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여기사 구하기(4)
“어떻게 된 일이죠?”
도서관에서 불러들여져 객실로 돌아온 아리스는 불안하다는 듯 위병에게 물었다.
“성 내에 소란이 있어 여기서 대기해주셔야겠습니다.”
“소란이요?”
“일단은 들어가 계시죠.”
포로이지만 토프키센과 가깝다는 묘한 포지션의 아리스를 일개 위병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그녀를 방 안에 다시 가두고 떠나는 위병.
성내의 분위기가 소란스럽다는 것은 그녀의 방에서도 알 수 있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병장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고함을 지르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병사들.
시녀들조차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누비며 저들끼리 수군대기 바빴다.
“어찌해야할지…”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베아트레아 대공에게 무엇인가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토프키센의 왜곡이 걸려있고 마력의 사용마제 제한 당한 상태에서 아리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소란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계획의 일부일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계획을 기억하지 못해 수행해야할 일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불안감은 아리스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대공님…”
가슴에 불안이 가득하자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이럴 때 아슌푸틀은 언제나 아리스 혼자서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을 내려주었다.
더 명확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다.
그 불안감에 몸을 움츠린 아리스는 조용히 창밖을 내려 보았다.
◈ ◈ ◈
휘진이 왕성 내에 진입하고 한일은 간단했다.
말 그대로 노가다의 끝판왕.
모든 객실을 열어본다.
노브고로드 왕성에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 약 3000여개의 방이 있다.
시간이 없으면 전부 하나씩 열어보면 될 일.
처음에는 그다지 이목도 끌지 않고 주위사람들도 무시했었지만, 왕궁의 깊은 곳으로 갈수록 걸어 다니기만 해도 제지당하는 일이 잦아졌다.
“너 뭐야?”
지금만 해도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 고위 기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휘진을 불러 세운다.
휘진은 시간정지 능력을 이용해 무시하고 주변의 모든 방을 열어 보았다.
늙은 귀족, 젊은 아가씨, 기사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방안에 있었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는 아리스의 모습만이 보이지 않는다.
“침입자다!”
몇 번이고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반복한 결과 따라붙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정도로 깊이 들어온 이상 피투성이의 옷은 제법 이목을 끄는 모양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휘진은 아예 시간을 멈춘 채로 성내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명의 위병이 지키고 있던 방문을 열어 재끼고 들어갔을 때.
“아리스.”
감격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안전한 모습으로 방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휘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시간정지 능력을 해제했다.
“아리스.”
“휘진 경?”
갑작스럽게 방안에 들어간 휘진에 깜짝 놀란 아리스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다.
아무리 그가 신출귀몰하다지만 설마하니 적국의 왕성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휘진은 휘진대로 긴장이 풀려서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솔직히 걸어서 돌아다닌 시간이나, 도끼를 휘둘러온 시간 탓에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상황 파악이 끝난 듯이 속삭이듯 휘진에게 바짝 붙어 말하는 아리스.
다만 피투성이의 모습이 염려스러운지 목소리의 끝이 떨려온다.
“죽을 똥 싸면서 왔으니까 나중에 실컷 감사해줘. 우선은 나가자.”
“몸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으니까 빨리 나한테 업히고 눈 감아.”
휘진이 쭈그려 앉자 아리스는 그의 등에 업혀 목을 감쌌다.
시간정지 능력을 사용하고 자세를 바로잡으려면 힘드니까 미리 업어두는 것이 좋겠지.
다시금 시간을 멈춘 휘진은 지친 몸을 채근하며 으슥한 곳까지 도착했다.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체력을 소진한 휘진은 아리스를 내려놓은 즉시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목이 엄청나게 탄다.
아무리 아리스가 가벼워도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한 사람을 업고 몇 백 미터를 족히 걸었으니 다리 근육이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용했다.
갑자기 이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것인지 아리스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대공님께 따로 지시받은 사항은 있으신가요?”
휘진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아는 한에서 아리스는 아슌푸틀에 의해 버려졌다.
이 사실을 말해 과연 누구에게 득일 될까 싶었다.
아리스와 아슌푸틀이 조금이라도 서먹해지는 것은 뭔가 휘진이 마땅치 않았다.
히로인끼리는 오순도순 잘 지내는 게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리스가 그 사실에 상처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야. 자세한 말은 안전해지고 나서 하자.”
조금 더 체력이 있었더라면 아리스를 업고 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했을 테지만 일단은 이 창고 같은 골방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기로 한 휘진과 아리스.
“고초가 많으셨겠네요.”
각자 벽에 등을 기대로 나란히 앉은 상태에서 아리스는 자신의 옷소매로 그의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닦으려 들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설마 이 많은 피가 전부 적의 것 일리는 없다.
