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여기사 구하기(2)
포로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정규 위병의 옷을 입고 있는 휘진은 별 다른 검문도 없이 제 집 드나들 듯이 포로수용소로 들어설 수 있었으니까.
시간 정지 능력의 한계치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력에 비례하는 것은 경험상으로 명확하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일일이 능력을 쓰다가는 한도 끝도 없었기에 경비병의 옷을 빼앗은 것이었다.
“이 새끼들 봐라.”
루블 왕국에서 엘프들의 취급이 박하다는 것은 소문으로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목격하게 된 것은 휘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언제나 타오르던 검은 연기의 정체.
알고 보니 그것은 엘프의 사체를 태우는 불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화장 따위의 고상한 것이 아니다.
산업폐기물을 태우듯이 엘프들을 겹겹이 쌓아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다.
인육이 타며 나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쟁이 인간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본래 악한 것인가.
엘프와의 접점이 거의 없는 휘진이지만 그들이 인간과 같은 지성 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휘진은 그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쓸데없는 이목을 끄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재빨리 감옥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이 거기 무슨 일이야.”
아마도 판단이 조금 늦었거나 한 것이겠지.
병사 중에서도 어느 정도 높아 보이는 사람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휘진은 최대한 위엄 있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의 앞에 뚜벅뚜벅 걸어갔다.
“왕궁의 위병이 무슨 일로 포로수용소까지 왔어?”
휘진은 미처 몰랐지만 왕궁 내에서는 직급과 직책에 따라 옷이 분류된다.
게다가 이곳에는 대륙 동부인이 적은 만큼 휘진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띠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애드립 타임이다.
소란이 일어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시간 정지 이후 깽판을 치면 된다.
“나는 위대하신 토프키센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밀명을 수행중이다.”
“밀명?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태연하게 턱을 들고 말하며 아리스에게 받았던 아름다운 보검을 들이미는 휘진.
이런 어설픈 개수작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자는 배짱이다.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지간한 저택 하나는 살 수 있을 법한 명도에 판단이 흐려진 십인장은 바짝 긴장했다.
원래 루블 왕국은 슐레스비보다 더한 빡빡한 규칙의 국가이다.
그러나 토프키센의 집권이후 온갖 기행을 일삼는 덕에 비밀경찰 정도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위병의 차림이기는 하나 이 남자의 손에 든 검은 보통의 것이 아니다.
이 남자가 하부조직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라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잠깐 고민하던 십인장은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를 올렸다.
“충성, 강철의 규율과 철혈의 통치를!”
“충성.”
굉장히 거창한 인사라고 생각하면서도 휘진은 마치 까마득한 상급자라도 되는 양 슬렁슬렁 경례를 받았다.
사기꾼의 거짓말도 경력이 쌓이면 보탬이 되는 모양이다.
이런 구라도 이젠 눈썹하나 까딱 않고 술술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포로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라고 국왕 폐하께서 친히 명하셨네. 이곳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십인장을 꼬드긴 휘진은 우선 그에게 감옥의 안내를 부탁했다.
갑작스럽게 아리스의 이름을 꺼냈다가는 괜히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바람이라면 안내를 받는 중 우연히 안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게 최선일 듯 싶다.
십인장의 태도를 지켜본 병졸들은 감옥을 드나드는 위병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대신 기이할 정도로 위병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십인장을 미친놈 보듯이 하긴 했지만.
처음의 위세는 어디 갔는지 십인장은 지금도 이렇게 알랑방귀를 뀐다.
“감찰관 님,올레그 간수장님께 보고 드릴까요?”
“됐다. 그래서야 내가 혼자 온 이유가 없지.”
수천 명에 달하는 엘프들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감옥의 규모는 더럽게 컸다.
그런 반면 10평이 될까 말까 한 방에 수십 명씩 몰아넣은 옥실은 러시아워의 1호선을 연상케 한다.
당연 위생이나 편안함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최소한의 옷가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벗겨진 채로 제각기 아무 말도 없이 서있었다.
엘프들의 퀭한 두 눈은 영혼을 잃어버린 듯이 황량해 휘진조차도 오싹함을 느껴야만 했다.
구석구석에는 이미 기력을 쇠진 한 듯이 죽어가는 자들도 있다.
자연의 기를 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엘프가 곰팡내 나는 돌바닥에 나뒹굴어야 하니 자연히 쇠약사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지시대로 하루치 식량은 수감 인원의 절반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왜?”
지금 자신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휘진은 되묻고 말았다.
설마 돈을 아끼려는 쩨쩨한 이유는 아닐 테고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그게…”
이유를 듣자 더욱 어처구니없었다.
식량 배급을 제한해 엘프간의 분열을 만들기 위한 것이란다. 실제로 몇 차례나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굶주린 배 앞에서는 동포고 뭐고 없는 거니까.
“생각보다 인원이 적은데 정말로 이게 전부인가?”
“저 쪽으로 내려가시죠. 간수장님도 아래층에 계실 겁니다.”
지하 1층 전부를 둘러보았지만 아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축처럼 불쌍하게 다뤄지는 엘프 친구들만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도 인원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수용소’로서의 모습을 얼추 구색이나마 갖추고 있었던 것에 비해 지하 2층은 차원이 달랐다.
지하 1층은 벽돌을 쌓아 만든 인공적인 감옥이지만 지하 2층은 원래 있던 지하의 동굴에 철창들을 박아 만든 것이다.
자연 동굴을 손봐서 만든 만큼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말도 안 되게 큰 공동이 등장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횃불들이 마치 RPG게임의 던전을 연상시켰다.
