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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40화 (140/154)

140화 여기사 구하기(3)

휘진은 어깨가 결리는 것을 느꼈다.

무거운 손도끼를 몇 차례고 휘둘러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노동이다.

중간부터는 갑옷이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에 벗어 던졌음에도 오른팔이 아주 뻐근했다.

사람을 토막 내는 것에 거부감은 거의 느끼지 않았다.

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무거운 광기 덕택인지, 아니면 그런 광경을 목격한 직후이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호트란이라는 이상한 녀석에게 정신강화를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죽은 생선을 토막 내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질기고 단단하긴 했지만 여분의 무기까지 바닥에서 챙겨가며 몰살을 한 탓에 지하 1층으로 올라간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목격자는 엘프 친구들 밖에 없으니 암살 성립이다.

“더럽게 찝찝하네.”

사람에 피는 굳을수록 딱딱해졌고 생각보다 미끈거렸다.

도끼를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근처에 뒹굴던 천으로 손에 칭칭 감아 놓았다.

처음엔 누리끼리했던 천은 검붉게 변하고 예리했던 손도끼도 지금은 망치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곧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위로 새어나가고 그러면 아리스를 더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휘진은 메인 디시로 남겨 두었던 간수장의 방을 두들겼다.

“히이이익!!!”

볼썽사나운 비명이 들리지만 안에서 잠겨있는 것인지 열리지 않는다.

휘진은 몇 번 도끼를 내리쳐 나무 벽을 완전히 박살내고 방안에 들어갔다.

잠금 장치를 부스고 발로 걷어차니 간단했다.

특수대원이 된 기분이다.

“언니이… 언니이…!!!”

거기엔 두 명의 엘프와 간수장이 있었다.

한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목이 돌아가 사지를 경련하고 있고 살아 남아있는 엘프 쪽은 간수장에게 붙잡힌 채 인질이 되어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누워있는 엘프를 상대로 손을 뻗고 있었지만 간수장은 그녀의 목에 칼날을 댄 체 휘진에게 윽박질렀다.

“꼼짝도 하지 마! 다가오면 이 녀석을 죽여 버리겠어!”

그 한심한 모습에 휘진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아까까지는 인간취급도 안하더니 이제 와서 인질로 삼네. 그렇게 살고 싶어?”

올레그가 무엇인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상을 느꼈다.

분명 팔 안에서 꽉 잡고 있던 엘프의 감촉이 없다. 허무하게 공중을 휘저은 양팔의 느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올레그.

다시 앞을 보자 여동생 엘프가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잔뜩 튀고 굳어있는 남자의 얼굴은 오싹할 정도의 무표정이었다.

휘진이 엘프를 내려놓자 여동생은 언니에게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그 몸을 껴안았다.

“언니… 일어나… 언니… 흑흑…”

아까워하지 말고 시간을 멈출 걸 그랬다.

아주 조금 씁쓸함을 느끼던 휘진은 다시 앞을 봤다.

“오…오지 마!!”

자신과 이 미친 살인마를 가로막아주던 유일한 보루가 맥없이 무너진 것을 본 올레그는 형편없이 온 몸을 떨었다.

“다 같이 사이좋게 섹스하면 되지 죽이긴 왜 죽여?”

힘껏 휘둘러진 도끼가 올레그의 가랑이 사이에 박혔다.

전투에 대한 소양도 없고 이미 겁을 잔뜩 먹어 반항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올레그는 뻔히 날아오는 공격에도 고스란히 하물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고환과 성기가 박살나며 거세당하는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는 올레그의 얼굴을 휘진은 철 부츠로 그대로 걷어찼다.

자칫했다가 쇼크사 해 버린다면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겠지만 휘진은 이것저것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내…내… 내…아파악!! 끄아악!! 진짜 잘렸어!!!”

빙글 도끼를 돌려 잡아 그의 얼굴을 후려친다.

아령으로 후려친 듯이 훽 돌아간 그의 목과 함께 몇 개나 되는 누리끼리한 치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닥쳐봐. 사람처럼 울어대지 말고.”