여기까지 뚫고 돌아오면서 아무 부상이 없다는 건 아신이여야 가능한 이야기다.
뭐, 사실과는 다르지만 피곤하기도 했기에 휘진은 털썩 아리스의 어깨에 기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기분 좋은 냄새 아리스는 휘진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그대로 안았다.
“앗…”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까봐 걱정했었는지 모른다.
살면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노력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를 구할 때만큼은 목숨을 걸었노라 부끄럼 없이 단언할 수 있었다.
처음엔 당혹스러워하던 아리스도 휘진을 끌어안았다.
더러운 얼룩이 묻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안 좋은 해프닝들이 많았다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주는 이 남자가 지금은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든다.
“아리스 가슴 주물러도 돼?”
“후후, 좋을 대로 하세요.”
좋은 분위기에 갑자기 망측스럽게 구는 그의 행동도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이렇게나 고생을 했는데 아무런 포상도 없는 것은 그것대로 너무 인색하게 구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사실 이제와서는 가슴 만지는 것 정도로 까탈스럽게 구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와는 알몸으로 비비적거리는 사이가 아닌가?
아무리 휘진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아리스의 탱글거리는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된 휘진.
허리를 끌어 앉듯이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은 휘진의 머리카락을 아리스의 손이 쓰다듬는다.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았더라도 포로 생활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쿠구구구궁…!!!
그때 하늘을 뒤엎는 마력의 파동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낡은 방의 천장에서 우수수 먼지가 떨어진다.
갑작스럽게 몸을 튕겨 일으킨 휘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리스도 놀란 듯이 휘진에게 다시 건네받은 검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지?”
방을 열고 상황을 살피려던 휘진은 어두운 골방을 밝히는 갑작스러운 광채에 뒤를 돌아봤다.
“아…”
아리스는 갑작스럽게 빛을 내뿜는 자신의 가슴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토프키센에 의해 관련된 기억이 완전히 잊혀 졌기 때문이다.
잔금이 간 도자기 속에서 등불이 빛나는 것처럼 희멀건 광채는 아리스의 살갗마저 꿰뚫으며 천천히 그 밝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아리스의 발걸음이 주춤주춤 휘진에게서 멀어진다.
“휘진 경, 제게서 떨어지세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에도 아리스는 가장먼저 휘진을 걱정했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느낄 수 있다.
이 광채는 그녀의 생명을 태우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숨어 있다는 사실도 잊고 휘진은 큰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휘진이 다가서려 할수록 아리스는 점차 방의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리스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휘진 경, 당신과는 조금 더 오랜 친구로 지내고 싶었어요.”
불길한 말의 시작에 휘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래서야 마치 작별 인사 같지 않는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뭐 가끔은 휘진 경이 원하는 대로 알몸의 교제도 하고 말이죠.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해도 좋을지는 아직 의문입니다만.”
쓴 웃음을 머금은 아리스의 몸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갈라진 틈새에서는 점점 그 빛의 세기를 더해가는 빛줄기들이 새어나온다.
삼계의 방대한 정보들이 불완전한 영체를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몸의 모든 정보들은 그 자신을 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정보로 뒤덮이고 있었다.
“앞으로도 대공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리스 뭔데? 왜 그래 갑자기?”
휘진은 떨리는 입술을 떼어 아리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서 풍기는 파란의 기색은 이 이야기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일단은 시간을 정지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지체시켜야 한다. 지금 그녀를 타타라에게 그대로 데려간다면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휘진은 시간을 정지 시켰다.
그러나,
“왜? 왜 안 되는 거야!”
아리스의 주변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다.
그 일그러짐은 차원을 왜곡시킬 정도로 방대한 데이터의 역류.
그가 간섭할 수 있는 정도보다 두세 단계는 더 위인 초차원적 현상이다.
휘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위이이잉!!!
기계음이 들려온다.
내구를 초월해 강력한 회전운동을 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회전음 속에서 아리스는 목청을 높였다.
죽음이 점점 다가온다.
토프키센에 의해 그 이유도,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용기도 잊어버린 아리스는 양 팔을 붙잡고 떨었다.
친구인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서슴없이 발을 내딛었던 이 사람.
먼저 배신했었던 자신을 아직도 친구라고 불러주는 이사람.
동료의 목숨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할 이사람.
지켜야 할 것을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고통을 아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휘진 경…”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눈물을 삼킨 의태(擬態)를, 자신의 최후의 모습을 바라본 그가 언젠가 이 날을 떠올렸을 때 너무 괴로워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을 간신히 만들어낸다.
“휘진 경…”
“안 돼!!!”
입술을 달싹이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아리스의 몸은, 눈부신 광채에 휘말려 사라졌다.
무엇하나 남기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