이 펼쳐진 화염과 열풍은 시간정지를 사용할 틈도 없이 휘진의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