한심한 꼬라지를 봐도 불쌍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시기를 한 번 밖에 못 자른 다는 것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이다.

“크윽…크으윽…”

휘진은 도끼 날로 올레그의 턱을 받쳐 들고 벽에 밀쳤다.

“쉬펜 아리스 알아? 니가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하나다. 어디 있어.”

안 그래도 겁에 질렸는데 다짜고짜 불알을 뭉개고 시작하는 취조에 답하지 않을 남자는 몇 없을 것이다.

간수장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수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짜배기 기밀들을 취급해온 올레그는 주저리주저리 자기가 아는 것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뭐? 귀빈용 객실?”

처음엔 여타 포로처럼 황성 내의 작은 지하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토프키센의 손님이 머무는 객실로 이동했다는 정보.

미심쩍긴 했지만 지금은 의심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대답을 들은 휘진은 올레그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밖에 나서자 휘진을 바라보는 수천 쌍의 시선이 느껴진다.

병사들의 학대에서 벗어난 엘프들이 일제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구원자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선망과 존경이 아른거렸다.

누군가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고, 누군가는 올레그를 향해 증오어린 시선을 던진다.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휘진은 올레그를 앞으로 던지며 외쳤다.

“나는 붉은 돌 왕국의 여왕 네시아 님이 보낸 특수 요원이다.”

특수 요원보다 적절한 단어가 분명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잘 생각이 안나니 넘어가자.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 되는 것을 느끼며 휘진은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엘프들을 전부 풀어주는 것이 맞는 걸까?

십인장의 말이라면 이 엘프들은 어차피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차라리 감옥에 가둬두고 다음을 기약하며 목숨보전을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중에 9할은 병사들에게 죽어나가겠지. 어쩌면 전부 죽을 수도 있고.

자신의 행동에 수 천 명의 목숨이 달리자 좀처럼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잠시 할 말을 고르던 휘진은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할 거면 확신이라도 심어주는 것이 낫다.

전력이 되건 안 되건 이 정도의 인원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다면 아리스의 구출에도 한결 수월해지리라.

“긴말 않겠다! 동포를 죽이고 억압한 악독한 루블 왕국 놈들을 우리의 손으로 처단하자!”

복수.

햇볕하나 들지 않은 심연 속에서 무기력함을 학습해오던 엘프에게 그의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쿵쿵!! 쿵쿵!!

공동을 점점 크게 울리는 발소리.

누군가 울리기 시작한 발 구르기가 점차 커져가기 시작한다.

엘프들은 죽어버린 간수들의 허리에서 열쇠를 찾아 동료를 구출하고 일제히 좁은 통로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양동으로는 충분하겠거니 싶은 휘진은, 올레그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폭동?”

어이가 없다는 듯이 토프키센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슈렐리아를 죽였다는 소문이 흘러들어가기라도 한 것일까?

관리를 아무리 개판으로 했거니와 지하실에 핀 버섯보다도 무력하게 변한 엘프들이 단체로 폭동을 일으키다니.

“송구하옵니다.”

이 불경스러운 보고를 올리며 몸을 덜덜 떠는 백작은, 토벌을 나간 토렌스 대신 토프키센에게 왕실 내외로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자마자 이런 불경한 일이 일어나다니… 토프키센의 더러운 성질머리라면 당장 머리가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토프키센은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아리스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시기가 좋지 않다. 이런 귀찮음을 감내해야하는 것이야말로 왕이 견뎌야한 왕관의 무게 아니겠는가?

“조치는 어떻게 취했지?”

“약 8000여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일제히 날뛰고 있어 왕실 근위대장에게 출동을 명했나이다. 근위대장은 일개 대대의 병력을 이끌고 진압 중이옵니다.”

“그밖에 확인된 사항은?”

“아직 소요가 진정되지 않아. 정확한 파악이…”

“됐어. 나가봐.”

시시하다는 듯 손을 내저은 토프키센은 한숨을 쉬고 왕홀을 빙글빙글 돌렸다.