“하…흑…앗…!!”
“꺄아악…!!!”
“제발… 제발… 끄아악…!!”
곳곳에서 들려오는 절망과 비탄에 찬 괴로운 신음소리들이 공동을 칙칙한 악의와 함께 가득 채운다.
평소에 무사태평한 휘진이지만 이 광경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차폐물도 없는 곳에서 무수히 많은 엘프들이 사슬에 묶인 채 강간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
이쪽에는 정통했다고 생각했던 휘진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온갖 악랄한 기계와 다양한 유린 방법이 엘프들을 괴롭힌다.
휘진은 위층에 유달리 젊은 여성 엘프가 적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조금 예쁘고 어리다 싶으면 죄다 이쪽으로 내몰려 잔혹한 짓을 당하는 것이다.
고문 기술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개 병사나 간부로 보이는 자들도 많다.
동굴임에도 기묘하리만치 더운 열기에 웃옷과 바지를 벗은 남자들은 엘프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고’있었다.
귀가 잘리고 눈과 혀가 도려진 채 6명이나 되는 병사를 한 번에 상대하고 있는 엘프.
회반죽에 의해 팔과 다리를 벽에 파묻어 마치 가구처럼 사용되고 있는 엘프.
막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임에도 두 명의 병사에 의해 모욕당하는 엘프.
병사들의 조롱을 뒤집어 쓴 채 달궈진 철침 걷다가 끝내는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엘프.
“시발…”
아무리 그래도 저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휘진의 표정을 보고 십인장은 조심스럽게 천 쪼가리를 건넸다.
“냄새가 역하시면 이것을 쓰시지요.”
냄새?
지금 냄새가 문제인가?
그러나 휘진은 이내 알아차렸다.
이 십인장에게 있어서 자신이 얼굴을 찌푸릴 이유는 냄새 정도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엘프는 그저 인간의 형태를 띤 장난감일 뿐이다.
온갖 가학과 학대를 자유롭게 방출할 수 있는 포대기이다.
“저렇게 자유롭게 놔두어도 괜찮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지하에서 한 달씩은 썩어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엘프들입니다. 더군다나 위층에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있으니 반항을 하려야 할 수도 없죠.”
“자네는 저걸 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나?”
“처음엔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는 폐하의 영단에 감탄할 뿐입니다. 지난 전쟁으로 후유증을 앓아왔던 병사들에게 더없이 좋은 치료제이더군요. 분출되지 못한 파괴욕구는 자칫하면 아군 사기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실제로 이 수용소를 운영하고 엘프들을 각 군에 배치한 이후로는 성군기 위반과 폭력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휘진은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저 안에 인간은 없나?”
“이곳에 갇힌 죄인 중에 ‘인간’은 없습니다.”
개 헛소리 지껄이는데 뻔히 엘프로 보이지 않는 여성들도 보인다.
십인장이 한 말의 의미는 여기 들어온 이상 인권 박탈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는 뜻이겠지.
“시발 진짜 안 되겠다.”
솔직히 이정도면 많이 참았다.
휘진은 아리스가 준 소중한 보검 대신 저기 어린 엘프를 범하고 있는 병사가 내려놓은 짐 중에 뭉뚝한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이 새끼들에게 아리스가 준 칼로 벌을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돼지를 도살하는 칼은 도끼 정도가 분수에 맞다.
“네?”
휘진은 시간을 정지할 것도 없이 뒤를 돌아보려는 십인장의 뒤통수에 도끼를 꽂아 넣었다.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감촉.
인간을 향해 힘껏 쇳덩이를 내지르면 이런 느낌이 드는 구나 정도의 감회가 맴돈다.
“뭐야!!”
당황해 소리치던 한 병사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아무리 휘진이 단련되지 않은 몸이라 해도 엄연히 성인 남성이다.
시간 정지 능력만 있다면 가만히 있는 악마들을 처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일어난 두 차례의 살인에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적습이 일어난다니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소란에 큰소리를 외치며 뛰쳐나온 올레그.
다른 옥실이 철창을 제외하고는 어떤 가림 막도 없는 반면, 그가 나온 방만큼은 제법 고급스러운 집처럼 꾸며져 있다.
그가 본 것은 족히 서너 명 씩은 동시에 쓰러지는 병사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며 냉엄한 표정으로 손도끼를 휘두르는 한 남자.
위병의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우군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뭐하는 거야! 겨우 한명이잖아! 포위해 포위!”
한참 즐거운 시간을 방해 받았다는 짜증남은 순식간에 공포로 뒤바뀐다. 제아무리 일반 병사라고 해도 그 수가 이 백이 넘는다.
따라서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은 채 1분도 지나기 전이었다.
병장기를 잡기도 전에 30여명의 병사들이 목과 가슴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한명을 죽일 때마다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적의 모습은 올레그에게는 이미 실전된 차원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최고위 마법사 정도로만 비춰질 뿐이었다.
활과 석궁을 집어든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쏘는 것은 애꿎은 병사이거나 엘프들이었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적은 바람처럼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정확하게 숨통을 끊어나간다.
“지원… 지원 요청을 해야 돼. 빨리 가자 이놈아!”
-퍼억!!
“니가 관리자 맞지? 넌 이따 보자 씹새끼야.”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남자는 살덩이가 엉켜있는 도끼를 매섭게 휘두르며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로 달려 나갔다.
단순히 그곳에 도망치려는 병사들이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귀신에 들린 듯이 중얼거리던 올레그는 자신을 지키려던 호위 한 명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자 호들갑을 떨며 다시 방안에 처박혔다.