생각을 한다.

갑작스러운 엘프들의 반란이 우연의 일치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치부할 만한 일인지 몰라도 토프키센은 기분 나쁜 위기감을 느꼈다.

타이밍이 너무 좋다.

가장 든든한 우군인 토렌스가 일개 함대와 함께 자리를 비운 틈에.

아리스가 잡혀있는 상황에.

베아트레아의 함대 도약에 대해 대처가 끝나가기 직전인 단계에.

아리스를 만나러 가야한다. 본능의 속삭임에 토프키센은 곧장 자리를 박찼다.

◈          ◈          ◈

“전 함대 도약 즉시 교전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슐레스비 제국의 제 1군용 선착장 위로 새로 편성된 함대나 도열해있었다.

황성 주둔 함대와 펠릭스 가문의 은십자 함대를 합쳐 만든 이 함대는, 마포 운용이 가능한 1급함 50척과 전투함을 보조하기 위한 2급함 123척으로 구성되어있다.

역사상 단일함대가 이 정도의 화력을 보유한 적은 없었다.

자그마한 섬이라면 일점사격을 하는 것만으로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화력이다.

일제히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마력노심소리는 망자들을 위한 진혼곡처럼 중후하게 흐린 하늘을 덮었다.

아슌푸틀의 마법이 준비 완료되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루블 왕국의 왕성 노브고로드로 도약하여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펠릭스의 보고에도 답하지 않은 아슌푸틀은 눈을 감고 삼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유리구두로부터 현현되는 ‘차원의 문’은 만능이 아니다.

도약할 지점에 대한 좌표를 확실히 해야만 가능한 제한적인 마법.

쿠데타 때는 그녀 자신을 좌표로 해 문을 열었기에 간단했었지만 루블 왕국은 여기서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이니 다른 해결책을 요구한다.

이 많은 함대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방대한 삼계의 영역에서 확실시할 수 있는 데이터가 필요했다.

일개 인간은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세계의 붕괴가 찾아오는 삼계에서, 가장 추적하기 쉬운 것은 ‘업(業)’이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인과의 연쇄 속에서도 결코 쇠퇴 되지 않는 ‘업’은 마력.

본디 마력이란 백 명의 사람이 백 가지 다른 특색을 갖고 있고 그 자체로 특수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슌푸틀은 아리스를 적국에 포로로 잡히게 만들었다.

아신의 복각체로 만들어져 아슌푸틀의 마력을 꾸준히 받아온 아리스는 그녀가 좌표를 확정할 수 있는 좋은 부표(浮標)가 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덮어씌워지는 방대한 정보의 범람을 견딜 리 만무하다.

함대가 도약을 완료함과 즉시 그녀의 육체는 그 소임을 다할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슌푸틀은 안전책을 마련했다.

만약 아리스가 도중에 죽어버릴 때를 대비해 휘진을 보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체내에 아무런 마력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아리스를 이겨내는 강함을 선보였다.

아무런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 손쉽게 타인의 마력에 감화되고, 적월의 암살자들을 이겨낼 정도의 무력까지 겸비한 휘진.

따라서 그의 몸은 아슌푸틀의 훌륭한 마력 저장고 겸 좌표가 된다.

성교를 통해, 그와의 접촉을 통해 알게 모르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 자체로는 인식하기에 부족하지만, 남녀 간의 성교는 충분히 삼계에서 찾을 법만 한 카르마의 실마리가 된다.

온갖 정보덩어리들이 떠도는 삼계에서 아슌푸틀은 찬연히 빛나는 두 개의 하늘빛 점을 발견했다.

누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다.

자신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아리스 혹은 휘진은 죽게 될 것이다.

아슌푸틀의 주변에서 마력의 흔들거림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뿔 고동소리와 함께 돛을 접는 백 척이 넘는 함선들이 일제히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슌푸틀은 고개를 저어 최후의 망설임을 끊어내고 함대에 명령을 전달했다.

“도약을 준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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